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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남자버전.txt
게시물ID : sisa_10341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루마지키
추천 : 52/8
조회수 : 6368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8/03/21 19: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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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79년생 정대현(82년생 김지영의 남편)

82년생 김지영처럼, 한국에서 남자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과 피해를, 79년생 정대현이란 사람의 인생에 전부 때려 박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백일 때

정대현씨도 여느 남자 아이들처럼 고추를 활짝 드러내놓고 백일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다 그렇게 했다. 나중에 커서 사진관 앞을 지나가는데 정대현씨 백일 사진이 아직도 걸려있었다. 주위에 있던 여자 둘이 '아기 고추가 참 앙증맞다'며 킥킥댔다. 정대현씨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등학교 때,

정대현씨는 짝궁이 먼저 시비를 걸어 같이 싸운 것뿐이었다. 그런데, 여교사는 같은 여자라고 짝궁 편만 들었다. 남교사 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인 니가 참아야지." 하며 여자 아이 편을 들었다. 

'여자지만 힘은 쟤가 더 세단 말이에요.' 외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정대현씨를 비롯한 남학생들은 삭발에 가까운 스포츠머리를 강요받았다. 여학생들은 어깨까지 기를 수 있는데. 뭔가 불공평 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따졌다가는 귀싸대기 맞을 것 같아서 참았다.


고등학교 때,

시험에서 틀린 개수대로 당구채로 손바닥을 맞았다. 여학생들은 얇은 앞부분으로, 남학생들은 두꺼운 손잡이 부분으로 맞았다. 정대현씨는 얼얼해진 손바닥을 호호 불며 여학생들을 부러워했다.


대학교 때, 

여름에 교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는 남학생들은 땡볕이 쏟아지는 실외에서, 여학생들은 에어콘 바람을 쐴 수 있는 실내에서 일하게 했다. 차별이라고 생각한 정대현씨는 학교에 항의했지만 "남자가 돼가지고 왜 그렇게 쪼잔하냐."는 답만 돌아왔다. 


군복무 때,

동기 여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청춘의 달콤함을 맛볼 때, 정대현씨는 군대에서 인생의 쓴맛 더러운 맛을 모두 봤다. 처음으로 남자로 태어난 게 후회됐다. 정대현씨는 유격 훈련받다 허리를 삐끗해 의가사 제대했다. 허리디스크는 정대현씨의 평생 동반자가 됐다.


취준생 때

정대현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하기로 했다. 군복무 후유증으로 머리가 굳어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들었다. 여성단체의 로비로 군가산점이 폐지됐다는 거였다. 같은 스터디 여학생들은 "당연하지"하며 환호했다. 정대현씨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니네 돌머리야. 26개월 동안 그깟 가산점을 못 넘어'

정대현씨는 결국 0.1점차로 낙방했다. 군가산점만 있었다면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대현씨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회사 다닐 때

정대현씨 직장에서 고된 일은 전부 남직원 몫이었다. 여직원들은 숙직도 안 하고 짐도 안 날랐다. 오지 근무도 남직원들이 독박 썼다. 정대현씨도 여직원 차례에 대신 오지 근무를 갔다. 여직원은 오지 발령내면 퇴사해서 어쩔 수 없다는 부장님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연애할 때

똑같이 돈 버는데 데이트 비용은 거의 정대현씨가 지불했다. 여자친구는 "나는 꾸미는데 돈이 많이 들잖아.거기서 이미 데이트 비용이 지급되고 있는 거야"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기가막혀 이별을 통보했다. 며칠 후 정대현씨는 강간으로 고소 당했다. 간신히 혐의를 벗긴 했는데 이미 직장에서는 퇴사 조치 된 후였다.



TV를 볼 때

정대현씨는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180cm 이하 남자는 루저라는 여대생의 말에 피눈물을 흘렸다. 169cm인데 반올림해서 170cm로 퉁치고 다녔던 정대현씨에게 작은 키는 지독한 컴플렉스였다. 그 방송 이후 한동안 거리를 지나가는 게 공포였다. 이름 모를 저 여자들도 속으로 나를 루저라고 비웃는 건 아닌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결혼 이후

결혼 비용을 정대현씨는 1억, 김지영씨는 2천만원 부담했다. 생활비도 정대현씨가 독박벌이해서 다 댔다. 불만은 없었다. 나는 남자니까 가장이니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근데, 김지영씨는 집에서 놀면서 명절날 하루 전 부치는 것도 부당하다고 징징거렸다. 아내가 야속했지만 정대현씨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내색하지 않았다.



지하철 탈 때

정대현씨는 주말도 쉬지 못 하고 계속되는 야근에 몸이 파김치다. 퇴근길에 지하철 탔는데 빈자리가 하나 보였다.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망설이다가 눈 질끈 감고 앉았다. 임산부가 오면 양보하면 되는 거지.

다음날 정대현씨 전화에 불이 났다. 워마드에 '임산부 전용석에 앉은 한남'이란 제목으로 정대현씨 사진이 올라갔다고 지인들이 링크를 보내줬다. 실시간 포털 뉴스에도 떴다고 한다. 하늘이 노래졌다.



미투 시국 때

정대현씨는 미투 시국에 강간 무고를 당했던 과거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여직원들과는 가급적 대면을 피했고, 불가피할 경우엔 카톡과 문자로 지시했다. 취재원 관계로 통화를 하던 여기자의 식사 제안도 '혹시 모를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싶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그 여기자는 '펜스룰도 성폭력이다'는 기사로 정대현씨를 저격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정대현씨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로 사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 후

정대현씨가 퇴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영씨가 이혼을 요구했다. 정대현씨가 가정에 소홀했다며 그동안 많이 참고 살았다고 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김지영씨와 딸을 먹여살리려고 매일 밤 12시까지 개처럼 일한 정대현씨는 자기 인생이 부정 당하는 느낌이었다. 

피땀 흘려가며 번 돈과 퇴직금의 절반 이상이 김지영씨한테 갔다. 억울한 정대현씨는 우울증에 걸려 폐인이 됐다. 6개월 뒤 몸에 이상을 느껴 검사했더니 간암 말기였다.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30년 동안 몸을 혹사시킨 결과였다. 3개월 뒤 정대현씨는 죽었다. 재산 반땅하고 연하의 남자와 결혼한 김지영씨는 정대현씨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남성으로 겪는 차별만을 응집시키고, 그에 반해 여성은 남성의 희생으로 편익만 누리는 존재로 묘사하는 소설이 출판된다면, 

남성인권의 성서로 추앙받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의 패턴으로 보면, 언론에 의해 '여혐소설' '일베소설'로 낙인 찍히고, 페미들의 불매 운동을 얻어맞고 절판 들어갈 것 같은데요.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읽고 각성했다고 말하면 좀 이상한 놈 취급받구요.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전사회적인 지지와 광풍이 참 아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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