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스압)역사 사료와 고문헌에서 나타나는 독도의 모습
게시물ID : dokdo_1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검은눈동자
추천 : 4
조회수 : 26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8/25 00:06:4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45권 강원도 울진현

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ㆍ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신라 때에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지증왕(智證王) 12년이사부(異斯夫)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戰艦)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猛獸)들을 놓아서 밟아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의 사람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왕이 울릉도가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유립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여 보(步)요,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 북쪽으로는 8천여 보이며 촌락터 일곱 곳이 있고, 혹 돌부처ㆍ무쇠종ㆍ돌탑이 있으며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초(石南草)가 많이 납니다.” 하였다.

후에 최충헌(崔忠獻)이 헌의(獻議)하여 무릉도에 토지가 비옥하고, 진기한 나무, 해산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집터, 깨어진 주춧돌이 완연하여, 어느 시대에 사람이 살던 것인지 몰랐다. 여기에 동쪽 고을 백성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사신이 돌아오면서, 진기한 나무와 해산물을 많이 가져다 헌납하였다. 그 후 자주 풍파로 인하여 배가 엎어지고, 사람이 많이 상하니 그만 거기서 살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본조 태종 때에, 유리하는 백성이 그 섬으로 도망한 자가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를 삼아서 돌아오게 하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인우의 말이,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 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습니다.” 하였다.

세종 20년에 울진현 사람 만호(萬戶) 남호(南顥)를 보내어서 수백 사람을 데리고 가서 도망해 가 있는 백성들을 수색하여 김환(金丸) 등 70여 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니 그곳 땅이 그만 비었다.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三峯島)가 있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정박하였다가, 큰 대나무와 큰 복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조보감 제 61권 영조조5

영조11년 (을묘, 1735년)

강원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장계로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를 1, 2년마다 한 번씩 찾아가 살펴보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순풍을 기다리는 즈음에 폐단을 끼칠 수 있으니 그 찾아가 살펴보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를 가지고 경연 신하에게 물었다. 대답하기를,
“지난 정축년에 왜인들이 와서 이 섬을 청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장한상(張漢相)을 보내어 도형(圖形)을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그 섬은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사람이 살던 옛터가 있었고, 그 서쪽으로 또 우산도(牛山島)라는 것이 있는데 또한 매우 광활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마침내 3년에 한 번식 찾아가 살펴보는 제도를 정하여, 지금까지 따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지역을 버린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찾아가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찾아가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4 해방 동해

문헌비고 울릉도 사실(文獻備考鬱陵島事實)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울릉도(鬱陵島)는 울진(蔚珍)에서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고, 일본의 은기주(隱岐州)와 가까우며 세 봉우리가 허공에 높이 솟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조금 낮다. 날씨가 맑을 땐 봉우리 위에 있는 수목과 산 밑 모래톱까지도 역력히 보인다. 바람이 순풍이면 이틀이면 갈 수 있다. 땅은 4방이 백 리쯤 되고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石楠)ㆍ등초(藤草)ㆍ각종 향나무와 범고채[蘆]가 산출되며, 아름드리 대[竹]가 많으며, 범고채 열매[蘆實]와 복숭아씨가 큰 것은 술잔이나 되를 만들 만하다. 산고양이가 개만큼 크고 쥐가 고양이 만하다. 바다 가운데 큰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가 소와 같이 눈동자는 붉고 뿔이 없다. 떼를 지어 해안에 누웠다가 사람이 혼자서 오는 것을 보면 해치는데 대개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 섬은 가지도(可之島)로서 본래는 우산국(于山國)이었는데, 신라 때 쳐서 빼앗았다가 뒤에 그들이 왜인들을 끌어들여 도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웠다.

고려 태조 13년 경인(930년)에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와서 공물을 바치자 그에게 백길(白吉)이란 벼슬을 주고 토착민의 우두머리로 정조(正朝)를 삼았다.

현종(顯宗) 13년 임술(1672년)에 도민(島民)들이 여진 병의 약탈을 당하여 도망해 온 자가 많으므로 이들을 예주(禮州)에 살게 하고 호적에 편입시켰다.

