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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일본 체류기
게시물ID : emigration_1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술취한멍멍이
추천 : 7
조회수 : 67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8/05 13:59:17

인터넷을 하다보면 한국을 비하하는 글이 많이 보인다.

반면 선진국을 찬양하다시피 하며 가길 원하고 갈망하는 글이 자주 보인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중 한명...이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어릴때부터 나는 별로 꿈이 없는 축이었다.

평범하게 자라서 평범하게 취직해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사는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도 조촐하게 치르고 돈도 평범하게 벌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하게 사는것 자체가 쉬운일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도피를 꿈꿨던것 같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졸업논문을 쓰면서 나는 일본워킹홀리데이를 알아보았다.

당시에는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게 쉬운일만은 아니엇다.

지금보다 워킹비자 발급수도 적었고 지원자는 많았으며 엔화도 세서 돈도 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나는 졸업논문을 쓰고 학기가 끝나는대로 일본으로 출국하기 위해서 워킹홀리데이 수속을 전문적으로 수속해주는 회사에

돈 150만원 가량을 내고 부탁을 넣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돈낭비에 불과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수속과정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워킹을 떠나려는 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는 효과는 있었다. 워킹을 떠나려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희망은 빵처럼 부풀어 올랐고 일본으로의 출국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리고 출국. 처음타는 비행기에 올라 일본으로 가서 또 차로 나가노까지 갓다.

시즌제로 운영하는 스키 리조트 호텔이었는데 나가노 올림픽이 열린 바로 그곳이었다.

다행히 호텔의 직원인 일본인들은 상냥한 편이었고 그곳에서 다소 편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일의 내용은 힘들기 짝이 없었다.

아침 4시반에 일어나 450명분의 식사를 차리고 또 먹이고 나면 정리하고, 점심을 차리고 또 정리하고 저녁을 차리고 또 정리하고..

심야에는 선생님들의 술자리를 차리고

사람들이 나가면 하우스 키퍼의 일까지 하느라 허리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잠자는 시간외에는 일을 한지 2주가 지나니 두 여자애가 왔다.

대학생인 그녀들은 대구 근처의 모 외국어대학교 1학년 생들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나의 눈에 그녀들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수가 없었다.

그러나 쉴틈도 말할틈도 없이 우리는 일에 투입되어 정신없이 일을 해야했다.

빨리 일을 하지 않으면 밥먹을 틈도없이 말이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거기 호텔의 주방에서 같이 일하는 분들 대부분이 50대 70대 나이드신분들인지라

'저런분들도 하는데!' 라는 생각에 계속 했던것 같다.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면서 눈을 쓸면서 청소를 하면서

'아..아버지는 이런 일을 수십년간 해오신건가' 하고 존경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3주쯤 지났을때 호텔 지배인이 봉투를 건내주었다.


"월급이야."


갈색 봉투에는 카타카나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열어보니 타임시프트와 영수증 그리고 엔화가 두둑하게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뿌듯함이 가슴속을 가득메웠다.


'아.. 이런 재미도 있구나.'


월급봉투를 들고 어디에 돈을 보관할지 고민하다가 산속 깊은곳임에도 불구하고 우체국이 근처에 있다는걸 듣고 처음으로 일본에서 내이름으로된 통장을 개설했다.

내 이름에 쓰이는 한자중 하나가 아무리 찾아도 일본 사전에는 없어서 결국 카타카나로 이름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는 20만엔이 넘는 돈을 받았는데 환율이 100엔당 1400원이 넘었으니 굉장한 거금이었다.

산이라서 쓸곳도 없기에 그대로 통장에 넣고 다시 일을 하는데 외국어대학교에서 실습 차원에서 나온 두 여학생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일인가해서 물어보니 겨우 2만엔밖에 못받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외국어 대학교에서 두 여학생을 여기보낼때 실습 교육비라는 명목으로 월급중 2만엔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비행기값,기숙사비,교육비등으로 가져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비행기값이래 봐야 2만엔이 될까말까였고

기숙사비는 0엔이었다. 직원이니 애초에 일하러 오는 사람에게 방을 공짜로 주기 때문에...

식비도 물론 공짜.

비행기값과 공항에서 여기까지 태워주는것 외에는 돈들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데

그 대학에서는 2만엔만 남겨두고 학생들의 월급을 전부 실습이란 명목하에 뜯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두 여학생은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다른사람들도 다 똑같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20만엔 넘게 받아가는걸 보고 그제서야 상황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도 마음이 안좋앗다...

그 이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스키 시즌이 끝나가자 손님이 확 줄어들어 쉴시간이 늘어났다.

학교단체였던 손님들도 이제 개인으로 바뀌어 450석이던 예약자리도 75석으로 줄어 일도 수월해졌다.

우리는 스태프였기에 스키장과 리프트를 무료로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었다.

스태프 카드한장만 있으면 말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스키장에 와보겠어'

라는 생각에 나는 틈만 생기면 밖으로 나와 스노우보드를 탔다. 처음 타는거라 2미터도 못가고 고꾸라지고 했지만 계속 타다보니 자전거를 배우듯이

점점 능숙해져서 2달이 지날쯔음에는 제법 능숙하게 산을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일본인 파견직원과도 제법 친해져서 그의 차를 타고 산아래 세상에 다녀올 일도 많아졌다.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까지 차로 40분이 걸렸는데, 우리는 갈때마다 졸라서 차를타고 같이 내려갔다.

마을에 들어가면 그때서야 한국과는 다른 풍경에 '아~ 우리가 일본에 있긴 하구나' 하며 좋아 했었다.

