시끌시끌한 여고 교실. 교무실에서 뭔가를 보고온 반장이 선미의 옆으로 가 자기의 일인냥 기뻐해주고 있다.
"어? 반장. 나 아직 그런 소리 못들었는데? 어디서 보고왔는데?"
"아, 나 방금 우리 담탱 책상 다녀 왔는데 거기 너 실습생 확인서 써달라고 있더라. 진짜 축하한다!"
"아 진짜? 반장, 진짜로 고맙다!"
선미의 입이 귀에 걸릴만큼 환하게 벌어지며 웃고있다.
"자, 주목. 우리 선미가 이번에 유성에 실습생으로 가게 됬다. 선미는 종례 마치고, 나 따라 교무실로 와라."
선생의 한발작 뒤에 따라가며 예의 바르게 허리굽혀 인사하는 선미를 지나다니는 선생들 모두가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 주었다.
"언제든 힘들면 다시 학교로 와도 되니까, 사회생활 연습이다 생각하면서... 우리 선미는 그동안 잘 해왔으니까, 거기서도 잘 할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민등록등본이랑 이런건 작성해서 모레까지 가지고 와라."
환하게 웃고있는 선미를 기특하다는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선생도 자기의 일인거마냥 같이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의 그 일이 평생 후회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
"엄마아빠!! 나 유성 취업됬다!!"
"뭐?"
누렇게 변색된 벽지 구석구석 신문지가 대충 발려진 초라하고 궁핍한 살림살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을거라 추정되는 중년의 사내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초라한 여자가 선미의 말에 두눈이 휘둥그레지며 금새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이 번졌다.
"우리 딸래미가 커서 벌써 돈 벌러 간다고? 우리선미 공부도 잘하는데 대학 아빠가 이 모양이라 못 보내줘서 미안타. 거기서 착실히 해서 우리 보태달라고 안할꾸마. 거서 돈 착실히 모아서, 우리 선미 대학가라. 아빠가 진짜 미안타."
"아이다. 요까지 키워준거만 해도 고맙지, 아이다. 아빠 걱정마라, 유성이니까 돈도 많이 줄끼고 딸 이마만치 키와놓은거 이제 덕 봐야제. 미안해 마라. 난 괜찮타."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 앉아 버리는 아버지를 달래는 마음도 착한 선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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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캐리어에, 바지 두벌 티셔츠 두벌 운동화 한켤레 바리바리 짐을 싸고 폭신한 솜이불 한채 챙겨들고 간 그곳은,
선미가 태어난 그곳에서 고속버스로도 3시간을 달리고 거기서 또 택시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가야하는. 멀리서도 유난히 그 구역만 잿빛 하늘인 그런곳이었다.
유성, 세계적으로 반도체 생산의 탑을 달린다는 유성을 모른다면 외계인일 정도의 세계적인 기업. 유성반도체 회사 정문을 밟으며 선미는 유성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 갔었다.
최신식 기숙사, 매끼 호텔식당 부럽지 않은 사내식당에, 각종 복지 혜택, 거기다가 사회 초년생인데도 불구하고, 왠만한 직장인 남 부럽지 않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월급과 인센티브, 사원들에게 제공되는 사내대학과, 유성 회사의 정문을 밟는 이유만으로 쏟아지는 각종 혜택은, 선미의 유성인이라는 자부심을 더더 강하게 해 주었다.
"엄마! 아빠!"
선미가 그렇게 집을 떠난지 딱 한달하고도 보름만에 두 손 가득 종이백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다섯살 어린아이 마냥 뛰어들어 올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것이 마냥 봄날 일줄로만 알았다. 아무도 그 이후로 무슨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선미야!!"
"엄마! 이건 엄마꺼! 이건 아빠꺼! 나 이번에 월급 받았다! 첫월급! 홀수달이 보너스달이라서 이번엔 총 350만원 받았다! 많이 받았제? 이거 엄마아빠 내복 이니까, 오늘밤은 이거 입고 자라, 그리고 이건 엄마아빠 용돈."
다섯살 어린아이마냥 조잘거리며 기뻐하는 선미는 한달반 전, 보풀이 일어난 낡은 니트와 얇은 솜패딩을 입고 집을 나섯는데, 고급스런 원피스에 도톰한 코트를 걸쳐 입으니 제법 아가씨 티가 난다.
