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그녀의 깨어있는 소신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2004년 3월 11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는 호주제의 위헌문제를 놓고 2차 공개변론이 열렸다. 서울대 법대 양현아 교수, 부산대 법대의 김상용 교수는 호주제폐지 찬성논리를, TV 방송토론에 나와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패널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던 폐지 반대론자 구상진 변호사는 “호주제폐지 주장은 가족문화를 전면적으로 없애자는 것”이라며 반대논리를 폈다. 사안이 워낙 중대한 사안인지라 폐지 찬성론자인 양현아, 김상용 두 교수는 남성이 처가살이를 했다는 삼국시대 문헌이나, 어머니도 가족을 대표할 수 있었던 17세기의 기록, 호주제가 식민지 시기 조선에 차용된 일본 구민법인 조선민사령과 조선호적령 등을 근거로 이식된 일본 가(家)제도의 일환이라는 역사적 근거, 현재 피해를 겪고 있는 사례들, 출산력 저하, 여성가구주 증가 등 기존의 호주제가 더 이상 보편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졌다는 사실, 인권을 정의하는 서양철학 등을 인용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호주제의 위헌성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방청석에 앉아 인류의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야 할 내용이 새삼 헌법재판소에서 힘겹게 다루어지고 있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으며, 두 분의 교수가 조목조목 열거하는 주장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성실한 연구에 감사했고, 때로 그들의 진실어린 주장에 감동하여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 세상에... 방청석에 앉아 잔뜩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와는 달리, 높이 앉으신 대부분의 남성판사들은 까딱 까딱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오랫동안 한 자리에 앉아 이미 서류로 보아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을 듣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어떤 곳인가. 헌법재판관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일어나 소리치고 싶었다. 분필조각이 있으면 던져 그들을 깨우고 싶었다. 머리가 하얀 판사 할아버지들, 일어나세요, 잠에서 깨어나 제발 저 명쾌한 주장들을 똑똑히 들으시란 말이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사 할아버지들이 졸고 있을 때, 판사석 가장 오른쪽(방청석에서 보면 가장 왼쪽)에 앉아있던 전효숙 판사는 단 한시도 졸지 않았다. 그녀는 변론시간 내내 열심히 경청하고, 자료를 들쳐보았다. 고마우신 분!!! 졸고 있는 남성판사들과, 깨어있는 그녀를 비교해보며 배부르고 등 따신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배부르고 등 따신 사람들은 헌법재판관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판사, 강하면서 부드러운, 한 눈 팔지 않고 묵묵히 소신을 지키는 아름다운 원칙주의자’라는 평을 들어왔다. 그렇게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서울가정법원, 서울형사법원, 서울고등법원 민사 부장판사, 형사 부장판사를 거치며 차근차근 승진했다. 2003년 최종영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에 맞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해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인물인지를 살펴보았다’며 여성보호, 소수자 보호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가장 부합한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전효숙판사를 지목했고 그녀는 지난 3년간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왔다. 헌법재판관은 대통령 추천 3명, 대법원장 추천 3명, 국회 추천 3명(여당 1명, 야당 1명, 여야가 합의한 1명)으로 구성되고, 소장은 그 중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있고, 밖에서 뽑아 판사임명과 동시에 소장임명을 할 수도 있으며 중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편법으로 임기를 늘리려 한다고 참여정부를 비난하는 민주당 이승희의원의 말은 옳지 않다. 또한 이미 3년 전에 대법원장 몫으로 추천해서 헌재 판사가 된 사람이므로 코드인사라고 트집 잡을 일도 아니며, 1977년부터 30년간의 판사생활동안 능력을 인정받아 차근차근 승진한 사람이므로 기본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2003년 전효숙 판사가 헌재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당시 한나라당 운영위원이었던 나경원 변호사는 “겉으로는 절도 있는 모습이지만 후배들에게는 아낌없는 애정을 보이는 사람”, “법원 내부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평소 조용한 성품으로 꼼꼼한 일 처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 “평소 여성관련 현안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 활동이 기대된다.”고 대단한 환영을 했다.(여성신문 2003. 8) 대법원장 추천으로 헌재판사의 일원이 되었을 때에는 환영했다가, 대통령 추천으로 헌재 소장으로 임명 되려는 순간 그녀의 태도는 180도로 돌변한다. ‘해석이 분분하다, 절차가 깨끗하지 않다’는 등 절차를 탓하다가 그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기본 자질이 문제’라며 또 다른 구실을 내세우는 나경원 대변인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집요한 참여정부 발목잡기에는 혀가 내둘러진다. 지난 2000년, 한나라당 몫으로 추천되어 6년간 일하고 최근에 물러난 권성 헌재판사는 1997년 친일파후손들 땅 찾기 소송에 “반민족행위자나 그의 후손이라고 해서 재산에 대한 법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매국의 대가로 받은 돈일지라도 일반인과 똑같이 재산권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며 이완용 증손 등, 친일파후손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압구정동 아파트에 전세를 살면서 강남 논현동 40평 아파트와 분당의 60평 아파트에서 임대수익을 올렸고 장남이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살 때 증여세도 내지 않고 5,400여만 원을 주었다. 과연 그는 시대정신에 어울리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한나라당은 이미 3년 전에 대법원장 추천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되었던 전효숙판사에 대해 시비를 걸기 전에 자기들 추천 몫의 판사들이나 제대로 뽑을 일이다.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한나라당은 전효숙 판사가 2012년까지 헌법소장으로 일하는 것이 엄청나게 두려운 모양이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자가 졸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이 그리도 걱정이 되나?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시대정신을 구현해나갈 사람이 그리도 껄끄러운가? ‘풍전등화 운명의 조국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송영선 의원이 골프채를 잡고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면 정치에 무심하던 국민들도 깨닫는 것이 생기듯이 이런 저런 구실로 전효숙판사의 헌재소장임명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한나라당의 검은 속내를 현명한 국민들은 곧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나 대변인은 상황이 복잡할수록 간단한 원칙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헌법 111조 4항을 들이대고 전효숙 후보자의 헌재소장 임명은 원천무효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1~3기 까지 모두 헌법소장은 헌재 밖의 인물로 임명했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111조 4항 운운하며 원천무효주장을 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다. 하물며 ‘평소 조용한 성품으로 꼼꼼한 일 처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입이 마르도록 전효숙 헌재판사를 칭찬했던 그녀가 아닌가. 나 대변인 뿐 아니라, 이계경, 박근혜, 박찬숙, 박순자, 진수희, 김영선, 김애실, 전재희, 안명옥, 이혜훈, 김희정, 전여옥, 김영숙, 고경화 등 15명이나 되는 한나라당의 여성의원들은 왜 반대에 앞장서거나 침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부르짖으며 사회적 약자의 과소대표성을 해소하여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당명을 불문하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여성들 앞에 맹세하지 않았나. 그녀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복잡한 상황은 간단한 원칙으로 풀어야 한다는 나경원 씨의 말대로 문제를 풀어 보자. 헌법재판소는 법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다. 성실한, 꼼꼼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해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항은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서 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전효숙이다. 어떤가. 이만하면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고은광순(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