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는 몇일 주기로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령에 맞춰 절도있게 움직이는 근왕병들의 모습은 자뭇 엄숙합니다. 근왕병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북을 울립니다. 질서 정연한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근왕병의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대 총선에서 나꼼수의 김용민씨를 꺾고 당선되었던 이노근씨가 바로 이 행사의 발명자입니다. 이노근씨는 '우리도 영국처럼 왕궁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하여 교대식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대식은 이제 연간 수백만명이 찾는 문화관광의 아이템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수문장 교대식은 전통인 것일까, 전통이 아닌 것일까가 의문입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실록에도 수문장에 관한 기록(교대식과는 관련이 없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교대식과 비슷한 것이 존재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은 "과거 그대로의 것"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수문장 교대식은 전혀 전통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 그대로의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시간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시간은 불가역적으로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과거는 어렴풋한 기억에 있고, 그것을 기록한 글 속에 파편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문장 교대식은 또다른 의미에서 전통적 소재를 사용하여 재해석된 현대의 '전통'인 것입니다. 전통이 발명된다고 한 말은 이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를 하였습니다. 그는 역사가가 거대한 바다에서 물고기를 건져올리는 낚시꾼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는 "과거 그 자체"이고, 물고기는 "역사서에 들어가는 역사적 사실"이고, 낚시꾼은 역사가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없으며 그대로 전달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전통도 "전통 그 자체"는 아니며 현대적 관점에서 구성된 전통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은 전통적인 만큼 현대적인 것입니다. 현대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전통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혀진다고 하는 "역사"란 무엇입니까? 저 유명한 문장은 마치 자연과학의 법칙과 같이 역사적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대로 드러나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건져 올려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전통은 여러번 다시 '건져 올려'졌습니다.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역사적 사실이 새로운 전통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억압 속에서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을 건져 올렸습니다. 서양의 Nation을 일본인들이 번역한 단어인 '족민'을 다시 번역하여 '민족'으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 그것은 시대의 요구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5000년 역사의 한민족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삼국시대의 혈전 속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를 적으로 여겼으며 "한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의 나라 속에서도 귀족층과 하층민들은 쓰는 말이 달랐고 서로를 '같은 부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전통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군부독재의 시대에도 역사는 새롭게 건져 올려졌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민족의 영웅들을 재발견하였습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바로 그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발자취를 폄하하려는 행위는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게 이들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목되지 않았던 역사속 영웅들이 이 시기에 재발견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민족영웅들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문화재보호법을 만들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만들어 민족 역사의 서사를 구성하려 하였습니다. 하나의 연속적인 민족 역사의 서사를 구성하고 그것을 민족의 자부심과 정권의 정통성으로 연결지으려 한 것입니다.
-5분사탐 동학농민운동- "반봉건적", "아래로부터의 개혁"
이러한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이 뜨겁게 불타올랐던 1980년대에도 새로운 전통이 탄생하였습니다. 민주주의,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꿈꿨던 운동권 세력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의 역사였습니다. 조선시대 "동학난"은 "동학농민운동"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민초들의 끊임없는 항쟁과 투쟁의 역사가 탄생하였습니다. 부패한 구한말의 정부에 맞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었던 민중들이 이 땅에 예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의 모든 측면이 민중의 주체적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교과서에도 나타나듯이 이들 동학지도부의 태도는 근왕적이었습니다. 왕의 눈과 귀를 막는 간신배를 몰아내고 왕을 올바른 정치로 이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고종이 해산령을 내리자 그들이 바로 해산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21세기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시대에 우리에게 있어 전통은 하나의 '문화적 자본'이 되었습니다. 전통문화는 컨텐츠가 되었습니다. 문화컨텐츠진흥원이 설립되어 문화 원형 찾기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조선시대의 엄숙한 궁전은 문화컨텐츠가 되었습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날마다 교대식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극장이기도 합니다. 문화컨텐츠는 우리의 고유한 자산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21세기 새로운 문화적 성장동력으로 삼으려는 것이 최근의 경향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통은 전통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전통은 발명되는 것입니다. 어떤 전통을 누가 만들것인가 하는 것은 문화적인 권력 투쟁입니다. 문화적 권력 투쟁은 정치적 투쟁과는 그 결을 달리합니다. 정치적 힘이 있다고 해서 문화적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전통은 누군가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 투쟁에 있어서 전통'은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러한 권력투쟁에서 힘을 가진 전통을 "헤게모니(hegemony)"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명을 그 단어에 담기 뉘앙스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현상이 그러하다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통을 어떻게 보아야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전통을 새롭게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학>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날로 새롭게 하며, 나날이 새롭게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전통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됩니다. 우리는 나날이 이러한 현상을 겪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새롭게 전통을 창조하여 그것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최근 상영된 1987은 2017년의 촛불집회와 묘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새롭게 전통을 창조하고 나날이 그것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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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경향신문의 최범씨가 쓴 기고문을 읽고 느낀 바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쓴 글입니다.
반응이 좋다면 시리즈물로 연재해볼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