덕종(德宗) 원년 임신(1032년)에 도주(島主)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어 조공하였고,

인종(仁宗) 17년 기미(1139년)에 명주도(溟州道)의 수창사(首倉使) 이 양실(李陽實)이 섬에 들어가 과일[菓]의 씨와 이상한 나뭇잎을 가져와 바쳤다.

의종(毅宗) 13년 기묘(1159년)에 왕은 이 섬이 땅이 넓고 흙이 기름져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溟州)의 수창(首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고 다시 현(縣)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바다까지가 10,000여 보에 부락의 옛터가 일곱 군데 있어서 깨어진 주춧돌이 남아있으며,석불(石佛)ㆍ석탑(石塔)과 철종(鐵鍾) 따위가 있으나 지면에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말았다.

뒤에 최충헌(崔忠獻)이 이 섬의 토지가 비옥하고 진기한 수목과 해산물이 많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본군의 주민을 옮기려 하였으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드디어 그 주민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고종(高宗)ㆍ원종(元宗) 때에 본국 반신(叛臣) 이추(李樞) 등이 원 나라에 알리기를, ‘울릉에 진기한 재목이 많다. 하였으므로, 원에서 사람을 보내어 재목을 베어 들이려고 하였는데, 글을 올려 사정하여 중지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때에 유민(流民)들이 이 섬으로 많이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삼척의 김인량(金獜兩)을 안무사(按撫使)로 임명하여서 두 번이나 데려왔다.

세종(世宗) 20년 현인(縣人)인 만호(萬戶) 남호(南顥)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망자를 수색하여 김 환(金丸) 등 70여 인을 잡아 모조리 데려온 뒤엔 이 땅은 텅비게 되었다.

성종(成宗) 2년(1471년)에, 누가 말하기를, ‘삼봉도(三峰島)란 섬이 따로 있다.’ 하여,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조사하였는데 풍랑 때문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행이었던 배 한 척이 울릉도(鬱陵島)에 닿아서 큰 대[竹]와 큰 전복만 갖고 돌아와서 상주하기를,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하였다. 여지지(輿地志)에, ‘울릉(鬱陵)ㆍ우산(于山)은 다 우산국(于山國) 땅이며, 이 우산을 왜인들은 송도(松島)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년)에 왜인이 배 두척을 보내서, ‘의죽도(礒竹島)의 상황을 탐지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섬이 경상도와 강원도의 사이에 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건방지고 주제넘음을 미워하여 접대를 허락하지 않고, 동래부사(東萊府使) 박경업(朴慶業)을 시켜 답서하기를, ‘귀하가 이 섬을 점령함은 가로채는 것이 됨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인데 남의 땅을 넘보는 것은 무슨 마음이냐? 아마도 이것은 선린 우호(善隣友好)의 도리가 아닌성 싶다. 이른 바 의죽도(礒竹島)란 실로 우리 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도와 강원도 바다 사이에 있음은 여지서(輿地書)에 실렸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신라ㆍ고려 때부터 토산물을 받아 들였고, 본조에 와서도 여러 번 도피한 백성을 붙잡아 들였다. 지금 비록 폐기하였을 망정 다른 나라 사람이 불법으로 거주 함을 어찌 용납하겠는가? 전일 답서 여기에 전일 답서라 한 것을 보면 전에도 왕복한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이미 그 대략을 밝혔으니, 귀도(貴島)에서는 뚜렷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거늘 이제 배를 출발시키겠다고 하니, 이는 우리 조정을 업신여기고, 도리(道理)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귀도가 우리 나라에 통행함에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으니, 비유컨대 문호(門戶)와 같다. 이 밖에 표류하는 선박이라도 모두 적선으로 단정하겠다. 우리 진(鎭)의 연해(沿海) 장관(將官)은 다만 엄하게 약속을 지킬 줄 알 뿐이고 다른 것은 모른다. 그러니 귀도는 영토란 구별이 있음을 살피고, 한계선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각별히 신의를 지키기로 스스로 힘써서 허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유증의미가 있게 하라.’ 하였다.

