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미리 사야하지 않을까?"
갑자기 전화를 했나싶더니 결국 에어컨 사자는 얘기다.
나는 '맞아, 사야지' 하며 부러 맞장구를 쳤다.
너는 요새 조급하다. 나도 알고 있다.
비오는 날은 습도가 머리 뿌리를 타고 흘러 내리니까 에어컨이 더욱 절실하겠지.
그는 비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나와는 정반대로)
학교다닐 때 비오는 날은 등교거부 및 무단결석을 성실히 했다고 한다.
(나도 참 뺀질거렸지만.. 네가 이겼다.)
장마철에 친구를 만날 때면 친구가 먼저
'비오는데 괜찮겠어?' 하고 물었으니,
자타공인 비의 안티, Born Hater (타고난, 태생이 안티)랄까.
싫은 이유야 많지만, 특히 여름비는 머리가 떡져서 싫단다.
에어컨은 더위를 식혀주는 가전제품이지만
그에게 에어컨이란, 습도와 땀으로부터 지성두피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것이다.
제습기를 사야되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에어컨에도 제습 기능이 있으니까 어차피 살거라면 에어컨이 나을 성싶다.
작년에도 5월부터 반팔을 입었으니 올해도 금방 여름이 올 텐데, 나는 아직도 망설인다.
이사오면서 샀던 TV며 소파의 카드 할부도
150이나 남았다. 카드가 쉴 틈이없다.
보채는 전화 목소리가 내 귀에 설풋 들리는 이유다.
사자, 에어컨.
어쨌든 여름은 올테고 올 여름 밤도 길테니까.
마을 어귀를 지키는 정승처럼 너의 머리 맡을 지켜줄 하얀 수호신을 모시러 가자.
결제하는 이번 달의 나와 할부 갚는 다음 달의 네가 힘을 합쳐 에어컨을 사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