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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짧은 기억
게시물ID : travel_264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군바리230
추천 : 1
조회수 : 78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3/04 23: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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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제주를 1년에 5~6번 정도 씩 찾다 보니 여행지에서의 여러 추억이 켜켜이 쌓였다. 
 
그 내용이라 해봤자 게스트 하우스 파티에서 이사람 저사람과 정말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3~4시간 뒤에 거나하게 취해 침대에 쓰러진 기억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이 기억들은 불쑥 불쑥 튀어나와 날 곤란케 한다. 퇴근 후에 불꺼진 작은 방에 찬기에 황급히 온풍기에 전원을 켤때, 씻고 나와 작은 냉장고에서 12캔에 만원 주고 산 캔맥주를 꺼낼때, TV를 켜고 나혼자 산다 재방송을 볼때가 그러하다.  
 
그때마다 적막하게 날 감싼 외로움들에 몸서리가 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짐싸들고 제주로 날아가, 저마다 관계없이 모인 사람들속에서 한라산 한잔 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오늘도 불쑥 찾아온 짧은 추억속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그녀를 처음 본건 늦여름 쯤, 적막한 남원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의 저녁 식사 자리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가녀린 어깨가 더욱 부각되는 얇디얇은 검정 면티, 짧은 숏펜츠를 입었던 그녀는 앞에 놓인 계란 덮밥 사진을 찍기 바빴다. 
 
수차례 사진을 찍고 난 후 첫술을 뜬 그녀는 마스터에게 연신 맛있다며 엄지를 치켰다.
 
솔직히 나에게는 간이 맞지 않는 그럭저럭 먹을만한 덮밥이었지만 그녀는 천성이 착한건지 배려심이 많은건지 연신 칭찬하였다.
 
마스터는 그녀의 칭찬에 다음 요리를 서둘러 준비했다.
 
소소한 이야기가 흘렀다.
 
그녀는 전기업체의 중직에 있는 듯 했다.
 
입사 8년차라고 밝힌 그녀는 독립이 꿈이라고 연신 말하였다.
 
그런 그녀를 아버지는 놓아주지 않고 통금시간까지 정해 엄하게 관리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소 무겁게 흘러 갔다.
 
마스터와 스텝은 자리를 피해주었고 나는 온전히 그녀의 공간안에 놓였다.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이마에는 4cm 정도의 얇은 선으로 이어진 상처가 있었고, 눈망울이 의외로 크다는것,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아랫입술이 매말라 갈라져 있었고, 단발 머리를 좌우로 훔칠 때마다 드러나는 이마가 넓고 매력적인 얼굴형이었다는것 등의 세세한 것들을 말이다.
 
그녀는 장녀였다.
 
밑으로는 남동생이 있다고 했다.
 
집안은 꽤나 유복한 듯 하고, 그녀는 부족함 없이 자란 듯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눈망물엔 촉촉히 눈물이 차올랐다.
 
장난스레 말하던 독립의 동기가 들어났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명분 속에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7남매 중 넷째였지만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모시기에 열중하였고, 자연스레 그녀에게까지 그 짐을 떠넘기려 하였다.
 
30살이 넘어가는 삶 속에 그녀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며 서글퍼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당연한 듯 효를 강요하고 가족에 대한 도리라며, 그녀가 품고 있던 의구심을 틀어 막았다고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반항심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끝내는 자신의 도덕성과 윤리관이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책한듯 했다.
 
가련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제주도로 홀로 떠나온 그녀, 부모님은 아직도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생각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소리치고 있었다.
 
자신은 어리지 않다고, 홀로 여행도 가고, 운전도 하고, 스스로 결정할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고 말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난 어느덧 한라산 한병을 비웠고, 그녀는 450ml 캔맥주를 두캔째 마시고 있었다.
 
볼은 붉게 상기 되었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나는 왠지 그런 그녀에게 몰입되어 갔다.
 
음, 애정이 아닌 동질감 때문이라고 하자.
 
나 또한 장남으로서 어릴적부터 여러 책임감들을 어깨에 달고 살았고, 그 때문에 중등교육을 마치고 주말이면 공사판을 전전했으니 말이다.
 
결국 그짐은 성인이 되어서도 족쇄가 되어 날 옥죄었다.
 
내 모습이 그녀에게 오버랩 된다.
 
그녀는 가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묵묵히 그녀가 쏟아내는 숨을 들이 마셨다.
 
아마도 카타르시스 일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퍼올린 묵은 한숨을 쏟아냈다.
 
시간은 흘러 10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심야 식당 종료시간이 찾아왔다.
 
달아오른 이야기가 쉽게 끝이 났다. 
 
그녀는 아쉬운 기색 없이 나에게 잘자란 인사를 남겼다.
 
나 또한 그녀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응했다.
 
아마도 그 짧았던 3시간으로 인해 한동안은 그녀가 웃으며 지낼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만의 속단이지만 말이다.
 
인간은 참 불 완전한 존재이다.
 
서로가 불 완전 하면서도 완전해지기를 바라며 그 기대를 나에게, 남에게 투영한다.
 
거기서 발생하는 갈등은 때론 자신이, 때론 다른이가 , 때론 모두가 감당하고 극복해야 한다.
 
아마도 그녀는 그 갈등을 온전히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려나, 그 때문에 곪아버린 속내를 꾹꾹 참다 아무런 연관없는 나에게 쏟아낸것이지 않을까.
 
웃기게도 그 감정, 그 한숨들이 전이되어 날 감쌋다.
 
두병째인 한라산의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술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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