숙종 19년(1693년)에 대마도 태수 평의신(平義信)이 표류민 2명을 압송[押還]하면서 예조에 보낸 글에, ‘귀역(貴域)의 어민이 본국 죽도(竹島)에 배를 타고 들어 왔는데, 이곳은 와서는 안 되는 지역[極是不可到之地]이다. 그러므로 지방관이 국가의 금법을 상세히 일러 주었거늘 이제 다시 금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민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멋대로 고기잡이를 하였기 때문에 지방장관이 그 어민 2명 안용복(安龍福) 박오둔(朴於屯) 을 구금하여 주사(州司)에게 볼모로 맡겨 놓고 일시의 증거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번주목을 통하여[我因幡州牧] 전후의 사실을 종합하여 동도(東都)에 보고했더니, 그 어민을 폐읍(弊邑)에서 인수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라는 분부를 받았다. 본인은 우리 전하께서 널리 백성을 사랑함이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으므로 과거는 허물치 않고 오직 혜택을 베풀어 2명의 어민을 그들의 고국에 돌려보낸 것이다. 이 사실은 관계가 중대하니, 양국은 어찌 불의의 사태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히 변포(邊浦)에 다시 명령하여 금지조항을 단단히 마련하여 이웃 나라와의 화목함을 길이 보존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 생각한다.’ 하였다. 답서에 이르기를, ‘폐국(弊國)은 해상의 금령이 매우 엄격하여 해변의 거민들을 먼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制束海民使不得出於外洋]하며 우리의 영토인 울릉도까지도 멀다고 하여[以遼遠之故] 결코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그 밖이겠는가? 지금 우리의 어선들이 귀국의 영토인 죽도(竹島)에 침입하여 송환의 귀찮스러움을 끼치었으니 이웃 나라로서의 호의에 대하여 실로 고맙게 여기는 바이다. 해변의 백성이란 고기잡이로 생활[生理]을 하기 때문에 혹 풍랑을 만나서 표류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 깊숙이 들어간 데 대해서는 법으로 엄중히 징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범인들은 법에 의해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이때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동래부(東萊府)에 이르러 답서를 전달하니, 파견된 왜인이 말하기를, ‘죽도 사건만 말해도 될 터인데 하필 울릉도를 들어서 말할 게 무엇이냐?’ 하였다. 역관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도 해상의 금병을 엄격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하니, 왜인이 말하기를 ‘울릉도가 귀국의 영토인 줄은 잘 알지만 임진란 뒤엔 일본(日本)의 점령지가 되었다고 귀국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있지 않느냐?’ 하였다. 수석 역관 박재홍(朴再興)이 말하기를, ‘유설 가운데 사실 그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임진란 때에 일본 병이 우리 경내에 깊이 들어와서 서쪽으로는 평안도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함경도까지 이르렀으니, 크고 작은 해안지방의 군읍(郡邑)들은 모두 난병에게 점령되었던 바, 울릉도뿐만은 아니었는데 [不獨鬱陵一島而已] 어찌 임진란 중에 난병들이 점거(占據) 한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설에서 말한 것을 끌어올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문사의 일시적인 만필(漫筆)이 밝은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논박하였다.

20년에 대마도 태수 평의신(平義信)이 예조에 서한을 보내어 이르기를, ‘지난 번 본국의 죽도에 들어온 귀국의 어민을 송환한데 대한 귀국의 답서에 울릉도의 명칭이 들었는데, 이것은 이해 할 수 없다. 울릉도란 명칭만을 지워 주기 바란다. 운운.’ 하였고,

