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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운동권이 몰락하게 된 두 가지 사건을 직접목격하다.
게시물ID : sisa_10836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래소녀라나
추천 : 15/11
조회수 : 2851회
댓글수 : 23개
등록시간 : 2018/07/08 20:30:39

난 의경이다.

957월에 입대해서 979월에 제대했다.

968월은 첫 휴가이자, 상경 진급 시기였다.

더운 여름에 시위진압과 훈련을 피하고 집에 가서 편하게 보름을 쉬나 했는데...

 

연세대에서 한총련 범민족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연세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터미널, 역에서 검문검색을 했다.

연세대 정문에서 사수대와 의경중대가 맞붙었다.

초반에는 서로 기 싸움을 한다.

사수대는 쇠파이프를 일정한 속도로 땅에 찍는다.

이에 맞서 우리는 방패와 군화로 일정한 구호에 맞춰 누른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앞서지만, 내가 다치면 안 되고, 분대, 소대, 중대원이 다치면 안 된다.

특히 신병이나 경험이 적은 후임병을 잘 챙겨야 한다.

대열을 벗어날 수 있고 지레 겁을 먹으면 중대 자체가 전멸 된다.

화염병, 돌멩이, 쇠파이프에 우리는 맞섰다.

대학생의 형태에 따라 우리의 대형이 바뀐다.

그렇게 저녁 늦게까지 시위는 계속 됐다.

큰 사고 없이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평소때 방패조 였고, 윗 지시가 내려오면 청바지에 간편진압복을 입었다.

일명 백골단으로 불리는 사복체포조도 했었다.

경찰직원으로 이루어진 사복체포중대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경이었다.

 

그 다음날 갑자기 진압과 학내 진입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대학 주변에서 진압을 해도 학내 진입은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은 연세대 정문을 바리게이트 삼아 농구장 골대, 축구장 골대, 기타 집기로 막아버렸다.

사람의 힘으로 뚫긴 싶지가 않았다.

몇 시간 후 불도저가 왔다.

불도저는 대학 정문을 순식간에 뚫어 버렸다.

우린 뒤에서 불도저를 엄호 하면서 뒤 따랐다.

뒤에선 가스차가 최루탄을 쏘면서 우리를 엄호했다.

쇠파이프를 든 대학생과 싸웠다.

서로 밀리면 죽는다.

대열을 이탈해도 죽는다.

대열에서 이탈된 의경이 대학생한테 끌려가서 죽도록 맞기도 하고, 검거된 대학생은 의경한테 죽도록 맞는다.

그렇게 우린 연세대 정문을 지나 앞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고 부대로 복귀 하는 줄 알았는데, 연세대에서 숙식 하라는 거였다.

방패와 진압복을 이불삼아 덮고 땅 바닥에서 잤다.

세수는 엄두도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연세대 잔디밭, 운동장에서 잤다.

 

잔디밭에서 소대장에게 상경 신고식을 했다.

내 생애 첫 상경 신고식을 부대가 아닌 대학 캠퍼스에서 신고를 하다니...

하늘에는 헬기가 날라 다니고 최루탄을 뿌렸다.

신빙성은 없지만 소대장님이 하루에 최루탄을 20억 가량 쓴다고 하더라.

학교 주변은 온통 쓰레기와 종이로 인해 헬기가 날면 모두 날라 다녔다.

밤에는 연세대 뒤쪽 산에 올랐다.

가스 차에 쏘는 다연발탄을 사람이 등에 지고 올랐다.

가스차가 산에 올라 갈 수 없으니...

소대에 2개씩 가지고 올랐고, 산 위에서 쐈다.

대학생들은 궁지에 몰려 과학관에 마지막 농성을 시작했다.

단전과 단수를 해버렸다.

과학관에 진압하던 중 옥상에서 던진 보드블럭에 의경이 맞았다.

피를 흘렸다.

난 근처에 있어서 모든 걸 지켜봤다.

엠블란스에 실려 가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일선 지휘관과 의경들은 눈이 확 돌았다.

대학생들 나한테 걸리면 죽는다는 식이였다.

대학생을 검거 하고 시위는 끝이 났다.

일주일 만에 부대 복귀였다.

차에 올라타자, 무전기에서 청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단 한마디 대단히 수고 많았다였다.

부대 복귀하는 시간에 우린 녹초가 되어 잤다.

뒷날 하루 휴무가 주어졌다.

서초역 근처 목욕탕에 단체로 목욕도 했다.

1년 후에 청장은 국정원 차장으로 진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씁쓸하다.

누굴 위한 진압이었을까...

 

975월 한양대에서 한총련 출범식을 개최하기로 했는데, 정부에서 불허하고 봉쇄했다.

연세대는 대학정문이 대로로 이어지지만 한양대는 여러 작은 문이 많은 게 특징이었다.대학 주변을 둘러쌓고, 검문검색이 시작됐다.

