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그냥.. 오빠 생각하다 보니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빠는 안 듣고 싶을 수도 있지만.. 뭐 나 찌질하고 이기적인 거 이미 오빤 아니까~~~~
갑자기 웬 존댓말이냐 싶죠...? 이제 뭐 더 애틋해지고 그런거죠 뭐...
연락 안 하다 보니 어색해진 뭐 그런 걸수도 있고 뭐 ..... ㅋㅋㅋ암튼 !
오빠가 그 날 연락한 거 실수인 것 같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실수 아니었어요.
나는 오빠랑 그렇게 연락 끊기고 나서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 하나도 없는 거 보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의심들이 늘더라고요.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내가 보낸 문자들 보면서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고작 몇주 인연에 그러는 거 구차하다고 우습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느낀 오빠 눈빛 표정 말들 다 거짓이었을까, 나 혼자 착각했던 걸까 그런 것들이요.
오빠가 28일 밤에 연락했잖아요. 그 날 하루종일 비 많이 왔던 거 기억나요? 나는 기억해요, 그 날 하루. 그것도 엄청 생생하게.
나 그 날도 덜 슬프려고 엄청 애썼거든요. 나 우울하면 집 앞에 안 가고 멀리 있는 카페 가는 거 알죠? 아침부터 단장하고 지하철 타구 혼자 카페 가서 비 보면서 앉아 있다가 영화 하나를 예매했어요. 그거 바로 이틀 전에 본 영화였는데 그냥, 그냥 또 보고 싶어져서.
이것도 안 궁금하겠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영화인데요. 그거 보는 내내 오빠 생각했어요. 아니 보고 난 후에 더욱 더요. 오빠랑 같이 보고나서 오빠는 어떻게 느꼈는지 이야기 들었으면 좋았겠다고 엄청 많이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튼.. 그렇게 혼자 영화 보고 나와서 비오는 거릴 걸었거든요. 나 걸음 되게 빠른데, 그 날은 진짜 천천히 걸었어요. 내가 기억할 마지막 송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아쉬워서 천천히 꾹꾹 담고 싶더라고요.
내일이면 떠나니까, 모든 기억은 다 두고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오빠 생각을 엄청 하면서 걷는데 문득, 내가 오빠를 좋아한 것도 내 착각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까 진짜로 그런 것 같은 거예요. 오빠가 말한 거 있잖아요, 스쳐 지나는 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라고. 그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면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그래 그건 착각이었구나, 정말로 스치는 순간의 감정이었구나. 그런데 그게 뭐라고 나는 그렇게 며칠을 정신 못 차리고 오빠도 나도 다 힘들게 했을까 싶고.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지는 거 있죠? 그렇게 열흘 만에 처음으로 오빠 생각 하면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걷는 내내 생각한 게 오빠가 전부인 걸 보면, 두고 오고 싶었던 건 사실 ‘오빠에 대한’ 모든 기억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왔는데, 진짜 말도 안 되게 오빠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어쩜 또 그런 날 그런 타이밍에 연락하는지 ~~~ 폰 화면에 오빠 이름 딱 뜨는데, 진짜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더니 쿵쿵대고 온몸에 열이 확 도는 거 있죠. 오바한 거 아니에요 ㅋㅋㅋ 진짜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서 그대로 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바보 같아요. 1분 넘게 생각한 대답이 '뭐야?'라니ㅋㅋㅋ 너무 이상했죠 그거..! 지금 보면 전부 다 바보 같은 말만 했어, 의미 없는 말들. 열흘 동안이나 하루 온종일 오빠 생각만 했는데 나오는 말이라곤 그런 것들뿐이었다니. 그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그걸 그렇게 날려버렸어 나는.. 흑.. 그리구 어차피 또 눈 뜨면 사라지겠지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갑자기 잠들 줄이야ㅠㅠ
그렇게 답 없길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오빠랑 나눈 대화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거든요.
근데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내가 오빠를 좋아했다는 것도 전부 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서요. 몇 마디 안 했는데도 그냥 느껴졌어요 그렇게. 나 진짜진짜 너무 좋은 사람 만났는데 좋아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친구들한테 말했거든요. 친구들은 그런 사람이 뭐가 좋은 사람이냐고 했는데 난 계속 우겼어요, 진짜 좋은 사람 맞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는데 혹시나 사실은 아니었을까봐 겁이 났던 것 같아요. 근데 오빠도 마음 아프다고 말해줘서, 그래서 고마웠어요. 나만 마음 아픈 줄 알았거든요.
제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낸 문자랑 글 쓴 것 보고 비웃지 않았다는 거.
나 그렇게 구차하게 굴었는데도 찌질하지 않다고 여전히 말해준다는 거.
그래서 또 좋았어요 오빠가.
그 날도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건 똑같은데, 그래도 정말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날 이후로 나 엄청 괜찮아졌어요.
아니 똑같이 힘들었지만, 좀 기쁘게 힘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웃긴 표현인가?ㅎㅎ
평생 오빠 연락 다시는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 그렇게 말도 안 되게 흐트러져줘서 고마워요 진짜로요. 마지막 날 밤에 그렇게 떨레는 선물 받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네요, 오빠 말고 술한테요ㅎㅎㅎ
오빠 그 날 연락한 거 실수 아니었다고 그 한 마디 하려던 건데, 글이 이렇게나 길어져버렸어요 또...
역시 설명충 구구절절충 어디 안 갔어 ~~~~
오빠, 잘 지내고 있죠?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냥 혹시 궁금해 할지도 모르니까 말해줘봤어요. 나는 엄청 궁금하거든요, 전부 다.
오빠는 여전히 알고 싶은 사람이에요. 갈수록 더 많이 궁금해져요 오빠는.
연락도 안 하는데 궁금한 게 점점 더 늘어나요, 신기하게.
오늘밤은 유난히 오빠가 생각나서요.
매일 밤낮 안 가리고 생각나지만 오늘은 유독 더 생각나서요. 그래서 글 남겨요.
오빠 마음 불편하게 한 건 아니면 좋겠는데...
가끔 이렇게 너무너무 생각나서 참을 수 없을 때 한 번 씩 글 써도 돼요? 답 없으면 되는 걸로 알게요!
참, 다음 달에 오빠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 보내는 것도 허락해줘요. 이것도 답 없으면 되는 걸로 알게요~~~
생일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뭐~~~ 언제든 축하하면 됐지 뭐~~~~
아 그리고 나 3월 마지막 주에 인천 갈 일 있는데 그 땐 밥 안 사주겠죠?
오빠가 ‘시간 지나고 지나고’라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지나야 하는지 모르겠어ㅠㅠ휴..
아무튼 그렇다고요~~~ 가기 전날 또 문자 해볼게요 ㅎㅎㅎ헿
오늘도 어떻게 끝내야할지 너무 어렵네
이쁜 꿈 꾸어요 오빠! 나도 그럴게요 :)
읽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