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곳 게시판에서 진중권의 글을 읽었습니다.
진중권의 글을 읽으면, 그런 느낌입니다.
논리는 있는데 그 안에 진중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쓴 많은 글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꼬챙이가 없습니다.
그 글에서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지우면,
그 글을 진중권이 썼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썼는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 꼬챙이란 건 실은, 아주 이기적인 것이라
논리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자꾸 주장하고 싶어지는, 어떨땐 자기애를 동반한 기준 같은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자기 철학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꼬챙이를 가졌는지 가지지 않았는지 분간조차 못하거나
있다고 할지라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중권에게도 꼬챙이가 있는데 제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있음을 안다고 할지라도 동의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꼬챙이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꼬챙이를 얼마만큼 이 시대에 의미가 있는 꼬챙이로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느냐,
그리하여 인간 세계를 분석하고 반성하는 데 좋은 실마리가 되느냐
다른 사람들의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느냐, (이건 아마 철학의 기능이라 볼 수 있을 듯한데, 제가 쓰기엔 역량이 부족하군요.)
그러니까, 자기 철학이 다른 이들에게도 철학이 되게끔 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 과정은 똑똑한 머리, 공부, 논리, 지식, 책, 논쟁, 옳고 그름의 분별, 행복이 다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하지만요 ㅎ)
그보다는 그를 아우르는 자기 수행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땅을 파는 농부님들에게서도 철학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그들이 학문을 함으로써 그리 된 게 아님을 모두 알 것입니다.
중하다 여기는 걸 얼마나 삶에 반영하여 온 몸으로 그 향기를 뿜어내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그러기 위해 자기 관념과 세상, 타인과 얼마나 부딪쳤을까요. 그 담금질을 견뎌내는 게 수행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단, 그 철학이 학문하는 방식과 만나 더 견고해졌다면 그 농부님만의 철학으로만 간직되지 않겠지요.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나는 나만의 꼬챙이와 향기가 있는가 하는 반성적 질문에 답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이건 내가 왜 사느냐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고통이 나중에 보았을 때 수행이었구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줄 요약
1.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
2. 그걸 더 견고하게 하는 데에는 수행이 필요하다.
3. 나도 견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