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인칭이라고 우기는 1인칭 비슷한, 근데 어쨌든 3인칭.
* 이번 글은 커플링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편으로 끝나요. 밀레톨비던 톨비밀레던 뭐 어떻게든 되겠죠. 저도 몰라요(?)
* 누군가에겐 분명~ 이후 G21 관련 조각글도 더 이상 안씁니다.... 으아마도.
여느 때처럼 흔한 날이었다. 기사단과의 인연은 지속되지만, 전처럼 연락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제서야 전처럼 한가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짬짬히 옷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솜씨가 좋아지는 걸로는 최적의 방법이라고는 해도 토나오게 어렵다더니, 요즘에는 그래도 시간날 때 조금씩 해두면 금방 손에 익는 것 같았다. 기사단의 소식을 듣기 전 만난 에아렌이 알려준 체인 블레이드도 능숙해져, 가끔 만나는 에아렌에게 금방금방 쑥쑥 는다며 칭찬을 받았다. 머리를 쓰다듬어진 건 덤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더 오래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낚시도 하고, 미뤄뒀던 목공도 했다. 한동안 간 적 없던 탈틴을 이번에 다시 간 김에 그림자 미션도 받아서 깨봤다. 며칠 전엔 캐러반-조가 어디서 시즌권을 끊어왔다더니 알고보니 몇 년 전에도 했던 스키와 스키점프 이벤트 때문에 던바튼에 왔었다.
그렇게 조용한 나날이 흘러갔다. 변함없이, 조용히.
솔직히 인정하자. 밀레시안이 톨비쉬와 대치했을 때, 그의 말은 분명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같은 불멸자일지언정, 그 시간을 세어보라고 하면 눈 앞에 있는 이가 훨씬 더 오래 산 것은 자명하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마음 한 편에서 수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게 올바른 답이라곤 할 수 없었다.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이계의 신을 강림시켜 대적하게 한다는 건, 결국 강림시키는 자와 세계를 지키는 자의 주체가 다르다는 얘기나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지키는 자의 편에 설 수도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그게 방어기제가 될 수는 없었다. 이미 그 순간부터, 알반 기사단과 그리고 밀레시안을 배신한 것이었으니까. 더욱 슬펐던 건, 그가 그런 결말을 내기까지 무턱대로 낸 것은 아닌 걸 밀레시안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랴.
하지만 그에게 있어 혐오감을 주는 것은 인간보다는 신 쪽이었다. 당장 키홀만 해도 몇 번이고 자신과 대적하고 있는 와중에 좋아보일래야 좋아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반신이 되고, 신의 말씀을 섬기는 알반 기사단을 보며 느낀 감정은 복잡했다. 그들의 신, 아튼 시미니는 진실되게 인간을 사랑할까. 당장 인간들의 여신이라는 모리안마저 밀레시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버렸는데.
처음 이신화를 했을 때 느낀 감정도 그런 탓에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그 모습을 '신'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결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조차 언젠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그런 모습도 모르고 신이시여, 하고 넙죽 절하는 사람들을 하루에 몇 번이고 만난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었나?
그 잘난 '신'이 되기까지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들이 두 손이 넘어가는데?
그 눈들이 언제까지 자신을 우러러볼까? 같은 시간축을 사는 이들이 아닌 데다가 언제나 세월을 비껴가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텐데, 그 모습을 죽을 때까지 지금과 같은 동경의 시선으로 쳐다볼까?
그럴 리 없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거부감이란 게 존재한다. 더구나 밀레시안은 에린에 있어서 초대받지 못한 자나 다름없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죽을 수도 없고, 죽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 채 영겁을 살아가야 한다.
"...이리니드의 저주보다 더 심한 쪽 아닌가, 이거."
던바튼 외곽에 설치된 가로등을 쳐다보며 밀레시안이 웃었다.
톨비쉬의 검에 찔렸을 때도 찢어질 것 같이 고통스러웠던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육신'에 관련된 감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환생했으면 금방이고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통증.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밀레시안은 이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평범하지 않구나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과 달리 톨비쉬에 대한 증오나 분노와 같은 감정은 크게 들지 않았다. 이 상황만 벗어나면 되는 일이니까. 밀레시안의 삶은 쓸데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편했다. 그런 생사가 위급한 순간마저 다난과 다르게 '다시 환생하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미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감정은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에 제격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감정에 변함은 없건만.
없어야만 하는데.
어둠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얼굴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아이스볼트의 시동어를 외치고 주변을 꽁꽁 얼려버렸다.
지독한 인간 같으니.
정말 여러가지 의미로 지독한 인간이었다. 신 같은 거 믿지 않는 자신에게 아튼 시미니의 믿음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들었는데, 싸울 생각이 없던 자신과 대적해 밀레시안이 제일 증오하는 '신'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톨비쉬 그였다. 그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일을 했다는 게 그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화를 못이긴 밀레시안이 아이스볼트가 아닌 헤일스톰으로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한참 얼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자기만 깨달음 얻었음 다야?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 동료들은? 아발론 게이트는? 알반 기사단은?
자신은 그 안에 없어도 괜찮았다. 밀레시안은 어차피 생의 길이가 다르니까 그려러니 했다. 근데, 도대체.
"...진짜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밤하늘의 별만 들은, 그런 밤이었다.
* 무신론자를 신 혐오자로 만드는 에린 세계! 유후! 환경이 참 절묘하죠. 신들이 통수때리고때리고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