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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6월10일> 파쇼정권에 살해당한 동지의 복수를 다짐하다
게시물ID : panic_988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빛나는길
추천 : 2
조회수 : 5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7/11 16: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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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파쇼정권에 살해당한 동지의 복수를 다짐하다.
 
 

1986, 을씨년 스러운 한해도 이제 달력 한 장 남았다. 년말 12,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가 설치되고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이지만 연말 분위기에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명기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들이 즐비한 을지로 3가 환한 거리를 이정훈이 걷다가 미행이 붙은 걸 눈치챈다. 그래서 보행 속도를 줄이며 상황을 판단한다.
적들은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모른다. 가두시위 전술 택을 짜는 나는 서울 시내 지역을 택시기사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다
이정훈이 미행을 따돌릴 방법을 생각하며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세운상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형사들의 추적에서 벗어날 최적의 장소는 바로 여기다.
청계천 세운상가는 외부 계단으로 해서 2층에 올라갈 수 있는 독특한 건물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2층으로 올라서면 누가 따라오는지 알 수 있다
이정훈이 청계천 세운상가 건물 양 끝에 설치되어있는 시멘트 계단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슬쩍 내려다 보니 형사 두 명이 어슬렁 거린다.
역시 곰들* 이 붙었군. 이 계단은 천국으로 가는 Stairway To Heaven이야.’
 

