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의외로 간단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로움이나 사랑은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욕과 비명 그리고 피와 눈물이 더 자주 보입니다. 제 쓸데없는 심려일지도 있으나 언제나 자기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은밀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었다고 끝을 모르는 착각에 빠져있는 듯합니다. 이 문제의 발단은 무엇일까요? 이익을 쫓는 것 이외에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특정집단 사람들 입장을 고려해 볼수는 없을까요? 일단은 대화가 가능한 같은 사람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돈만 알고, 믿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은행계좌에 있는 현금만이더라도 이런 처참한 실상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만약 그들이 알고서 한다면 제 수다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눈물과 피' 를 그리고 '사랑과 의로움'을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네 반지라 보고싶습니다. 양손에 껴져있는 반지들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복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이렇게 쓸모없이 한 글을 적습니다. 부족한 글이고 재미도 없으셨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심에 철게인들의 다정다감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돈과 권력의 획득 > 생존경쟁의 승리, 먹이 피라미드의 최 상층부에 들어서다 말 그대로 피라미드 시스템 입니다 - 소수 1%가 다수 90%를 착취하거나 이용하거나 기만해서 만들어낸 인간군락의 상층부의 리얼한 모습입니다
무소유 이타행 > 생존경쟁의 질주, 정반대 자리에서 묵묵히 바라보며 - 안타깝지만 세계상이 그러하거니 하면서 옆집 아재와 막걸리나 한잔 하면서 덕담을 나누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가끔 분노하면서 아프니까 인생이다 넋두리 하면서. 관조적인 태도가 무능으로 비춰지는 세계상을 그냥 그저 바라봅니다
삶의 진실은 무었일까 > 다수가 추구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태도를 거부하고 고독하지만 홀로 스스로 우뚝서서. 스스로 빛나는 ( 누가 알아주던 비난하던 상관없이) 나의 진짜 삶 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나즈막히 침묵속에 절규합니다
타인의 피와 눈물을 인지하든 부지하든, 부를 정상적으로 축적하였든 부정적으로 축적하였든, 오늘도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합니다.
정상적 부의 축적 관점에서만 짚어 보겠습니다.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한계는 존재해야 되지 않을까요? 사회의 부는, 생산적인 부분에서는 총량의 증가가 가능하지만, 분배적인 부분에서는 제로섬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평균이상의 부를 축적한 사람은 평균이하의 부를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 입니다. 이것을 능력에 대한 댓가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능력이상의 착취로 보아야할지 선긋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능력은 인정하되 일개인의 부는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그 부가 오로지 그가 모든 것을 창출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빌게이츠가 윈도우 작동 프로그램을 개발했을지언정 옥수수 한 톨, 옷감 한 조각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지적소유권과 화폐라는 두가지 무기로 그는 수만명, 수십만명분의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제도 입니다. 어쨌든 제도의 재정비를 떠나서, 능력의 댓가로 보이는 부분의 상당량이 사실은 자본주의 제도에 의한 착취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성공으로 본다면, 피와 눈물에 대하여 무지한 소치라고 하겠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는 부는 불어나지 않으면 물에 녹는 솜사탕처럼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한켠에서는 부의 축적이 산과 같고, 한켠에서는 피와 눈물이 강과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교육받지 않는이상 배울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언어도 교육받지 않는 이상 배울 수 없습니다. 늑대소년의이야기 실제사건으로 나타난 ... 사람의 두뇌는 언어를 배울 시기를 지나면 언어를 배울 수 없었답니다.
피와 눈물 역시 배웠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동물들은 자기연민을 하지 않지요. 즉 자기 다리하나가 부러졌다고 어디 주저 앉아서 낑낑거리지 않습니다. 그냥 불편한체로 살아가죠. 불편할뿐 그로 인해서 제대로 못하는게 있어도 하긴합니다.
자기자신에게도 눈물흘리지 않죠. 피라 불리는 고통도 지속적으로 느껴도 그저 견뎌낼뿐이구요 그리고 끝까지 그 고통스러운 생을 유지합니다. 살기위해 자손을 남기기 위해 태어난 목적을 순수하게 지켜냅니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살을 뜯어먹히는 것도 운명처럼 받아드리는 동물들도 있죠.
인간은 고통을 물리적인 고통엔 약으로 관계적 고통은 단절 로 피하지만 근친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은 인간으로 만들어 준 대 대한 감사함으로 최대한 피눈물 흘려 보답해야죠.
그렇기에 최대한 자기 이익대로 남들에게 도움주는 이유는 내가 편하려고 하는것이죠. 남에게 배푼다는 것도 순수히 그 사람을 위해서 가 아닐 수 도 있죠 순수한 이타성을 보인 경우 없어 보여요.
예수님 빼고는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죠. 왜냐면 오로지 인간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해 받아들인 죽음이니까요. 그런데 어차피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가치는 이미 다 발현되고 인간으로 누리면서 사는것보다 하나님 오른쪽에 계시는게 더 나아서 ... 내가 피눈물흘리면 왜인지 먼저 알아보고 원인을 제거 할 수 없으면 포기하고 제거 할 수 있으면 악독을 품고 살려고 발버둥 쳐야 하죠. 죽던 원하는걸 얻던 둘중에 하나 선택해야죠.
인간은 사람들 사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인간세상은 돈으로 모든 가치가 교환도어 돈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요. 그 권력자에 의하여 통치 되어가는 상태죠. 자연 세계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