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을 사랑한 남자
게시물ID : readers_144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정당한사유
추천 : 2
조회수 : 2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08 10:21:05
그의 손가락에는 니코틴이 심하게 배어 있었다. 반년이 조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그의 얼굴은 훨씬 야위고 딱딱해보였다. 눈 밑에는 가끔씩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보기에도 삶에 찌든 이의 모습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반년동안 한 소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소녀를 너무 사랑했기에 감히 자기 사랑을 내밀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는 두려웠다.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형용할 수 없는 무언의 두려움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인생은 이미 그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쳐줬다.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 무언가를 두려워하면 어느새 그 두려움은 또다른 두려움을 먹고자라 그 자체를 잠식해버린다. 적대적인 세계에 등을 돌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세계와 맞서는 것이 낫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였다. 무엇이 그의 사랑을 방해한 걸까?

그와 소녀의 첫만남은 오묘했다. 처음 두 사람의 눈길은 서로 소심하게도 상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사랑보다 고민해야할 것들이 더 많았던 남자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며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소녀 또한 그러한 남자의 행동에 비슷하게 반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소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를 가든 소녀의 자취가 남자의 뒤에 끈질기게 따라 붙었고 남자는 그럴수록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며, 거의 매일을 항상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남자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이라 불렀다. 구더기 무워서 장 못담그냐고, 그 소녀를 잊지 못한다면 어서 빨리 사랑한다 이야기하라고.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고통스러워지는건 너 자신뿐이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대지말고 변명하지말고 일단 저질러보라는 수많은 조언들이 쏟아졌지만 남자에게 그러한 이야기들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작용했다.

그는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남자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소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욕정만이 들끓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 긴 휴가에 해야할 일처럼 노는 것 말고 너와 함께 무얼할지 밤새 고민하고 설레며 손을 잡고, 걷다 잠시 마주친 두 눈에 마음껏 행복하고 싶다. 흘러가는 지금 이 긴 시간보다 분명 너와의 그 찰나의 순간은 평생 가슴에 박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지쳐버렸다. 지나간 사랑 속에 달달함을 이미 맛보았고, 그 끝은 달달함이 아닌 씁쓸함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남자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더 사랑하겠냐 묻고는 선뜻 답을 망설였다. 다만 아직 입안에 남은 달달함 때문일까. 그 아련했던 추억 때문이었을까.

남자의 슬픔은 그가 알았던 그리고 여전히 알고 있는 그런 슬픔으로부터 나왔다. 그의 좌절은 그 자신의 쓰사린 공허에서 기인했다. 남자에게는 항상 절망과 좌절이 찾아들었다. 남자는 또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를 사랑하나? 물론이지, 이상적인 여자야. 어리고, 예쁘고.. 같이 있으면 좋아. 공통점이 있나? …아니. 지적이야? 아니. 너를 이해해줄 수 있어? 아니. 그럼 그 아이가 네게 줄 수 있는거라곤 섹스뿐이 없겠군. 말도 안돼! 난 그녀를 알고 싶어.. 그런데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그걸 놓쳐버렸어! 그게 너무나 끔찍해. 도처에 존재하고 내 주변 어디에나 널려 있고,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뒤로 물러서는 것들.. 세살 짜리 아기도 나보다 더 잘 알고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들보다 내가 더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 왜 난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없는거지? 난 강하고 젊은데,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겠어? 내가 놓치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 종종 날 괴롭혀.. 제발. 날 좀 도와줘.. 왜 나만 이렇게 영혼과 육체 모두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하는거지? 왜 그래야 하냐고. 왜, 왜? 결코 탐닉하지 말아야 할 주인 잘못만난 이 사랑이 문제인건가? 너무나 억눌러서 마침내 육체가 영혼을 완전히 누르게 될 때까지, 그 때까지 나는 고통받아야 하는거야? 왜 그래야 해? 왜 내가 그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남자는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그 누구의 말도 남자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는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독했다. 뜨거운 분노의 눈물은 남자의 영혼을 태워버릴 것만 같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용했을 그 어떤 훌륭한 이론도, 그 어떤 위안의 말도 찾을 수 없었다. 남자의 탁월한 영혼이 육체의 굴레에 속박받고 있었다. 한때는 삶으로 북적거렸지만 이제는 쓸모없이 버려진 쓸쓸한 육체. 그는 이제 이것으로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겐 더 이상의 희망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어떤 방향도 찾지 못했다. 난 그녀를 사랑해. 그럴 리 없어. 그래, 난 그 아이의 육체를 사랑해. 영혼은? 영혼은 육체만큼 중요하지 않아.. 영혼은 영원하지. 영혼을 사랑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육체는 시드는 걸.. 난 결국 그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걸까? 그 어떤 변명과 핑계도 필요치 않아. 그저 지금 중요한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야. 그의 내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이제 남자의 용기와 끈질긴 인내심의 시대는 끝났다. 처량할 정도의 쓸쓸함에서 남자는 마침내 사랑을 수용했다. 남자는 이제 소녀를 가슴 깊이 보고 싶어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껴안고 싶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인내하면서 부드럽게 껴안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심지어 야수처럼 거칠게 다루고 싶은 것이었다. 짐승처럼, 말그대로 짐승처럼!

그는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고개를 감추고 세상을 보려하지 않았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전체가 삶이 되었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물었다. 네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거지? 왜 그렇게 달라진거야? 남자는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일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단 하나 중요한건 지금 이 순간, 난 그녀를 여지껏 사랑해왔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사랑한다는 거야.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어. 그녀와 나,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남가지 않은 채 민들레 홀씨처럼 홀가분하게 떠나갔다. 작별 인사도 없었고 편지 한 장 남겨두지 않았다.


le-suicide.jpg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