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는 신을 인간보다 위에 두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롭지 않은 종교이다 라는 것 입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기독교는 노예의 도덕이란 말로써 그것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를 통해서 반박하려고 합니다.
제가 기독교를 옹호하고 철학을 통해 기독교가 진리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역시 그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 저는 사람들과 저의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기독교는 신이 인간 위에서 '군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 아래에서 절대 행복 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즉, 철저히 정치-사회적 구조의 틀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입장에서는 절대신이 있다면 신의 뜻이 인간의 뜻을 뛰어 넘을 것이고, 또한 그것의 의미는 인간은 신 앞에서 무조건적으로 열등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 입니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 말대로 인간은 주체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서도 구속받기 싫어하며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관점과 제 관점의 차이는 바로 이 "자유" 의 이해가 다르다는 것 입니다. 님에게 자유의 반댓말은 아마 "필연성" 일 것 입니다.
구속하고, 나의 행동을 제약하고 나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필연성".
하지만 저는 자유의 반댓말은 "허물"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행동을 다 할수 있을 것 같지만, 또한
그것이 맞는 것 같지만 (주체성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잘못된 행동인 것 같으면 속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힘을 느낍니다.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 부르는 그것이지요.
즉 무언가가 이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미 그런 느낌이 든 이상 이사람에게 의지를 제약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허물" 입니다. 이 사람이 자유를 추구하고 싶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을 없는 것으로 여기며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디어 진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느낌 상으로는 더이상 허물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성적으로 그러한 느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이상,
이 사람에게는 진짜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라 느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상 자유가 아닐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허물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찾아 들어가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물의 느낌을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허물은 어떻게 나에게 온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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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죄를 뉘우쳐 죄책감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따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성급한 결론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허물로 부터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일단
그것이 나에게 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허물의
느낌은 사라져 가고, 그것이 괜찮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허물을 자유의 장애물로 여기기
때문에, 성급하게 그것을 무뎌지게 만들어 버리고, 그런 무뎌진 상태는 왜곡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내리는 결론은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허물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을 학문적으로 파악한다는 뜻- 예를 들어 심리학이나 생리학적으로-이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허물이 있는 상태를 자각한 상태에서 허물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허물과 나를 분리시킨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파악에는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허물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으로 나와 분리되는
것이 아닌, 오직 "허물 있는 자" 로써만 허물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허물의 파악은 그러 하기 때문에 "허물 있는자" 로써 존재하는
"나" 를 파악하는 것이지, 허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허물의 대한 모든 사실적 측면을 파악했다고
하더라고 해도, 그것이 그 자신에 있어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면, 마치 그는 물리학의 모든 공식을 외운 사람이 어떻게 그것이 세계에
나타나는 지 모르는 사람과도 같은 것 입니다. 그것은 희극적인 것입니다.
허물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 고통이 증가함은 필연적인 것 입니다. 그것을 느꼈던 순간을 다시 생생히 재현시키는 것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이 성급히 허물을 쉬쉬해서 무뎌지게 하려는 것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라틸루스' 에서 '자기 자신에 의하여 속임을 당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은 속이는 자를 언제나
자기 속에 지니기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허물의 파악은 속임수로 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그 노력이 향하는 방향은
자기가 '허물 있는 자' 로써 서있는 자 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불안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허물
있는 자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항상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고, 그리하여 속임수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맞서서 진실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 입니다. 항상 속이는 자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제
속아넘어 갈 지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자신을 찾으려는, 즉 자유를 찾으려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길을 계속 갑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부자유이고 허물이 그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허물은 도데체 왜 나에게 주어진 것일까가 다음 질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허물있는 자 로써 파악한 사람은 어째서 순결이
상실되어 버렸냐는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