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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에 대한 나의 의견?
게시물ID : history_142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안생기면그만
추천 : 6
조회수 : 107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2/26 02:00:45
많은 분들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보시고 조선도 쇄국이 아닌 빠른 대항을 했으면 일본처럼 되었을 것이다 라는 오해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그것도 그렇고 개항이나 조선 말 역사나 인물에 대한 오해도 조금 많으신 것 같더라구요.
몇가지 오해하시는 점이라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조선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개항이 늦어졌다?
대륙으로는 중국이 해양의로는 일본이 가로막고 있는 조선은 서양과의 교역이 늦을 수 밖에 없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뭐 어느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중국은 명나라때부터 서양과의 교역이 있었으며 일본도 이미 다들 아시다시피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의 무역거점을 따로 만들었죠. 반면, 조선은 서양문물을 접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을 거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19세기 일본과 조선의 격차가 벌어진 이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게 직접적으로 개항을 한 것이 1853년 입니다. 18세기 후반 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에는 많은 서양선박들이 다녀가서 개항을 요구했었습니다. 물론 조선정부가 거부를 했지만요. 즉,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어진 것은 아닐 뿐이지 기회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2. 조선은 일본보다 먼저 개항을 했어야했다?
이건 솔직히 저는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을 당했고 그후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급속도로 근대화가 추진되어 성공했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본이 정말로 운이 좋고 모든 것이 아다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단 일본을 직접적으로 개항한 미국은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불평등조약과 점차 정치, 경제 등등 분야에 대한 침식을 계획했죠.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국외에 대한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 일본의 독립적인 번들 대표적으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천황파가 막부파를 몰아내고 메이지유신에 성공했습니다. 만약 미국의 국내 사정이 원활했다면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NO입니다. 또한 일본은 중앙집권이 아니라 각각의 다이묘들이 번이라는 영토를 다스리는 봉건주의 국가였습니다. 이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개혓을 원하는 개혁세력이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죠. 하지만 전근대적인 국가시스템으로 봤을때는 중앙집권 국가보다 좋은 국가형태는 절대 아닙니다. 또한 개항을 먼저했다라고 치면 청나라는 이미 그 전에 영국과의 제한적이지만 광저우를 통해 무역을 하고 있었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영국의 아편농간에 말려들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죠. 조선도 일본의 메이지유신 보다는 저 거대한 청나라가 개항이후 서양세력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더 비중있게 지켜보고 쇄국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못된 판단이라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100% 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흥선대원군은 무조건 쇄국을 외쳤다?
이것도 아닙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말 어쩌면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정치가였다고 생각됩니다. 흥선대원군은 나라 안에서 세도 정치로 인한 폐단을 정리하고 다시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나라 밖 사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미 청나라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여 조선과 국경을 맞닿아서 더욱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원군은 국방력 강화에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특히 서양식 소총과 대포, 철갑선 제조등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조선의 전근대적 기술력으로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외국 세력에 대해서 무조건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 세력의 침입을 걱정한 대원군은 당시 선교하러 와 있었던 프랑스 신부들을 포섭해서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를 막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서원철폐, 경복궁 재건 등으로 기득권 세력인 유림세력들의 반발이 심했으며 이들을 완전 등지면 대원군 역시 정치적으로 완전 고립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림세력들이 천주쟁이들을 처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걸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병인박해라는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겁니다. 뭐 그 이후로 신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대원군이 완전히 서양세력과 등을 지고 배척하였지만 그 전에는 오히려 서양세력과의 관계를 도모하였습니다.
 
 
 
일단, 이러한 오해들을 좀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오유에 역사 능력자분들이 많으셔서 좀 조심스럽게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동아시아의 근대화의 필수조건이었다면 서양세력의 간섭배제와 개혁세력의 힘이 강해야했다는 것 같아요. 메이지유신은 개혁세력인 천황파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막부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이 자국 사정으로 신경 끄고있던 타이밍에 성공한 반면, 조선의 갑신정변은 애초부터 일본군을 끌어들였고 민비세력을 완전히 배척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시작부터 성공확률이 없었고 성공했더라고 그 뒤가 실패인 개혁이었죠. 청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양무운동이라는 겉만 바꾸는 개혁이 실패하자 캉유웨이를 위시한 개혁 세력들이 변법자강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고 황제까지 나서서 짖했지만 막강한 서태후의 보수세력이 개혁파 숙청도 모자라 황제까지 유폐시키면서 끝났죠.
 
그냥 요약하자면 중국은 약쟁이한테 사기 당하고 폐가망신한 케이스고 조선은 그거보고 약쟁이랑 거래 자체를 안한 거고 일본은 약쟁이가 다른데 한 눈 판 사이에 그 약들고 튀어서 그 약 팔고 부자된 케이스랄까요? ㅋㅋㅋㅋ
 
암튼 제가 개항에 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반대의견도 겸허히 받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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