21년에 대마도의 왜인 귤진중(橘眞重)이 동래부에 서신을 올리어 죽도에 대한 의문점 4개조를 말하였으며,

22년엔 대마도 봉행(奉行) 왜인(倭人) 평진현(平眞顯) 등 6인이 우리 나라의 역관 변(卞)ㆍ송(宋) 두 사람 앞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하나는 죽도에 대한 논의였고, 하나는 안용복(安龍福) 자의로 행동한 사건을 논한 것이었다. 이때 조정의 여론은, ‘하나의 빈 땅을 가지고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는데, 오직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강토는 조종(祖宗)에서 물려 받은 것이니 줄 수 없다.’ 하였으며, 이어서, ‘이 섬은 고려가 신라에서 받고, 아조(我朝)가 고려에게서 받은 것이며, 원래가 일본 땅이 아니다.’ 하여, 이러한 서한이 오고 가다가 잠잠해졌다.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보내어 울릉도를 조사하였고, 이때부터 법으로 정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보내어 그 섬을 조사하고 관에서 도끼 15자루를 주어 그곳 대와 나무[木]를 베었고, 또 토산물을 채취해서 정부에 바치는 것으로써 하나의 신표[信]를 삼게 하였다. 삼척(三陟) 영장(營將)과 월송(越松) 만호(萬戶)가 번갈아 여기에 들어갔다.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은 노군(櫓軍)에 속하여 일본 말에 능통하였는데, 숙종 19년(1693년) 여름에 바다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울릉도에 이르렀다가 일본 배[倭船]을 만나 붙들려서 일본의 오랑도(五浪島)에 들어갔다. 용복은 도주(島主)에게, ‘울릉도가 우리 나라에서는 하루 길이요, 일본에서는 닷새 길이니 울릉도는 우리 나라에 붙은 것이 아니냐?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갔는데 어째서 구속하느냐?’ 하니, 도주는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듯하여 풀어서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백기주의 태수는 그를 잘 대접하고 은(銀) 폐물을 주었다. 용복은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일본이 울릉도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것을 원할 뿐이고, 은을 받을 생각은 없다[受銀非吾志也].’고 하였다.

태수는 드디어 관백(關白)에게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가다가 장기도(長碕島)에 들렸는데, 도주는 대마도의 일당으로서 서류를 보자고 요구하여 보였더니, 서류를 빼앗고 용복을 대마도로 보내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관백을 핑계하고 자주 울릉도를 들어서 다투었는데 사실은 관백의 뜻이 아니었다. 울릉도에는 물고기와 대[竹]가 풍부하였으므로 왜인들은 그 이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며, 또한 그들의 파견원이 우리 나라에 오면 조정에서는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 탓으로 그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용복이 이 부정한 내막[奸狀]을 모조리 폭로할까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구금하였으며, 동래로 압송하여서도 관(館)에 가두었다가 전후 90일 만에야 풀려나왔다. 용복은 전후 사실을 부사에게 말했지만, 끝내 보고하지 않았다. 이듬해 접위관(接慰官)이 동래에 왔을 때에도 용복은 또 이 사실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를 믿어주지 아니하였다[亦不之信也]. 그 뒤에 파견된 왜인이 여러 번 와서 분쟁을 일으킬 듯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를 걱정은 하면서도 대마도[馬島]에게 우리가 속임을 당하는 줄은 알지 못하였다. 용복은 분개해서 울산(蔚山) 해변으로 갔는데 마침 거기엔 장사치 중[商僧] 뇌헌(雷憲) 등이 와 정박하고 있었다. 용복은 그들을 꾀어서 말하기를, ‘울릉도(鬱陵島)에는 해채(海菜)가 많으니 내 그대들을 위해 길을 인도하겠다.’ 하니, 그들은 기뻐하며 선뜻 좇았다. 밤낮 사흘 만에 울릉도에 닿았더니 왜선[倭舶]도 동쪽으로부터 와 닿았다. 용복은 여러 사람에게 눈짓하여 왜인들을 묶으라고 하였으나, 선원들은 겁이 나서 나서지 않았다. 용복은 앞에 나서서 꾸짖기를, ‘어찌 하여 우리 영토를 침범하느냐?’ 하니, 왜인은 대답하기를, ‘본시 송도(松島)로 갈려던 길이니 가겠노라.’ 하였다. 용복은 송도까지 쫓아가서 또 꾸짖기를, ‘송도는 곧 우산도(芋山島)다. 너희는 우산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말을 못들었느냐?’ 하고는, 몽둥이를 휘둘러 가마솥을 부시니 왜인들은 매우 놀라 달아나 버렸다.