이온이나 마츠야등에 가서 산에 있을때 먹고싶었던 물건과 보고싶었던 만화책, 마시고 싶은 술을 사서 차에 한가득 실어 돌아올때는

마치 성공적인 약탈을 마치고 보물을 한가득 배에 싣고오는 바이킹이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두 여학생은 종종 씁쓸한 표정을 내비치곤 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처음에는 그런 빛을 많이 내비치지 않던 그녀들이었지만 한달이 지나자 일본 풍경에도 실증이 났는지 그렇게 나가자고 하던 초기와는 달리

방에 꽁꽁 박혀서 밖으로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게 되더니

결국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일하는 시간외에는 방에서 네이버 웹툰과 미드를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호텔을 떠났다.

서로 짧은시간동안 정이 얼마나 들었는지 배웅을 하며 펑펑 울고 난리가 났었고

그 애들이 떠나고 나니 호텔이 확 조용해진 느낌이 들어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항상 놀러 가던 윗층으로 가도 방에는 그녀들이 쓰던 샴푸냄새만 남아있을뿐 텅비어 있었기에 마음이 참으로 공허했다.


"정직원으로 계속 일해보지 않을래?"


운이 좋게도 내 일본어 실력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지 나는 내가 일본인들과 잘 지냈다.

본관에서 일하고 있는 탓인지 본관보다는 별관 직원들에게 맘편히 이야기를 하고 놀곤했는데 별안간 별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이야기가 들어왓다.

시골이고 일이 힘든 산속 스키리조트 호텔에서 남아 일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나이많은 분들만 남아 일하고 있고..

그래서 나같은 녀석에게도 그런 제안이 들어왔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정이 빨리드는 나에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게 빠른 이곳은 지내기 힘든곳이었다.

그리고 기대감과 희망으로 가득찬 얼굴로 왔던 이들이 곧 속았다는 얼굴을 하며 다른사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는것도 싫었다.

스키 리조트 단지였기에 주위에는 많은 수의 호텔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호텔이 한국인 직원을 한두명씩 썼는데

대부분 사정이 비슷했다.

시급으로 일해서 일이 많으면 23만엔까지도 월급이 올라가는데 계약은 18만엔으로 해서 18만엔 이외에는 모두 떼어간다든지 그런 수법으로

다들 적게든 많게든 돈을 떼이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이였지만 그래도 그런식으로 돈을 떼이는 일은 없었다.

"여기오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18만엔 벌수 있대서 왔는데..."

성이 김이었던 다른호텔의 누나는 우리가 너무 할일이 없어서 다른호텔에 놀러갔다가 만나게 된 누나였다.

직원중 한국인이 혼자여서 너무나 외로웠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혹시 한국분이세요?" 라며 먼저 말을 걸왔고 후에는 밤마다 우리 숙소로 와서 술을 까곤 했다.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유쾌하게 농담을 던지고 웃었지만

그리고 끝은 항상 눈물을 보였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결국 봄이 왔다.

눈이 녹고 초록색 풀들이 눈사이로 비치는것을 보며

"아..내가 여기서 버텨냈구나" 하는 생각을 매일 했다.

얼어있던 호텔 곳곳에서도 습기냄새가 느껴져왔다.

김 누나는 일이 없어지자 그 호텔의 지배인에게 부탁하여 곧장 도쿄로 떠났다.

우리에게는 아무말도 안하고 갈정도로 바삐 떠나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놀러갔던 우리는 누나가 벌써 갔다는 사실에 다소 실망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와야했다.

오랫동안 같이 친구로 지냈는데 누나가 그렇게 떠나버릴줄은 몰랐기에 우리는 충격이 컸었다.

'여자들은 정이 쉽게 들지만 또 정을 쉽게 떼는구나..'

하고 섭섭함이 컸던것 같다.

2~3시간 짬이 날때마다 주위 호텔을 돌며 한국인 찾기를 했던 우리는 그때쯤

도쿄로 떠날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주로 하여 자그마한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간단한 메일을 주고 받으며 도쿄에서의 생활을 꿈꾸고 정보를 나누는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사람들도 외로움때문에 곧잘 친해지곤했다.

외로움의 무서움도 군대 이상이었기에 사람이 살아가는데에 있어서는 정신적인 요소가 참으로 중요하구나 하고 그때 많이 느꼈었다.

종종 한국으로 돌아간 여학생들로부터 메세지도 오곤 했지만 금방 연락이 끊겼다.

이제 1학년인 그애들과 도쿄로 떠나는 대학졸업자인 나 사이에는 한국과 일본만큼의 거리보다 더 큰 거리가 존재했고

그녀들이 떠난 후에 그 거리는 더 멀어지기만 하여 어쩔 수 없엇다.

이윽고 산을 떠나는 날이 왔을때, 같이 일하던 할머니들이 나를 꼬옥 안아주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할머니들과 같이 근처 호텔에 가서 라면도 먹고 했던 나이기에

나도 그만 눈물 콧물을 흘리며 버스에 올라야했다.

154센티정도의 작은 체구의 할머니들이 보여준 일에 대한 프로페셔널 정신은 존경심이 일어날 정도였다.

키 170의 20살 여대생도 못버텨 하는걸 그 작은 체구의 할머니들은 매일매일 거뜬히 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심지어 연로하시기까지한데 얼마나 힘드실까 라고 생각하며 나도 힘을 내곤했었다.

이 할머니들에게 질수는 없어! 라며.

그랬던 분들과 헤어지니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리고 도쿄로 떠났고



우습게도 여름에 나는 이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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