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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시물ID : gomin_17476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QOOTO
추천 : 3
조회수 : 49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4/22 14:28:06
전역하고 학교를 찾아갔다.

내가 놀던 빨간 학생회관은 무너져 있었다.

내가 없던 2년 동안의 시간 같았다.

동기들, 선배들의 소식을 들었다.

졸업, 휴학, 대학원, 취업, 공무원, 취업 준비..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난 이유없이 슬퍼간다.

우리가 꿈꿨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나봤자 서로 한탄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야 만나는 의미가 적지 않나?

그럴 바에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 생각했다.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

거리의 풍경 하나 하나 이유없이 슬프다.

정류장 앞에 엎드려 구걸하는 노인네를 내리깔며 지나갔을 땐,

나도 참 독해졌다고 생각했다.

길거리를 해매어도 온통 장사꾼 뿐이다.

회사원 뿐이다.

돈, 돈, 돈이다.

이런 거리에서 나 혼자 고상한 척, 무심한 척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오늘부터 알바하러 가는 길이니까.

예전에 좋아했던 여인과 했던 말이 생각난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에,

난 어쩐지 그런 말이 저 여자 가슴 한번 만져보고 싶다- 는 말처럼 들린다고 말한 적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싶다.

-

얼마 전 영화를 보고 왔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영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정말 정말 좋아하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만큼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 앞에서 문득 결심한 게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시대를 탓하지 말자-.

어떤 통계를 보아도 최악임에는 틀림없지만,

대공황이니 2차 대전이니 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던 우리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니,

그냥 나는 나답게 즐겁게 살자- 고 생각했다.

내 잘못이 아닌 시대에 네 탓 해봐야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주제도 없이 맥락도 없이 그냥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전역한 지 어언 한달이 다 되어간다.

4월 중으로 적응 완료-! 가 내 목표였으니 이제 슬슬 무엇이든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휴학생 주제에 학교 옆에 자취방을 얻었다.

홀로 된 서울살이 혼자서 해보겠다며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가 끝난 후 무엇이 되었든 학교 도서관에 가 시간을 보낸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뭐 없다.

스물넷 멀쩡한 몸뚱아리 하나,

전역증 하나,

알량한 학생증 하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

군대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소설가, 영화 감독.

좋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는 것은,

내게 그만한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일 저지를 그릇이 못 된다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고백하자면 난 쫄보다.

아무래도 난 창업이니 사업이니 하는 것에 죽어도 적성이 안 맞는 부류의 사람인 듯하다.

고민 끝에 기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쉽지 않다.

같이 알바하던 형이 말했다.

빠릿빠릿하지 않아서 기자는 영 어울리지 않네-.

그 한 마디에 하루종일 기자를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해도 그랬기 때문에..

집에 와보니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책 사이에 주진우 기자의 책이 한 권 섞여있었다.

나꼼수 팬이셨던 아버지가 산 책이다.

가장 앞 장에 진짜 멋있는 놈인 것 같다- 는 아버지의 육필이 적혀있었다.

내가 기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그런 기자가 되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난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

김어준이나 주진우, 체 게바라나 노무현 부류의 인간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내 자취방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한 장 걸려있다.

나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남들이 생각하는 체 게바라와 내가 생각하는 체 게바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체 게바라를 존경한다고 했을 때 남들은 쿠바 해안에 상륙하는 혁명가 체 게바라를 줄곧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포데로사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는 자유인 체 게바라를 떠올린다.

비슷한 느낌으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영하 부류의 인간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다 소설가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루키나 김영하처럼 살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무릎을 말 그대로 탁 쳤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란 것이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그냥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정도만 알아주면 좋겠다.

아무튼 난 그런 부류의 인간을 동경했다.

다만 이 생각의 끝은 항상 내게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 용기를 가지는 일은 작은 내게 너무 어렵다.

-

내 생각보다 삶에는 변수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것이 크게 의미 없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무언가에 묶여있는 상태인 것은 이 탓이 크다.

전역한지 얼마 안되서는 사실 핑계다.

술 좀 먹다보니 사회에는 3일 만에 적응했다.

그리고 이 사회라는 게 좀 만만찮다는 것은 알바하면서 다시 깨닫고 있다.

아무래도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왜 난 이 한 줄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힘들까?

지금은 각목인형 같은 나지만 언제나 물 흐르듯 살고 싶다.

누군가는 내가 아직 어리다고 말한다.

스물넷 난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좀처럼 무언가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회계사 시험을 볼까?

기자를 준비할까?

틈틈이 소설이나 영화 평론도 써야겠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어쨌든 벌써 4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정말 무엇이든 시작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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