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편은 G21 1부 소망하는 자들~별의 상흔까지를 다루고, 특히 별의 상흔이 중점적인 글입니다. 스크립트 최대한 많이 넣어서 그런지 좀 깁니다. (지금까지 한 2천자 내였다면 이번 글만 5천자) 여전히 전개는 비슷하게 가는데 각색은 좀 많이 되긴 했어도 지금까지 올린 글 중에 제일 원작에서 손을 덜 댄 글인 거 같습니다.
선지자들은 끝내 아발론의 수호자마저 잠식시켰다. 계속되는 전투는 정신을 갉아먹기 적합했다. 만약 그에게 신앙심이 있었다면 신의 계시인가 하고 고민했을지도 모르지만 밀레시안은 주저없이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그런 고민은 알반 기사단이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밀레시안들의 신이 누굴까 생각하다 모리안인 걸 생각하니 그런 신 필요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모쿠르칼피까지 쓰러트리자마자 밀레시안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터가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밀레시안님, 괜찮으세요?!”하고 걱정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여 괜찮다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보였던 것은 이 땅의 과거였다. 초대 단장을 걱정하는 사제들의, 단장은 모르는 이야기.
그들이 이 미래를 알면 어찌 반응할까. 당신들은 틀렸다고, 결국 봉인은 풀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지만 밀레시안이 이런 감상에 젖어있을 틈도 없이 또 다른 수호자가 잠식당해 기사단이 정리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심지어 이상한 기운까지 느껴지기 시작해 쉴 틈없이 기사단을 쫓아 움직인 폐허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과거였다.
에린에서 살아가며, 밀레시안은 의외로 여러 사람과 만났고, 또 헤어졌다. 그 만남이 기뻤냐고만 할 수 있는 것만 있지도 않았다. 지금 눈 앞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대부분 그런 이들이었다.
어째서인가 머리가 멍한데, 지금까지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은 금발과 긴 로브가 인상적인 이였다. 그것도 어딘가 위화감이 있는 모습으로. 지금 이 사람의 모습은, 이런 청년이 아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은, 배신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려 할 때 그가 말했다.
“내가 바랬던 것은 글쎄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이제는 알 수 없습니다. 한번 말해보시지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겁니까. 내, 나의 첫 여정을 당신은 보았지요. 나의 열망이 헛된 것이었습니까?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까?”
‘그건 내가...’
어째서인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근데 그 질문이 생각나질 않았다. 자신은 그에게 뭘 묻고 싶었는지.
“어찌되었든 미안한... 미안한 일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녀에게도요.”
왜 그런 표정으로 눈을 감는거야.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거야.
그 말은 내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기억나려고 할 때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저 사람은... 누구...’
아는 이였다. 멍한 머릿속이긴 해도 초면은 아닌 걸 알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기억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한 채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다음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붉게 타오르는 적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신체 한 쪽은 어딘가 피부와 다른 기시감이 느겨지고, 방금 만났던 이와 비슷한 연배의 사내였다.
역시, 밀레시안이 만났던 이였다.
“나는 오랜 시간을... 아주 오랜 시간을 헤맸지. 길고 긴 시간이 지나며 곁에 남아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후우... 어느새 종적을 감췄어.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딘가 느껴지는 슬픔. 잃어버린 게 많았던 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은 그래, 많은 이들을 잃었다.
“너를 원망하냐고 묻는다면.”
그 원인은 밀레시안 자신이 아니다.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니겠지만, 이 사람은 그걸 모른다. 그걸 모른 채로...
“우리에겐 어쩌면... 조금 더 기회가 필요했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제는 조금은......”
‘아냐...’
더 말이 이어져야 했다. 이대로 그렇게 눈을 감으면 안되는 이였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씁쓸함이 가슴에 맴돌았지만 이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다시 잊어버린 채 남는 것은 허무함 뿐이었다. 그런 밀레시안의 눈 앞에 비치는 이는 작은 소녀였다.
앞서 만난 이들보다 훨씬 작은 외형의, 높게 머리를 묶은 소녀는 생기발랄했다.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머리를 덧없이 따라가자 무언가를 찾는 듯, 밀레시안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녀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이젠 모르겠어...’
이 사람들이 왜 눈 앞에 나타났던건지.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지.
하지만 밀레시안에게 남은 감정은 덧없는 슬픔과 부정적인 감정들 뿐이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과 어긋났던 이들이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느껴지는 감각은 지독하리만치 선연했다.
