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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해가 되는 과거의 삶
게시물ID : sisa_10563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뚬뙇뚬뙇
추천 : 15
조회수 : 15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5/10 0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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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전 우선 출처부터 적기 위해 아카이브를 쓰는 버릇이 생기네요. 

블로그 출처이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을 쓴건지 제3자가 작성한건 지도 모릅니다.

글 내용은 쉽게[ 써있습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그렇죠. 결과는 있는데 과정 자체는 큰 의미가 없으면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용을 추가해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

그 회사를 왜 결정했냐는 질문에... 입사지원서라면 마구마구 채우지만 솔직한 마음에서는 "월급 받아서 주변 잔소리 안듣고 싶어요" 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죠

취직 당시에 다른 사람으로의 (위장취업?) 물론 그때의 호적과 나이 때문이라는 부분도 적혀있습니다.

제가 아직 이 연배가 아니어서 잘 모르는데 이 연배중에서 당시 취업에 명의도용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인건지 아시는 분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를 다른 사람인척 하는건 정말 힘든거 같거든요. 근데 그게 과거의 회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듯 합니다.

혜경궁 김씨라는 분도 부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셨는데.

제가 이글에서 궁금했던건 딱 1개입니다. 이 글쓰신분이 누구시죠?

신체검사를 거쳐 총기소지허가를 받고 다연발 개스총을 구입해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협박전화는 밤이고 새벽이고 계속되었고 결국 협박전화를 받던 중 경찰에 신고하여 출동한 경찰에게 전화를 바꿔주며 발신지 추적과 처벌을 요구했지만 경찰간부가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 있던 그들은 이를 그대로 묵살했다. 무거운 개스총을 휴대하고 다니던 일도 새로운 형태의 탄압에 직면하면서 그만둘 수 있었다. 

협박도 통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2000. 1월말부터 2월 사이에 일단의 사람들이 ‘정치꾼, 부모 버린 패륜아, 배판만 하면 지는 돈만 아는 변호사’등 온갖 음해성 구호와 선전물을 뿌리며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유인물을 그대로 베껴 쓴 지방일간지의 사회면 톱기사가 나가고, 다시 이 기사를 복사한 우편물 수천통이 성남의 주요인사와 단체에 발송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중앙,동아 등 주요 일간지에 샂비로 나에 대해 갖가지 허위사실을 날조한 유인물 20만장이 각 가정과 직장에 배달되었다. 거의 3가구중 2가구에 비난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협박행위는 중단되었다. 

이 매장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건수임은 거의 끊어졌고,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괴로움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경찰은 형식적인 조사를 거쳐 무혐의처리하였고 검찰은 시간을 질질 끌다가 몇 달 후 새로운 검사가 온 후에야 불구속 고시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해 법원이 관련자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함으로써 종결되었지만 그로 인해 입은 피해는 여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사람들의 의심을 지우기에는 20만장의 유인물과 집회, 수천통의 우편물, 지방일간지 2개의 보도는 너무나 많았다. 

이 사건을 두고 시민모임을 포함한 시만단체 진영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고, 전국적으로는 보수세력에게 반사적 이익을 주므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차원에서 반대운동을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2000년도에 겪었던

협박-> 회유 ->사회적 매장(사무실 앞 집회, 유인물 배포 등)

이후에 이재선씨가 겪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출처 http://blog.daum.net/kimjiho7/4892605

http://archive.fo/5e1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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