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 정가와 언론들은 사실상 패닉상태에 돌입해있다. 한국과 중국내 반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각오했었지만 미국이 이토록 쉽게 물러설 것으로는 차마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부시 미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본의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철석같이 "적극 지지"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좀처럼 흔들릴 가능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8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의 UN안보리 확대 9월시한 반대, 일본에게는 역풍"이라며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는 타힐케리 미 국무장관 UN개혁담당 특별고문의 발언에 따른 것이었다. 타힐 고문은 UN안보리 개혁에 대해 "시한을 설정하지 않고 폭넓은 컨센서스를 통해 풀어야 한다"며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이 제시한 9월 시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동안 부시 대통령은 물론, 라이스 국무장관이 앞장서서 일본의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상황 변화이다. 물론, "컨센서스를 통해 풀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에 불과하므로 동아시아에서의 반일 무드가 가라앉고 일본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부각될 경우 또다시 종전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에 대한 반발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오늘 중국 북경에서는 5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일본대사관 주변에 집결하여 일장기를 불태우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 당국의 철저한 시위 및 집회 저지에도 불구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지침을 공유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까지 포함 오늘 하루에만 중국 전역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이 반일시위를 벌였으며, 홍콩과 대만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중심가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
급기야는 중국내 반일시위를 전세계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언론들은 한국과 중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력한 반일시위가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저지"와 "영토분쟁에 따른 분노"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현재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중인 국가가 일본 이외에도 독일, 인도, 브라질, 호주, 캐니다,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등이 있음에도 그 어느곳에서도 이와같은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결국 왜 유독 일본의 경우에만 이토록 극렬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저지" 시위가 벌어지는지 이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같은 분위기를 간파한 미국과 유럽 언론들은 앞다투어 한국과 중국내 반일시위 관련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를 거론하는 가운데 일본의 반성과 회심에 대해 인접국들이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 국가들 모두와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도나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 정도니 그 파장이 어떠한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미국이 종전 입장에서 한발 후퇴한 배경에는 이러한 아시아지역의 급변하는 정서가 깊숙히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무모하게 일본을 감싸려들다가 자칫 아시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일시위가 반미시위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제 타힐케리 고문의 발언은 "미국을 일본과 한통속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로 풀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당장 발에 불이 떨어진 것은 일본 고이즈미 총리이다. 왜냐하면 미국만 믿고 너무 설쳐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일본은 물론 미국 정가에서도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 유럽과 개발도상국들만 의식한 나머지 정작 자신의 이웃들인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파행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참배, 지방의회의 영토분쟁 유발, 역사교과서 왜곡 등 동아시아 인접국가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가운데 지나치게 미국의 뒷배경에만 의존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결국 이웃국가들에 대한 무성의한 외교가 미국에게 큰 부담을 지어주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고이즈미에게로 돌아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치권의 숙원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군사대국화이며, 또 하나는 바로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다. 만일 현재의 국면이 호전되지 않는 가운데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연내 진출이 좌절될 경우 고이즈미와 자민당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며, 결국 이는 헌법개정 분위기에도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야말로 고이즈미는 '四面楚歌'인 셈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섣불리 나설 수도 없는 국면일 뿐더러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해보기에는 일본정부가 너무 멀리 나가버렸다. 그렇다고 한국과 중국 국민들을 상대로 눈물흘리며 사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일본 국민들이 그 당위성에 대해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시의 고민, 盧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한국민 굴복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부시는 왜 "고이즈미 일병 구하기"에 나설 수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무현 대통령을 압력과 위협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민 전체를 굴복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 언론들은 한국과 중국내에서 일고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일본을 두둔하는 순간에 반미감정이 극도로 고조되고 이것이 결국 "미국제품 불매운동"으로 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인데 굳이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 일본 입장에서야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 국가적 숙원사업일지 모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미국의 국익을 좌우하는 중대한 이슈가 결코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UN안보리 개편에 대한 입장은 "UN의 효율화와 다기능화"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가급적이면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고 서로 "말빨"만 세우는 갑론을박의 장이 아닌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조직"으로의 변신을 기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일본과 독일을 안보리에 편입시키되 제3세계 국가들의 진출은 가급적 막겠다는 입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을 무리하게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컨센서스 도출을 위해 제3세계 국가들의 보다 광범위한 참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도리어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미국의 입장 선회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미국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특히 한국과 중국의 움직임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국가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파트너이기도 하며, 여기에 북한까지 가세할 경우 자칫 미-일 양국이 나머지 6자회담 파트너들로부터 고립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일본과 한국, 중국간 감정 대립에 있어서 미국이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스탠스를 취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미 이러한 구도를 읽었는지 북한은 "6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없다"며 종전의 유연한 입장에서 다시 후퇴하였다. 그런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독일과 터키를 순방하기 위해 출국했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AZ)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과 독일의 전후처리, 그 중에서도 특히 사과와 재발방지에 대한 대처법의 차이를 비교하며 강력하게 일본을 비판한 바가 있다.
사실 지금의 형국은 한국,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몰매를 맞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FAZ지와의 회견 내용은 이미 전세계 언론에 타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과 중국내 반일시위를 전하는 보도 가운데에 빠지지 않고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노대통령의 독일 FAZ지와의 회견 내용임을 감안하면 그 파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짐작해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카운터펀치가 고이즈미 총리를 KO시켰다 ?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對일본 압박전술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예민한 사안은 피해가는 가운데 심리戰과 미디어戰을 통해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세계의 여론을 움직이는 전략은 매우 탁월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중국 정부 역시 우리와 동일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공산당 일당독재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중국 공안당국이 수만명의 시위대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즉, 중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북경주재 일본 공사를 찾아가 "깊은 유감"을 전달하고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한 만반의 조치"를 약속했지만 과연 그것을 진심으로 지킬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 언론 조차 반신반의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의 고민도 점점 깊어만 간다. 문제의 역사왜곡 교과서의 핵심 배후라고 할 수 있는 극우성향의 산께이(産經)신문은 한국과 중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항일시위에 대해서만 보도할 뿐 국제여론의 동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도를 외면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 및 중국과 달리 일본인들의 독도 및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지극히 낮다는 점이다. 즉,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인이 테러를 당하거나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전국 단위로 조직적으로 벌어지거나 관광지에서의 대일본인 적대 무드가 극도로 높아지지 않는 이상 이들이 한중 양국과의 긴장관계를 피부로 느낄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렇게되면 일본사회는 조용한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심리戰과 미디어戰으로 고이즈미 내각만 치명타를 입을 것임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앞으로도 정부와 국민간의 절묘한 역할 분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정부는 계속해서 고도의 심리戰과 미디어戰으로 치고빠지는 가운데 국민들은 일본정부에 대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이 오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하여 현재와 같은 미국의 일본 "떼어놓기" 전략이 계속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현재까지의 흐름만 놓고보면 최소한 對고이즈미 압박에 있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화끈한 KO승을 거두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으로도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된다. 아직 승부는 결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