- : 형사를 비유하는 은어
 

이정훈은 예전 청계천 가두시위 택을 짤 때, 소아마비 시위 주동자와 여기 계단을 보며 얘기했던 걸 떠올린다. 여기가 레드 제플린의 노래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이라고...... 미행 형사들과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이정훈이 세운상가 공중보도인 구름다리를 향해 걷는다.
구름다리라 부르는 이곳은 불법 복제음반을 파느라 사람들이 득실거린다. 이제 빽판을 고르는 척하다가 도망가면 된다.’
이정훈이 사람들 틈에 섞여 불법복제음반인 빽판을 고르는 척하자, 미행하는 형사 둘은 멀찍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한다. 이때 불법으로 노상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속칭 삐끼가 이정훈에게 접근한다.
손님, 신품으로 좋은 거 나왔는데, 오케이?”
포르노 테이프를 사라는 것이다. 그런 삐끼를 보면서 이정훈이 좋은 꾀를 생각해낸다.
제 뒤쪽 전봇대 앞에 남자 두 명 보이죠? 그 사람들이 포르노 테이프 사러왔다고 하던데요.”
, 그래요? 감사합니다.”
삐끼가 이정훈의 말을 믿고 형사들에게 다가간다. 두툼한 파커를 입고 곰처럼 서 있는 형사 두명에게 삐끼가 다정히 팔짱을 낀다.
아저씨, 테이프 사러 왔죠? 저 따라 오세요.”
그러다 보니 삐끼가 형사들의 시야를 막고 있다.
, 비켜, 미친 새끼야!”
뭐어? 미친 새끼? , 씨발 왜 반말을 하고 지랄이야?!”
이 새끼가 뒤지려고 환장했나, 너 지금 공무집행 방해하고 있어! 빨리 꺼져
삐끼가 형사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대형 중고 냉장고를 실어 나르는 리어카가 그들의 앞을 통과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정훈이 세운상가 건물 안으로 잽싸게 몸을 피한다. 그리고 그 건물 아래층에 있는 아세아 극장 안으로 티켓을 끊고 후다닥 들어간다. 형사들이 그제야 이정훈이 사라진 것을 알아 챈다. 이정훈이 한숨 돌리며 상영관 의자에 앉는다. 영화제목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마침 겨울 나그네영화를 하고 있다. 예전 충무로 대한극장 앞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과 이정훈이 보려고 했던 바로 그 영화다.
- 정훈아, 니가 겨울 나그네 영화 보고 나서 나한테 스토리 얘기해주라.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는 시위 주동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정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래, 빵에서 나오면 내가 꼭 얘기해줄게.’
이정훈은 피 말리는 수배상태에서 오랜만에 느긋함에 젖는다. 영화를 몇 분 보다가 피말리는 도피 생활의 피곤함에 스르르 잠이 든다.
거의 2시간이 지난 후 이정훈이 극장에서 나온다. 형사들이 자기를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세운상가 1층으로 내려간다. 냉장고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세운상가 복도에 켜져 있는 수많은 텔레비전에서 KBS 9시 뉴스가 나오고 있다. 뉴스를 알리는 음악 시그널이 나오고 첫 번째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보도에 무시무시한 배경 음악까지 깔린다. 앵커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 나서 첫 뉴스를 시작한다.
어제 저녁 10시경,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학생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자는 서울대 영문학과 3학년 김영철 군으로 지난주 발생한 가리봉 오거리 폭력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 중인 서울대생 이정훈의 행방을 묻던 중, 경찰이 책상을 탁하고 치자, 김영철 군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경찰은 사망원인을 심장마비로 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된 김영철 사망이 소식에 이정훈의 머리가 텅 비어 버린다. 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던 행인이 이정훈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정훈이 근처 화장실로 들어간다. 화장실로 들어간 이정훈이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의 물을 내린다. 물 내려가는 소리에 엉엉 운다. 이를 악물고 엉엉 운다. 콧물, 눈물까지 흘러내린다.
그 다음 날,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 대자보에는 김영철 사망 소식을 알리는 내용이 붙어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 대자보를 읽고 있다. 그 시간 법학과 사무실에서는 경찰의 프락치인 법학과 조교가 교수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석사 학위 논문이 통과된 것이다.
논문 통과 축하해.”
감사합니다. 교수님.”
내년에 미국 유학도 간다면서?”
······.”
조교에게는 더없이 기쁜 날이지만 그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멍하다. 환청처럼 김영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전, 교수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김영철이 조교에게 했던 말이다.
- 조교님, 고맙습니다. 다음에 꼭 이 돈 갚겠습니다.
조교가 얼이 빠진 채 중얼거린다.
영철아, 안 갚아도 돼.”
- 아닙니다. 꼭 갚을 날이 올 겁니다.
그날 밤, 신촌에 위치한 디스코텍 우산속입구를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 캐주얼 차림의
날라리 복장을 한 이정훈이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디스코텍을 구경한다. 여기를 찾아온 이유는 조직의 비밀 아지트가 경찰에 적발될 경우,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일 후 저녁 9시에 여기서 만나기로 이정훈이 후배들과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김영철도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원했던 답을 김영철이 끝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수배 자들이 디스코텍에서 회합하리라 경찰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이야기하기에도 좋았다.
디스코텍이 처음이라 두리번거리는 이정훈에게 웨이터가 다가온다. 귀를 찢는 굉음의 음악 소리와 함께 아는 웨이터 있냐?”는 질문에 이어 이정훈은 홀 구석 테이블에 앉는다. 하루 24시간 신경이 곤두서는 수배 생활이라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이정훈의 눈꺼풀이 처지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이때 잠실 연립주택 비밀 아지트에서 저녁 6시만 되면 들려오던 그 팝송이 흘러나온다. 그 음악에 이정훈의 눈이 번쩍 뜨인다. DJ가 음악을 소개하는 무대 위에서 스모그 안개가 뿜어져 나오며 김영철이 그 사이에서 걸어나온다.. 이정훈이 손을 번쩍 들어 김영철을 반긴다.
영철아!”
김영철이 이정훈 옆에 앉는다.
영철아, 여기 디스코텍 알려주지 왜 버틴 거야?”
버티는 게 원칙이잖아요. ,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까요? 아마도 내일이 없다면 오늘 우리가 여기 있지 않을 거예요. 대학 입학하고 디스코텍도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되네요.”
김영철이 신기한 듯 디스코텍 내부를 살피는데 천장에 설치된 현란한 사이키델릭 조명 불빛이 들어온다. 이정훈도 잠시 눈이 안 보였다가 눈을 뜨는데 김영철이 보이지 않는다. 디스코텍 DJ가 비밀 아지트에서 저녁 6시마다 들려오던 팝송의 제목을 말해준다.
오늘 우산 속 나이트를 찾아주신 레이디스 앤 젠틀맨에게 선사하는 뮤직은 발티모라의 타잔보이입니다.”
디스코텍 디제이의 멘트에 이어 노래가 스피커를 빵빵 치면서 나온다. 노래 제목을 마침내 알아냈다. 그런데 이정훈은 왠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이다. 이정훈이 비통한 심정으로 중얼거린다.
영철아, 이 노래 제목이 타잔보이래, 타잔보이!”
시간에 맞춰 후배들이 모두 모였다. 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미국 대사관 점거 농성에 대해 회의를 시작 한다. 음악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 서로 귀에 대고 얘기를 한다.
소방차 몰 줄 아는 사람이 영철이 밖에 없는데 정훈이형 어떻게 하죠? 그나마 운전할 줄 아는 호은이는 감옥에 있고요
찾아보자고. 영철이의 죽음으로 민중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는 지금, 우리가 파쇼정권의 마지막 남은 숨통을 끊어야 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맥주를 이정훈이 후배들 잔에 따라준다. 그리고 비장하게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영철이 죽음에 이제 우리가 아니 내가 답할 시간이 왔어. 한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것에 기꺼이 동의한 우리의 동지 영철이의 꿈을 우리가 꼭 실현하자!”
모두가 잔을 부딪친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광란의 밤을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정훈과 후배들은 혁명이라는 방식으로 사회변혁의 꿈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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