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하나. 거짓말 같은 시간
게시물ID : gomin_17484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나영
추천 : 1
조회수 : 3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01 21:51:21
  나는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자아가 형성되고 사춘기를 거쳐 정체감이 어느 정도 형성됐을 무렵부터 소위 대가리가 좀 컸다고 자만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찍이 염세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그런 내게 세상은 온통 부조리로 가득했다. 가깝게는 친구와 가족부터 학교와 사회까지, 시쳇말로 중2병이라는 것이 내게는 한참 늦게 찾아왔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의 철학은 더욱 굳건히 머릿속 깊게 자리 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어릴 때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후엔 내가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알게 되어 미안해하는 것이 죄책감으로 남을까봐서가 살면서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였다. 겉으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금이야 옥이야하는 보살핌과 관심,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남 부러울 것 없게 자랐지만 사실 부러울 게 많았다. 엄마와 여동생까지 우리 다섯 식구는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끼며 살았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가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없었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는 군대로 도망쳤고, 돌아와서는 집으로부터 도망쳤다. 아주 가끔 집에 들어와 하룻밤을 자고 갔던 기억이 손꼽을 정도로,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직접 들은 적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쯤이 되어서야 그 실체와 마주했다.
  수술대에 오른 아빠를 보러 병원에 간 날, 아빠와 같이 살던 여자가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드라마에서 본적이 있는 것만 같은 어색한 표정으로 상투적인 멘트를 했고 난 떳떳하게 받지 않았음에도 패배감과 모멸감이 들었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를 병으로 관절에 쇳조각을 넣고 다니게 된 아빠는 그제서야 두어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찾아와 자식노릇을 했고, 남편과 아빠 행세를 했다. 그 와중에도 꼴에 아빠랍시고 항상 나와 여동생에겐 자신이 실천하지 못한 예와 효를 중시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엄마에게는 욕설과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렇게 그는 그 후로도 십여 년 동안 온갖 거짓말로 돈을 갈취했고 도박으로 쉬이 탕진했다. 나는 어리고 힘이 없었기에 모른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며 상처받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다섯 식구는 그렇게 그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름의 행복을 꾸역꾸역 유지해왔다.
  그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내성적인 성격을 숨기고 싶어서였는지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마음 속 슬픔과는 반대로 유쾌하고 재치 있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다. 나는 그런 나의 모든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가끔씩 드는 괴리감에 괴로움을 느끼곤 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어떤 사회나 조직에 있고 그 구성원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다를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내 자신을 숨겨왔다. 무슨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처럼 내 자신을 소개했지만 사실 단순히 말하면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의 어두운 부분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었던 할아버지는 의외로 사람을 쉽게 믿어 큰돈을 잃거나 사람과 등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할머니는 반사회적일 정도로 사람을 쉽게 믿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가족과 친구의 말과 행동에서도 저의를 의심하거나 왜곡하곤 했다. 그 가운데 엄마만은 누가 봐도 객관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나는 꽤나 유쾌하면서도 부정적인 이중성을 지닌 채 자라왔지만 그런 엄마만큼은 무한히 신뢰할 수 있었다. 내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아빠는 오랜 방황 끝에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끝까지 염치없이 자살을 택했다. 그의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내게 남겨졌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더 이상의 빚과 가족의 상처가 늘어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엄마에게도 비로소 자유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30년을 남편 없이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 둘을 키워내느라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살아온 엄마에게 늦었지만 행복이라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와 여동생의 유일한 바람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을 충분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남겨질 할아버지, 할머니를 우선 생각했다. 스무 살에 시집 와 함께 산 시간이 더 길었던 엄마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부모가 아닌 아버지,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고 나도 나이를 먹는 탓에 점차 무뎌지고 익숙해지며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 9년이 더 흘러 어느 토요일이었다. 시끌벅적한 홍대 거리를 걷고 있던 중 결혼한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가 고모와 함께 중앙대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한 두어 달 전부터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프다고 했다. 처음 동네 병원에서 소화제를 처방받고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고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 건강검진을 하고 초음파와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검사까지 추가로 실시했지만 별다른 이상증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안심한 채 소화제와 진통제,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며 지낸 게 또 한 달이었다. 급기야 엄마는 일을 못 나갈 정도로 앓아 눕는 일이 잦아졌고 참다못해 응급실에 갔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응급실에 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뿐이었지만 그 시끄럽던 홍대 거리에서 갑자기 조용해진 것 마냥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는 별일 아니라고 했다. CT를 찍었는데 검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다고 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 탓이어서가 아니라 정황상 그러했다. 아파서 병원 응급실에 가서 CT까지 찍었는데 별일이 아닐 일이 아닐 거라 확신했다. 한번도 병원 신세를 져보지 못했던 나는 보호자 1명 외엔 면회시간외 면회가 안 된다는 고모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급히 집으로 가 검사 결과만 초조히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모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췌장에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자세한 건 월요일에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랬다. 암이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