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작정 반대를 누르기 전에 이 글이 뭔지 읽고 옵시다, 개념있는 사람은 리플로 말합니다, 원래는 헬레니즘의 국가들을 다루려 했으나 다른 분께서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다른 글을 올려봅니다 기존에 연재라는 미명하에 올리던 비 인기글 항공열전은, 밀리터리와 역사를 구분치 못한다는 댓글에 따라 잠시 보류 중에 있습니다. ========================================================================================================
청동기시대 미케네인들의 전투 주력은 바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게 부족의 족장이거나 도시의 왕등의 귀족 계층이었는데, '일리아드'에서는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미르미도네스 부족의 족장인 아킬레우스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청동으로 된 두꺼운 갑옷을 입었으며, 깃털장식을 한 장식을 한 투구를 썼는데, 투구는 특이하게도 상아나 뼛조각을 마치 비늘갑옷처럼 붙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일리아드'에서 아약스는 맷돼지 이빨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가 쓰던 투구도 아래의 것과 같을것입니다.
미케네 시대 그리스의 갑옷과 투구의 모습, 특이하게도 판금갑옷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정강이 받이까지 하면 굉장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전사를 재현한 리인액터의 사진인데 '일리아드'의 영웅들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싼 갑옷은 귀족전사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우선 무구의 가격이 매우 비쌌을뿐더러, 왕정과 농경, 부족사회라는 당시의 사회질서속에서 평민이 입신양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만 해도 중장보병의 장비를 다 합치면 소9마리의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소 한마리가 약 500만원 정도이니, 4500만원 돈은 들었을테지요. 이러한 탓인지 트로이 전쟁당시 그리스의 영웅들은 서로 전리품을 가지고 '누가 차지할 거인가?'를 두고 다툽니다. '일리아드'에는 아킬레스가 노획한 트로이의 여사제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빼았아 가는 바람에 그와 아가멤논 사이에 갈등이 생겼음을 언급하는데,
전리품 획득이 유일한 상업활동(?)이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확실한 부를 보장하는 전리품은 분명히 귀족들과 전사들만이 독점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질서는 미케네가 몰락하고, 암흑시대 이후 그리스인들이 에게해 도서지방과 소아시아, 시칠리아 등지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깨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식민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αποικία (아삐키아)는 전치사 απο (~로부터)와, οίκος (집)의 합성오로 '본국을 떠나 어디론가 정착하기 위한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Colony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지요. BC 8세기경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엄청나게 증가한 인구때문에 사회가 혼란하게 변합니다. 또한 그리스 특유의 척박한 지형이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기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살 땅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이후 폴리스들은 에게해의 섬과 소아시아, 시칠리아 일대로 나가 거주하기 시작하고, 본국과 식민지간 물자교역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내륙에 면해있던 스파르타인들은 식민지 개척을 포기하는 대신 이웃 폴리스인 라코니아를 공격해 합병해 그들을 농노화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문제를 해결합니다. ) 상업활동은 곧 이집트와 페니키아 등 주변 국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BC 7세기경에는 드디어 소아시아 지방에서 은화가 발행되어 기존의 화폐인 소를 대체해 통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는 점차 전투에 참전하는 시민들의 무장수준을 높이게 됩니다. 이렇게해서 BC 5세기경에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이윽고 전장의 왕인 귀족기사을 밀어버리고 전장에서 주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귀족들보다 더 잘싸웠으므로 그들은 점차 전리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높아진 시민들의 지위는 이후 귀족정이 폐지되는 계기가 됩니다.
추가로 몇가지를 적어보자면 이것은 BC 5세기경 중장보병의 모습입니다. 죄다 그리스어로 쓰여있는데, 방패문양으로 봐서는 스파르타인을 그린것 같습니다. 호플리테스는 대체로 화려한 말갈기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썼으며 (물론 빈부차이에 따라 장식의 모양과 크기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시민들은 장식없는 투구를 쓰는것으로 만족하기도 합니다.) 흉갑과 정강이받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호플리테스라는 이름은 그가 들고 있는 방패 호플론(οπλων)에서 유래되었는데, 지름이 약 90~100cm쯤 되는 큰 방패입니다. 주무기로는 250cm 내외의 창을 사용했으며, 이외에 단검이나 팔카타, 코피스라는 이름의 곡도를 가지고 있어서 근접전에서 활용했습니다. 방패는 대체로 나무판으로 만들었지만, 그 위에 납이나 청동을 입혀 강화한 것도 사용했습니다. 아마 만드는데 상기에 언급을 하였지만 시장의 개편이후로도 돈이 장난아니게 많이 들었을 겁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 호플리테스를 재현한 모습과 그가 입은 갑옷입니다, 이시대에는 보병도 무거운 청동갑옷을 벗어버리고, 린넨천과 가죽, 얇은 청동판을 덧대 만든 갑옷을 착용했습니다. 어차피 들고있는 방패로 웬만한 공격은 다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청동갑옷이 필요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호플리테스는 기본적으로 '팔랑크스' (φαλανξ) 라고 부르는 밀집대형을 이루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이렇게되면 큰 방패가 옆사람의 오른손을 보호해 줄 수 있었고, 방패를 들고 마치 오늘날 전경들처럼 적들을 밀쳐내며 몸싸움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패가 매우 튼튼하고 두꺼웠기 때문에, 화살을 쏴도 돌을 던져도 별로 큰 타격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또한 팔랑크스를 지휘하는 지휘관 또한 같은 대형을 이루고 병사들과 더불어 싸웠기 때문에 지휘부와 병사들간에 돈독한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볼때 '유익한(?)전술' 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방진대열이 깨지게 되면, 대부분의 고대전투가 그러하지만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경제 활동(?)이 시작됩니다. 몸싸움에서 이긴 쪽은 별 힘 안쓰고 도망가는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