용복은 그 길로 백기주(伯耆州)로 가서 그 사실을 말하니, 태수는 그들을 모조리 잡아서 치죄하였다. 용복은 자기가 울릉도의 감세관(監稅官)이라고 사칭하고 당상에 올라가서 태수와 서로 대등한 예를 치루고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대마도가 중간에 끼여서 속이는 것은 울릉도 문제뿐만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보내는 물품을 대마도가 일본에 전매(轉賣)하되 흔히 속임수를 쓴다. 쌀은 15두(斗)가 1곡(斛) 인데도 대마도는 7두를 1곡으로 치고, 베와 무명은 30척이 1필인데도 대마도에서는 20척을 1필로 치며, 종이 1속(束)이면 매우 길다란데 대마도에서는 끊어서 3속으로 만든다. 관백이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귀하는 나를 위해 관백에게 서한 한 통을 전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수는 이를 허락하였는데 마침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강호(江戶)에 있던 터라,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태수에게 애걸하기를, ‘서한이 아침에 들아가면 내 아들은 저녁에 죽을 것이니, 태수는 생각해 달라.’ 하였으므로, 태수는 용복에게 돌아와 말하기를, ‘일부러 서장(書狀)을 올릴 필요 없이 속히 대마도로 돌아가라. 만약 다시 국경 문제로 분쟁이 있거든 사람을 보내어 서장을 갖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용복은 양양(襄陽)에 돌아와서 관에 보고하고 또 백기주(伯耆州)에 있을 때 태수에게 보낸 서장을 바치어서 앞의 일들을 증명하였으며, 따라갔던 여러 사람들도 저마다 용복의 진술과 일치하고 틀리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왜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한을 동래부에 보내와 사과하기를, ‘다시는 사람을 울릉도로 보내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그 내용이 용복으로 인해서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고 왜인은 그를 미워하여 용복이 갈 때 대마도를 거쳐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트집하여 죄로 삼았다. 옛 조약에,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다니는 한 길 외에는 어떤 길도 금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의론은 모두 용복의 죄가 참형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나, 돈녕부(敦寧府) 윤지완(尹趾完)과 영중추(領中樞) 남구만(南九萬)만은, ‘그를 죽이는 것은 대마도의 분함을 씻어 주는데 족할 뿐이다. 그리고 용복은 위인이 걸출하고 용렬한 자는 아니다. 마땅히 그를 살려서 후일에 쓰임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 일본이 그 뒤로 지금까지 울릉도가 저희네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 안용복의 공적이다.

 

미수기언 기언 제11권 청사열전 김시습

....다시 동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ㆍ오대산(五臺山)에 올라 동해 끝까지 다 구경한 다음 월송정(越松亭)에 노닐며 울릉(鬱陵) 우산도(于山島)를 바라보았다......

 

점필재집 시집 제5권

우릉행으로, 울진에 가는 진사 김상간을 보내다. 이 때 진사의 아버지 박이 울진 현령으로 있었다[羽陵行送金進士尙簡之蔚珍時進士之父博爲縣令]

한 점의 우산도가 큰 바다 한가운데 있으니 / 于山一點滄溟中

날개 달린 사람 아니면 어찌 이를 수 있으랴 / 若非羽人那可到

백 길의 큰 파도가 천둥과 비를 일으키니 / 洪波百丈激雷雨

망상과 천오도 절로 거꾸러지고 만다오 / 망象天吳自顚倒(망字가 안써져여......ㅠㅠㅠ)

