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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미래를 보는 사나이 - 4 -
게시물ID : panic_144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네모
추천 : 3
조회수 : 93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4/23 14:08:28
[펌] 미래를 보는 사나이






특별히 갈 데도 없었지만, 경민은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언덕 아래, 가로등 밑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경민은 품속에서 복권당첨번호가 적힌 종이를 슬쩍 꺼내보고는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한참을 낄낄대던 경민은 종이를 다시 품속에 조심히 넣고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톡톡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누가 봤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언덕 밑 어두운 골목길로부터 사냥감들이 쏟아져나왔다. 어제 경민에게 흙먼지를 뒤집어씌운 불량배들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어제와 같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경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경민은 품속의 칼을 힘껏 쥐었다. 




‘셋. 누굴 죽이지. 피어싱한 놈? 아니야, 고마우신 신사님께 보답하는 셈치고 셋 다 처리하자. 그래, 그게 좋겠어. 셋 죽였다고 삼일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아랫입술 밑에 번뜩이는 은빛 피어싱을 한 녀석이 껌을 짝짝 씹으며 경민에게는 익숙한 대사를 지껄였다. 경민은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달래느라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어이, 아저씨, 용돈 좀 주실라우? 겨울이 되니까 손도 차갑고 해서 장갑이나 사 낄라고.” 




녀석은 두 손을 싹싹 문지르며 무척이나 추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에 경민의 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붉은 칼이 호선을 그리며 녀석의 왼쪽 관자놀이로 파고들었다. 경민의 칼은 놈의 관자놀이부터 사선으로 뚫고 들어가며 피를 분수처럼 터뜨렸다. 거의 동시에 놈에게서 칼을 뽑은 경민은 뒤따라 오던 놈의 목을 후벼팠다. 또 한번 검붉은 피가 터져나왔다. 

경민은 자기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민첩하고 빨랐던 적이 있었던가. 사람을 때리고 패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경민이었지만, 실전에서 그는 빠르고 신속하게 사냥감의 치명적인 부위만을 골라 찌르고 있었다. 

두명의 동료가 자신의 눈 앞에서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는 것을 본 나머지 한놈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경민의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경민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처럼 변했다. 그도 달리기 시작했다. 경민의 얼굴과 옷 여기저기에는 황홀한 붉은 액체가 그림처럼 수 놓여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붉은 칼 역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민의 볼에 닿는 새벽녘의 바람이 유난히 상쾌했다. 



















머리는 여전히 헝클어진 채 였다. 경민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에 천장벽지 무늬가 들어왔다. 경민은 피식 웃었다. 왠지 그 옅은색의 나뭇잎 무늬가 귀여워보였다. 

부엌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 풍기는 냄새도 시원한 동태찌개 냄새다. 경민은 그가 해야하는 대사를 알고 있었다. 




“수현아, 물 좀 줄래?” 




어제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수현이 어제처럼, 그리고 그제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며 부스스한 경민을 반겼다. 경민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그 다음 수현이 할 대사에 맞춰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어, 자기 일어났어? 잠깐만, 자기가 좋아하는 동태찌개 했으니까 밥먹어.” 




경민은 거울에 비친 부스스한 자신의 머리를 보고서도 즐거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목시계를 봤다. 역시나 11월 20일이다. 

수현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 위에는 나물무침 몇가지와 밥, 그리고 동태찌개가 올려져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풍경의 밥상을 벌써 삼일째 받고 있는 경민이었다. 




“오늘은 투정도 안하고 이쁘네~” 




수현은 어린아이 어르듯 경민을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는 그런 수현의 태도에 한소리 했을 그였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경민은 오랜만에 맛있는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게 정말 행복인 것 같았다. 자신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마냥 즐거워 하는 수현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경민은 이쯤이면 자신의 일을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아, 나 할 말이 있는데...” 




경민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도 이 사실을 믿기까지 힘들었다. 진짜 죽고 싶은 상황이었고, 때마침 나타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고, 자신이 직접 해보고 나서야 실감을 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믿을까?’ 






















경민의 예상과는 달리 수현은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수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경민이 입고갈 회색 정장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자기야, 자기가 요즘 밥도 제때 안먹고 그래서 좀 힘든걸꺼야. 이따가 저녁때 내가 불고기 해놀 테니까 빨리 밥 먹고 출판사 갔다와.” 




역시나 수현은 믿지 못했다. 아니, 아예 상대를 안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미친 놈 취급인가.’ 




