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학교에서 페미니즘에 관련된 토론을 한적이 있었다.
그 때는 페미니즘이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아서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메갈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였다.
아무튼 그 토론 발제를 위해 '레이디 퍼스트'에 대한 비판을 조사했다.
그 내용은 크게 두가지다.
1. 레이디 퍼스트는 남성중심적 사회였던 중세 유럽의 기사도 문화의 산물이며,
여성을 보호와 배려가 필요한 약자로 취급함으로써 종속적 지위에 머물게 만든다.
쉽게 말해 '아이와 여자 먼저'는 여성을 아이 취급하는 문화라는 것.
2. 레이디 퍼스트는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마차에서 내릴 때, 여성을 먼저 내리게 함으로서
바닥이 진창길인지 아닌지 알아보게 했던데서 유래했다. 레이디 퍼스트는 일견 여성을 우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남성들의 체면치레를 위해 만들어진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풍습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막장 주장이 있는데, 그 내용은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피난할 때 레이디 퍼스트를 내세워 여성이 먼저 피난하도록 했는데,
그 실제 목적은 여성이 먼저 가게 함으로서 총격의 위협이 있는지,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를 살폈다는 것이다.
1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과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2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얼마나 황당하고 비약이 심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절대로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인간이란 이기적인 생물이고, 역사에서, 일상에서
명분을 앞세워 실리를 취하고 이익이 되지않으면 그 명분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역사상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그것을 일반화하여 '레이디 퍼스트'라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비약이며,
심지어 이것이 레이디 퍼스트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이 부분의 발제를 맡은 친구에게 정리한 내용을 넘겨주면서 2번 내용은 이런 주장도 있다고 참고만 하고,
1번 내용에 초점을 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정작 토론 당일 그 친구는 1번 내용은 다 잘라먹고, 2번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발제를 가져왔다.
심지어 매우 분개한 어조로 그 발제를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그 발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 2의 주장은 얼마나 직관적인가.
여성을 희생시켜 남성이 이익을 취하고 있고, 심지어 여성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 착한척까지 해먹고 있다니.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 논리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반면에 1의 주장은 비직관적이다.
여성을 보호하고 배려한다, 즉 위험을 떠맡고 힘든일을 할 의무에서 배제한다는 '이익'을 주는 것이 사실은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의무에서 여성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논리이지만, 이 이면까지 제대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사람은 감정에 쉽게 흔들리고, 매우 허술한 논리조차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쉽게 믿어버린다.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때 발제를 맡았던 내 친구와 같은 판단을 흔히 하고 있다.
메갈이 페미니즘을 자칭하면서 온갖 병신 같은 주장을 쏟아내는 것은 정의와 이해관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무는 남성만이 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권리는 남녀가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모순된 주장은 여기서 나온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