지금까지도 괴이한 것은 이사부란 사람이 / 至今怪殺異斯夫
나무 사자 싣고 들어가 위엄을 떨침일세 / 木獅載入羅威稜
그리고 객성이 견우 직녀성 범했다는 말도 / 乃知客星犯牛女
황홀한 일이긴 하나 증빙할 만함을 알겠네 / 事縱慌惚猶能徵
신라 이후론 천 년 동안 다시 통하지 못하여 / 繼羅千載不復通
무릉 도원 백성처럼 생사를 제멋대로 하니 / 生死自作桃源民
춥고 덥고 잎 피고지는 것이 곧 책력이거늘 / 寒暄榮落是曆日
황금이나 자패를 어찌 보배로 여기리오 / 黃金紫貝寧爲珍
그대 부친 부절 갖고 동쪽 해협에 계시니 / 尊公剖竹在東澨
정히 다른 경계와 멀리 서로 바라보리라 / 正與異境遙相望
어떻게 하면 그대를 따라 원유편을 짓고/ 安得隨君賦遠遊
높고 큰 배를 타고 바람 날개를 능가하여 / 軻峩大艑凌風翔
지척인 봉래 영주에서 뭇 신선들을 불러 / 蓬瀛咫尺招群仙
대추 먹으며 외딴 섬에서 마음껏 노닐어볼꼬 / 啖棗絶嶼同聊浪
붉은 먼지가 나를 당겨 조용치 못하게 하니 / 紅塵挽我不從容
그대 보내매 내 꿈은 풍악산 동쪽에 가있네 / 送君夢落楓岳東
인간의 해 바퀴는 서쪽으로 거의 져가는데 / 人間羲馭幾濛汜
산 위의 반도는 응당 열매를 맺었으리 / 山上蟠桃應結子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 (1417년, 영락15) 2월 5일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 등을 바치다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 (1417, 영락15) 8월 6일

왜적이 우산도 등지에서 도둑질하다

왜적이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에서 도둑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 을사 (1425, 홍희1) 8월 8일

전 판장기현사 김인우를 우산도·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다

전 판장기현사(判長鬐縣事)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 등지의 안무사(按撫使)로 삼았다. 당초에 강원도 평해(平海) 고을 사람 김을지(金乙之)·이만(李萬)·김울금[金亐乙金] 등이 무릉도에 도망가 살던 것을, 병신년에 국가에서 인우를 보내어 다 데리고 나왔는데, 계묘년에 을지 등 남녀 28명이 다시 본디 섬에 도망가서 살면서, 금년 5월에 을지 등 7인이 아내와 자식은 섬에 두고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평해군 구미포(仇彌浦)에 왔다가 발각되었다. 감사가 잡아 가두고 본군(本郡)에서 급보(急報)하여 곧 도로 데려 내오기로 하고서, 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군기와 3개월 양식을 갖춘 다음 배를 타고 나섰다. 섬은 동해 가운데 있고, 인우는 삼척(三陟) 사람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정축 (1457, 천순1) 4월 16일

유수강이 영동을 방어하는 일에 대해 조목을 갖추어 상언하다

... 강릉(江陵) 사람의 말에,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임금이 병조(兵曹)에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제4조.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 현읍(縣邑)을 설치하는 일은 두 섬이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어서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바다 가운데의 고도(孤島)에 읍(邑)을 설치하면 지키기도 또한 어렵습니다....위의 조건(條件)을 아울러 거행(擧行)하지 마소서.

사료에 대한 간략한 설명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세종에 명에 따라 맹사성(孟思誠), 신장(申檣) 등이 1432년 신찬팔도지리지를 찬진하였다. 후에 성종의 명으로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1481년 양성지(梁誠之),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등이 동국여지승람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를 다시 1486년 증산,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35권을 간행하고, 1499년 개수, 1530년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의 증보에 의해 완성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

 

만기요람(萬機要覽)

국왕의 정사[萬機]에 참고하도록 정부 재정과 군정의 내역을 모아 놓은 책. 1808년 편찬

 

점필재집(佔畢齋集)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시문집.

 

 

 

출처: 1. 본문 - 한국 고전 종합 db
        2.  두산백과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