경민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득 경민은 복권번호가 적힌 종이를 생각해냈다. 그것을 보여준다고 수현이 자신의 말을 믿지는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자신이 미친소리를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은 증명해 보일 수 있지 않은가. 




“수현아, 그 마이 왼쪽 안주머니에 보면 종이 하나 있을거야. 그게 그 증거라구. 오늘 밤에 추첨될 로또 1등 당첨번호 적어논 종이야.” 




수현은 대체 왜 그러냐는 식의 눈빛을 보내왔다. 경민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수현에게 빨리 뒤져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수현이 갑자기 한숨을 푹 쉰다. 




“뭐해, 빨리 뒤져봐.” 




“자기야 말로 왜이래 정말. 진짜 미친 사람처럼. 이 마이는 오늘 아침에 세탁소에서 찾아온 건데 뭐가 들어 있다는 거야.” 




수현은 반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회색마이의 안주머니를 밖으로 잡아뺐다. 아무것도 없었다. 

경민은 뒷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벌떡 일어난 경민은 회색마이를 빼앗듯이 잡아채더니 못믿겠다는 듯 마이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이 뿐 아니라 와이셔츠 주머니, 바지주머니 모두 뒤졌다. 경민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아무데도 번호가 적힌 종이는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왜 그래! 자기, 미쳤어 정말?” 




수현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경민은 가만히 선 채로 어제의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어디 떨어뜨렸나? 그 마지막 놈을 좇을 때? 그렇다고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게...?’ 




그렇게 여러 상황을 생각하던 경민의 머릿속에 수현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 이 마이는 오늘 아침에 세탁소에서 찾아온 건데 뭐가 들어 있다는 거야. 




그랬다. 경민은 번호를 외웠어야 했다. 머릿속에 넣어두었어야 했다. 어제 아침 마이 주머니에 종이가 없었듯, 오늘 아침에도 마이 주머니는 빈 상태여야 맞는 것이었다. 

경민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일주일을 손해보지 않는 방법도 생각해 냈으면서 번호를 외워야한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아니, 술 취한 머리에 써두는 것보다는 좀 더 확실한 종이에 써두는 편을 믿었던 것이었다. 경민이 그토록 기대했던 복권당첨번호는 그의 머릿속에 한개, 아주 어렴풋이 두개쯤 기억 돼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런 제길...’ 



















수현의 성화에 못이겨 경민은 또다시 집을 나와야 했다. 아니, 너무도 허탈한 마음에 벙쩌있던 경민을 수현이 거의 끌어내다시피 해서 나가게 한 것이었다. 

경민의 발걸음이 어제 밤과는 다르게 무거웠다. 자신의 한심한 머리를 한탄하는 중이었다. 경민의 눈에 동네목욕탕 간판이 들어왔다. 그 간판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경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목욕을 또 했다. 그에게는 세 번째 목욕이었다. 몸도 어제로 돌아갔을테니 때도 많이 나올텐데, 왠일인지 때가 잘 안나오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너무도 안갔다. 

이발소를 또 갔다. 한쪽 벽면에 걸린 일력은 어제처럼 20이란 숫자를 내걸고 있었고, 이발사양반도 여느때처럼 경민을 반기고 자리로 안내했다. 시간이 너무도 안갔다. 




눈 앞에는 어느덧 지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경민이 기억하는 어제와 그제처럼 여전히 땅콩을 까고 있었다. 오늘은 경민도 시간 생각하지 않고 마시기로 했다. 어차피 어제처럼 호프집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번호를 확인하면 그만이니까. 경민은 앞에 놓인 맥주 오백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방학동 가주세요.” 




지철은 택시 안에서 경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경민도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됐다, 싶었다. 그의 머릿속에 복권번호 여섯 개가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는 다시금 행복해졌다. 돈이 생기면 뭘할까, 우선 더 이상 찝찝하게 사람 죽이는 일은 안해도 될꺼고... 수현이 맛있는 것부터 먹이고 집을 보러가야지. 수현이 옷도 사주고... 수현이가 갖고 싶어하던 머리핀도 사주고... 경민은 너무도 행복했다. 어제와 같은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정말로 수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굴 죽이지.’ 




종이가 사라져 허탈했던 경민의 마음을 다시 냉정하게 만든 생각은 그냥 또 한명 죽이고 말자, 라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했다. 

누군가를 죽여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경민의 눈이 맹수처럼 변했다. 자신의 주머니 속에 검은 신사로부터 받은 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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