무릎이 제 힘을 받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와중에 밀레시안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다. 이젠 닿을 수 있을까 하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낯이 익은 이가 여신을 구출했다고 힘차게 외친다.
낯이 익은 이가 어느 순간 자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덧없이 사라진 이들이 갑작스레 나타나 그런 ‘자신’을 감싸며 나타났다.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해왔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슬프게도 그 결말은 좋지만은 않았다. 이제 볼 수 없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결과엔 밀레시안 자신 또한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어 이게... 뭘 위해서 했던 일인데....? 내가 바꿀 수 있던 미래가, 분명 있었을텐데... 어째서.... 난...’
숨이 막혀온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모여 구체적인 모양이 되어 밀레시안의 목을 옥죈다.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렇게 모든 걸 잃어버리나 싶었던 때였다.
“......님! 안됩니다. 부디, 제발...! .....님...!”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보다 제일 힘있고, 또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 목소리 또한 알고 있지만, ‘평상시’에 이런 목소리를 냈던 적이 극히 드문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야....’
“제가 마지막까지...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밀레시안님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드실 셈입니까...?”
‘....나를 걱정하는건가...?’
“홀로 외롭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기억이 날 것 같은 목소리의 감정이 점점 밀레시안에게 전해져왔다. 이 감정은 걱정이었다. 또한 우려였다. 지금까지 지나쳤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런 감정을 가진 이는 밀레시안에게 없었다.
“당신을 놓지 마세요! 혼자 고통을 짊어진 채... 어둠에 몸을 맡기면 안됩니다. 빛으로,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제가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밀레시안이 공간에 갇힌 다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목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여전히 시야는 흔들거리며 제대로 서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고개 정도는 들어서 누군지 확인해볼 수 있을 거 같아서 고개를 들어보았다.
‘알고 있어.... 누군지...’
여기서 만난 이들 모두 아는 이들이었지만 좀 더 분명하게 하는 이였다.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갑주라던가 울 것 같지는 않지만 이대로 어떻게 되면 정말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은 걱정 가득한 푸른 눈동자. 곱슬거리는 금발이....
푸른 빛깔로 빛나는 방패까지 전부 다.
‘가르쳐 줬어... 실드 오브 트러스트.’
믿음의 방패.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힘.
이것을 알려준 것은 그래, 이 사람이었다.
“밀레시안 님! 괜찮으십니까?”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정신을 서서히 돌려놓았다. 청각이 처음 트였고, 다음은 시각, 그 다음은 이상하리만치 아픈 촉각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더 이상 세게 손을 쥔다면 정말 부러질 지도 모를 정도의 아픈 감각 때문에 현실성을 느끼자 보이는 경직된 표정이, 그 푸른 눈동자가 밀레시안의 눈동자와 맞춰졌다.
“괜찮으십니까? 방금까지... 방금까지 밀레시안 님도 광물에 갇혀계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데, 광물이라니?”
“여러분의 뒤를 황급히 따라가고 있는데... 이상한 신성력과 함께 전 마법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악몽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은 기억을... 잊고 싶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서 난도질당하는 그런 기억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깊게 절망할 뻔했습니다.”
‘아 그럼 그게...’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분명 좋은 일도 과거에 있었을 터이지만, 밀레시안에게 과거는 압축적으로 말해 슬픔이었다. 너무 많은 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곳에 보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이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는 못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어? 그게 함정인 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희미하게... 어떤 희망과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아, 그런 건가.
톨비쉬가 잠깐 말을 멈춘 틈을 타 왜 그가 그 곳에 나타났는지 밀레시안이 이해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와서, 함정에 걸린 아르후안 조와 밀레시안 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단장님이 알려주셨던 기도문만으로는 소용이 없어서, 어떻게든... 어떻게든 밀레시안 님을 함정에서 구해내려 했는데... 일단은... 무사히 빠져나오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혼자 심연에 끝없이 빠져있었다면 자신은 그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지 도리이지 않을까 싶어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들렸어.”
“...네?”
“그, 그러니까. 톨비쉬의 목소리가 들렸어.”
“제 목소리가... 들렸다고요? 함정... 저 악몽에 빠져있을 때 말입니까?”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밀레시안이 답하자, 그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렇군요. 제 목소리가 들리다니... 그게 밀레시안 님을 악몽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된 거라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검 윗부분이 다시금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과거에서 오는 익숙한 신호였다. 톨비쉬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고, 밀레시안이 이내 정신을 집중해 초대 단장과의 교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