*
"언니, 수고하셨어요! 잘 들어가세요! 내일뵈요"
머리에 새겨진 이름표로만 서로를 알아볼수 있는 눈만 빼꼼 나오는 하얀 방진복을 입고, 있는 선미.
이미 익숙한 일이라는듯, 마이크로 스코프에 데일리 테스트(Daily Test)를 완료한 더미 웨이퍼(Dummy Wafer)를 얹어 예리한 눈으로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다.
처음 베이 지정을 받고 한 일주일 정도는 내내 알러지처럼 콧물이 흘러 마스크를 흠뻑 적셨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어떤 날은, 내내 코피를 흘렸고, 3주 정도는 이유 모를 하혈을 하기도 하고, 또 두달씩 세달씩 생리를 건너 뛰는 날도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저 교대 근무의 부작용이려니 하며 그저 교대 근무자들의 애환 정도로만 치부하고 나니 유성인이 된지 2년만에 이미 익숙해진 일이기도 하다.
"선미야. 이것 핫런(Hot Run). 어머, 얘 너 코피나!"
여기저기 바쁘게 베이를 돌아다니며 장비를 점검 해 보고 있는 선미의 마스크는 이미 출혈이 시작된지 한참 지났다는듯 새빨간 생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언니. 잠시만요. 저 좀 나갔다가 올게요!"
스막룸(Smock Room)에 들어와 허겁지겁 마스크를 벗어보니 이미 출혈은 오래 되었지만 지혈은 전혀 되지않아보이고, 수도 꼭지를 콸콸 틀어놓은듯 새빨간 생혈이 콧구멍 두개에서 쏟아진다. 그리고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이내 털썩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아..."
환한 형광등 불빛에 눈이부셔 깨어나는 선미. 오랜만에 오래도록 푹 숙면을 취한탓인지 어느날 보다 머리가 상쾌하고, 몸도 제법 가뿐한거 같다.
"선미야, 일났나??"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선미를 내려다 보고있는 선미의 엄마.
"엄마, 짐 여기 어딘데. 나 퇴근 이거 찍어야 하는데. 여기 어딘데."
"선미야, 오늘은 여기서 쉬라. 응? 회사에 다 말 하고 왔다."
*
"슨생님요. 우리 선미 우예 되는겁니꺼. 예?"
이미 너무 많이 울어 눈물도 안 나와 마른 울음만 꺽꺽 쏟아내고 있는 초라한 사내와 초라한 여자가 의사앞에 앉아 매달리다 시피 애원하고 있었다
"교모세포종이 힘이 좀 많이듭니다. 거기다 이미, 상황이 너무 많이 진행 되서... 이게 저희로써도."
"슨생님요. 우리 선미 아직 24살 한참 봄날 입니더. 저런 아한테 무슨 뇌종양입니꺼. 검사 결과가 잘못된거 아닙니꺼. 예? 아니모 그 항암, 항암치료 그거 한번만 더 해주심 안됩니꺼. 예?"
1년 사이에 이미 병세가 진행 되어버린듯,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혈색이 맴돌던 볼은 이미 푹 꺼져 누렇게 떠 있고, 항암치료 덕에 숭숭 빠져버려 몇가닥 남지도 않은 휑한 머리통을 한채 병실 침대에 누워 그저 숨쉬는 것만으로도 힘겹다는듯 온몸을 발발 떨어가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엄마. 나 고만하고 싶다."
"이기! 못하는 말이 음네. 우리는 아직 아니다. 우리는 할수 있다."
"엄마, 진짜 내 너무 아프다."
다 불어튼 입술을 겨우 달싹 거려가면서 쉬어 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보는 선미.
"니 오늘 느그 회사서 사람들이 온다더라. 뭐 사인만 해주모, 병원비 걱정없이 해준다드라. 한 10시쯤 온단다. 미안타. 애미애비가 돈이 없어서 우리 딸래미...이 애미가 한달만 더 품었으면 우리선미 팔자가 달라졌을까 싶다. 엄마가 진짜 미안타."
*
까만 수트를 챙겨입은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선미 병실 입구에 들어섯다.
"안녕하십니까, 유성반도체 법무팀 김진성입니다."
"오셨는교.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많으셨어예."
훌쩍거리는 콧물과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선미의 엄마가 그를 맞이한다.
"여기."
그는 오른쪽에 끼고 온 까만색 서류 가방에서 누런봉투를 꺼내 선미와 선미의 부모앞에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