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가 완결 되고 나면 쓸까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문장 하나가 내내 마음에 걸려 모자라는 필력에도 잔망스럽게 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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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훈"은 나이 마흔을 넘긴 대기업 부장으로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나이 마흔은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인 나이이기도 합니다. 불혹(不惑)이라고들 하지요. 그 의미는 말그대로 쉽사리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나이로 세상의 풍파를 겪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선택이 현명해지는 시기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자신이 겪어왔던 경험이 전부는 아니라는 듯 세상은 언제나 보란듯이 나 자신을 집어삼킬 위험과 위협을 쏟아냅니다. 2-30대에 좌충우돌하던 시기를 벗어나 이제야 겨우 나만의 길(혹은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 어쩌면 이대로 온전하고 안전하게 조심스럽게만 산다면 큰 무리 없이 갈 것 같은데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불혹이라는 나이가 거추장스럽고 이제는 용기마져 없어져버린 것은 아닌지 자신을 잃어만 갑니다.
"이지안"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입니다. 흔한 사람들이라면 한참 학교 캠퍼스의 낭만을 뒤쫒거나 자신만의 꿈으로 가득찰 시기에 자신의 유일한 가족을 괴롭히던 사채업자를 살해한 죄로 중학교도 중퇴한 채 그대로 세상에 내던졌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회적 약자. 가족도 학벌도 없으며 심지어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는 온전치 못한 몸이고 사채빚 이자의 멍에를 온전히 짊어진 채 내던져졌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이 왜 버텨야 하는지 동기도 불명확한 채 온갖 사치스러운 삶의 이유따윈 붙일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냥 버팁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버틸 힘이 다하는 순간엔 그저 나 같은 하찮은 존재는 사라져버려도 크게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세상이라는 투의 굳은 얼굴과 차가운 언어로만 살아갑니다.
이야기는 잔인하리만치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이 두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시작지점은 서로 다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너무나 닮아있는 결여성 인간들이 이 두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하나 같이 못났고 바보같으며 찌질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군상들이 우습게도 어깨걸치고 항상 술에 절어 이야기의 빈 곳을 하나 하나 채워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못난 인간군상들이 못난 나와 닮아서 인지 밉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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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훈의 시선은 "연민"입니다. 새삼 흥미로울 것도 없는 세상에 우연한 선택으로 자신의 부서에 파견직으로 들여놓았지만 평소 관심도 없었던 존재가 어느 날 문득 자신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가게되고 시리게 추운 겨울 날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앙상한 발목에 시선이 놓이게 되면서 "지안"에 대한 관심이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다른 내용도 아닌 그저 "저 아이 춥겠다"였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 추운 겨울 날에 복슬하고 따듯한 긴 양말을 신지 않고 저렇게 춥게 있을까. 혹자는 연민이 사전그대로 그저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의미로만 해석하실런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쌍하다는 상대적인 감정은 상대 존재만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이 아닌 내 존재 혹은 내 세상과의 연결점을 가져야만 가능한 감정입니다. "나도 이렇게 추운데 저 아인 더 춥겠다." 라구요.
지안의 시선은 "관계"입니다. 의지할 곳 하나없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 던져진 그녀에게는 삶의 동기가 희박한 만큼 관계도 희박합니다. 관계가 맺어질 틈도 그리고 희박했던 관계마저도 결국 살인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모두 다 제거되고 어쩌면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광일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이, 그 절망적 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을 버티게 만드는 유일한 관계로 읽혔습니다. 그런 절망적 관계만이 유일했던 지안에게 따뜻한 말,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는 동훈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게다가 불순한 의도로 연결되었으나 이제는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려 그 사람의 일상을 엿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은 경험할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관계, 동료라는 관계들을 동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배워갑니다. 그리고 잊고 지내던 감정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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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렇게 시작된 둘의 관계는 단순하게 나이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의 관계가 아닌 시작점이 달라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던 유일한 지점에서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발전해나갑니다. 동훈은 이미 수많은 관계로 얽혀있어 사실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동훈을 대신해 따귀를 날려주고 자신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들을 대신 차갑게 내뱉는 지안에게서 작은 위로를 받습니다. 반대로 지안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조차 의지할 곳이 없어 허덕이는 자신에게 조금씩 힘이 되어주는 존재로 동훈을 들여놓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세상이라는 연민과 관계를 뒤흔들어 놓는 괴물 앞에서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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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를 보고나서 잠자리에 누웠는데 머릿 속에 문득 "괴물은 연민의 얼굴이 없다"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연민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소소한 관심과 공감에서 비롯되는 감정입니다. 거창한 의식과 거대한 단어로 꾸밀 필요조차 없는. 아픈 사람을 보면 나도 아프고 슬픈 사람을 보면 나도 슬픈,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리고 그래서 더 이야기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최근들어 워낙 괴물과 같은 일들(이를테면 세월호와 같은)을 자주 겪다보니 이제는 이런 연민의식도 옅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게다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시스템에 매몰되어 개개인으로서 응당 이해받고 싶은 응어리 조차 숨기며 살아야 한다는 강요아닌 강요를 받는 것 같아 서글펐었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서 받는 소소한 위로는 새삼스럽기까지 합니다.
나의 아저씨 화이팅. 끝까지 좋은 이야기로 지친 우리들을 위로해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