우리 중대는 성동교 밑 국제관 골목길을 차단 한 채 대학생들과 대치했다.

위치가 별로 좋지 않았다.

비탈길이었고, 우리가 비탈길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상당히 위험한 위치였다.

소대장에게 건의했다.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소대장은 경비 전문가가 아니었다.

형사계에 있다가, 승진시험을 보기 위해 소위 스펙 쌓으러 온 거였다.

현장시위에서는 지휘관은 뒤로 빠진다.

경험 많은 고참이 선봉을 서고 소대, 중대를 지휘한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소대장은 고참을 무시했고, 직접 지휘까지 했다.

 

작은 시위가 오고 갔다.

한번은 돌을 던지고, 한번은 화염병을 던졌다.

사수대가 나와서 쇠파이프를 들고 우리랑 맞붙었다.

사수대와 대치하다 싸우는 중 자대배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임이 대열에서 이탈했고, 넘어지기 까지 했다.

중대 대열은 뒤로 물러나는 중이 이었고, 후임은 홀로 앞으로 넘어졌다.

대학생들이 몰려와서 쇠파이프로 집단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결단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는 간이방패, 방범봉, 간이소화기와 최루탄 5개 이었다.

사과탄2, 지랄탄2, 일반최루탄1개를 가지고 있었다.

최루탄 5개 모두 안전핀을 뽑고 대학생 주변에 던졌다.

대학생들이 최루탄에 놀라 뒤로 약간 물러났다.

기회다 싶어 후임 목덜미를 잡았다.

그러고 약 10m 뒤로 끌고 나왔다.

후임은 거구였다.

키가 185cm에 몸무게가 100kg을 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이런 힘이 있었나 싶다.

그렇게 해서 중대 대열에 합류시켰다.

후임에게 다친 거 없냐고 물었다.

후임은 어리둥절했고, 방패로 온 몸을 막아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내게 보고했다.

다행이다.

그 일 있고 한 달 후에 후임 아버지가 면회 오셔서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이때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시위가 오고 갔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대학생들의 기만전술에 속은 거였다.

갑자기 저 멀리 100m에서 불을 지르고 화염병을 들고 대학생 100여명이 물밀려들 듯이 내려왔다.

보통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뒤로 빠지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화염병을 던지면서 사수대와 대학생들이 같이 내려온 것이다.

화염병을 던지면 대열은 산개해야 하는데 좁은 골목길에 그 많은 의경이 산개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했다.

집단으로 뒤로 밀려나면서 국제관, 토건관, 재성토목관으로 순식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뒤로는 중랑천이 있다.

배수의 진이었다.

우리는 갈 때가 없었다.

결국 언덕과 강변도로 사이의 비탈길에 굴러 떨어졌다.

타 중대 몇 백 명과 함께 떨어졌다.

대학생과 직접적인 부상이 아닌 뒤로 밀리면서 우리끼리 엉켜버렸다.

중대 부상자가 속출했다.

우리중대 진압인원이 120명인데 70여명의 크고 작은 부상이 발생했고, 소대는 27명이 다쳤다.

입원하는 사람도 발생했고, 갈비뼈가 나가는 큰 부상도 발생했다.

나도 이때 오른쪽 종아리에 화염병을 맞았다.

20년이 지났지만, 지금은 작아져서 500원 동전크기의 화상흉터가 남아있다.

이때 과학기술관 쪽에는 가스차가 있었는데 시위대를 보고 급한 나머지 뒤로 후진하다 의경을 깔고 지나는 사건도 발생했다.

결국 의경은 사망했다.

 

또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진 한양대내에서 폭력으로 인한 민간인이 사망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출범식은 끝이 났고, 우리는 부대로 복귀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의 본 취지와 멀어지게 되었고, 민심도 이탈했다.

학생운동의 끝이 되어 버렸다.

 

연세대 과학관 사건과 한양대 사건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성공은 부각되고, 실패는 덮는다.

난 의경으로 본 걸 말하는 거다.

난 정부 쪽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생을 응원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건으로 의경이 죽었다.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잊혀진 사건이다.

난 아직도 그날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의경은 군인신분으로 행정부소속 경찰청에 위탁된 사람이다.

명령에 따르고 명령에 산다.

시위진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혹한 훈련이 주어지고, 고참들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시작된다.

맞지 않고, 점호 이후 편하게 하루를 자기 위해 그렇게 명령이 주어지면 막고 또 막았다.

의경도 사람이다.

20대 초반 청춘이었고, 대학생이었다.

내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거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한 대학생을 폄훼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여담이지만 대학생 시위를 진압하면서 대학기숙사 시절 룸메이트도 만났다.

난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있어 그 친구는 날 알아채지 못했다.

그 친구는 제주도에서 왔고, 학생운동 동아리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주4·3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나 추측 해 한다.

지금 같은 하늘아래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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