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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소설 부녀전(腐女傳)-1 가독성 업글 버전
게시물ID : readers_144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랫파이
추천 : 1
조회수 : 5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10 03:00:43

금이는 언문을 싫어했다.

 

훈민정음이라 함은 일찍이 선왕이신 세종께서 백성들을 위해 창제하신 글자로 아녀자와 노비들도 쉽게 글을 익힘으로서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려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글자라고 평소 선왕을 존경하시던 금이의 아버지그러니까 대감마님은 귀에 먹물이 배도록 금이에게 일러주었지만금이는 종년들과 집안의 아녀자들을 모아서 글을 배우는 시간에도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금이야아어디있어어어어-” 


계곡에서 금이의 붕우인 비애가 애타게 금이를 찾고 있었다비애의 목소리를 들은 금이는 그제서야 돌 틈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부루퉁한 표정은 그녀의 붕우를 그리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금이야어서 어머니에게 가자이번에 또 안보이면 그땐 어머니께서 매를 드신다고 하지 않든?” 비애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휴... 알았어.” 결국 금이는 한숨을 쉬면서 비애를 따라가기로 했다산등성이를 내려가면서 비애는 넌지시 혼잣말하듯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느이 아버님이 얼마나 깨친 사람이니노비와 부녀자들도 글을 배워야 한담서 아예 따로 시간을 마련해 글을 배우게 하다니다른 공맹왈하는 사대부 양반들은 아버님을 이해도 하지 못한다 얘.” 


금이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말도 안돼어째서 아녀자가 글을 배워야 하지글을 배운다 한들 쓸 곳도 없잖아아녀자와 노비가 글을 읽을 수 있다 한들 애초에 사대부가 쓰는 한문과 전혀 다를뿐더러 글을 깨친다한들 출세의 기회는 여전히 막혀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 아니니?” 


비애는 약간 말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도... 언문이 퍼지니까 무지렁이 백성들도 어명과 관아의 백도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야담들도 언문으로 책이 나오니 무료할 때 읽을 수도 있잖니” 


그래봤자 도색소설만 저잣거리에 주구장창 나오는 걸 내가 몰라서 그래?” “...그건....” 비애가 미처 입을 열기전에 저 멀리서 하얀 도포와 쾌자를 걸친 훤칠한 도령과 앳된 얼굴을 한 소년 하인이 둘에게 다가왔다.


 “금이야또 몰래 빠져나와 놀러 나왔구나.” 


기우 오라버니는 아녀자들의 일에 관여하지 마시지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는 기우 오라버니에게 금이는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금이야기우 오라버니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니?”


 “하하하 괜찮소비애 낭자내 이럴 줄 알고 집밖을 나서기 전에 금이에게 관아 구경을 시켜준다고 아버님과 어머님께 미리 언질을 드렸습니다하지만 금이야어머니께서 이 일을 아시면 필시 매를 드실거다이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용서를 구해보렴.”


“...알았어요 오라버니그렇게 할게요.” 여동생이 대들어도 빙긋 웃으면서 말하는 기우에게 조금 미안했는지 금이는 꼬리를 내렸다


그럼 나는 관아에 볼일이 있어 먼저 가마가자 반자야.” 금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반자와 함께 유유히 관아로 발걸음을 돌리는 기우의 모습을 비애는 꿈꾸듯 바라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금이는 장난스레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얏금이야 너어?!” “흐흥아무리 너희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이 너와 오라버니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해도 너무 빤히 바라보는 거 아니니이러다가 혼인도 하기전에 오라버니 얼굴이 닳아버려서 혼례 땐 달걀귀신 신랑을 보겠구나?” 


...그런가헤헤...” 비애는 얼굴이 새빨개져 딴소리를 늘어놓았다왠지 안심이 되었다는 표정이 비애의 얼굴에 스쳐나가 이상한 기분이 든 금이였으나 그래도 비애를 골려먹는 게 재밌어 이내 그 표정은 잊어버렸다.


그렇게 두 소녀는 재잘재잘 떠들면서 집에 도착했지만그 곳에서 그들이 본 건 회초리를 들고 대청마루에 오호대장군마냥 서 있는 금이 어머니마님의 모습이었다


금이야관아에는 잘 갔다 왔느냐?”분명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을진대 그 얼굴이 치우천왕처럼 무서운 어머니의 모습에 금이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 어머니......” “아직까진 가내외인인 비애도 우리 집에 매번 방문하여 언문을 배우는데 너는 어찌하여...!” 결국 그날 금이의 종아리엔 불이 났다.


그래도 그렇게 많이 혼나진 않았지?” 그날 저녁 아얏 하는 금이의 비명을 무시하고 명나라에서 온 연고를 살살 발라주며 비애가 말했다


우우.... 그래도 너무 아프단 말이야...”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금이는 부루퉁하게 비애를 바라보다 비애가 가져온 책꾸러미에 눈길이 갔다.


 “비애는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구나.” “헤헤네 말대로 양반댁 부녀자가 언문을 배워도 할 수 있는게 이런 것밖엔 없잖니나는 말야언문을 다 배우면 언문으로 된 책들을 많이많이 베껴 써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설들을 읽게 할 거야.”


 “흐음그러니까 아버님이 어명을 받들어 한문으로 된 책들을 언문으로 번역해 쓰시니 너는 우리 집으로 시집오면 그걸 많이 만들어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거구나우리 집안과의 미래까지 생각하다니 요 요망한 기집애.”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또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비애를 금이는 에잇 하며 밀쳐냈다곧 방 안엔 소녀들의 까르륵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한참을 그렇게 놀던 금이는 문득 다시 책꾸러미에 눈길이 갔다.


 “근데 저 책들은 무슨 책이니나도 한 번 봐도 될까?” 이제까지 깔깔거리며 즐거운 표정을 하던 비애의 얼굴이 일순간 새하얘졌다.


 “...안돼...책꾸러미가 매듭이 단단하게 맺혀져서 풀면 쏟아질거야!” “에이쏟아지면 다시 묶으면 되지.아니면 뭐야혹시 도색소설이 섞인 책꾸러미 아냐?” “...아니라니까!” 


이제는 얼굴이 새파래지기까지 한 비애의 필사적인 책꾸러미 사수에도 불구하고 금이는 기어코 책꾸러미의 매듭을 풀어버렸다이내 와르르 무너지는 책들그리고 그 책무덤을 뒤적이는 금이의 모습을 비애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뭐야소학과 사서삼경죄다 아버지가 언문으로 번역하신 책들이잖아이런 걸 왜 이렇게 못 보게 막은 거야이런 건 나도 다 읽었다고.”


 “그래아하하... ...금이가 이미 읽은 것들이니까 그러니까 풀면 다시 묶어야 하니까....” 


에이알았어책꾸러미 매듭을 푼 건 미안해다시 같이 묶자.” 그렇게 주섬주섬 책들을 집던 금이는 책더미 속에서 못 보던 빨간 표지의 책을 보았다 ‘...후파산전(後破山傳)? 이건 뭐지?’


 잠깐 책을 살펴본 금이는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설마... 도색소설헤에비애 요 기집애겉으론 얌전한 척 하더니... 좋아이런 건 내가 읽어야지’ 그렇게 몰래 후파산전을 이불 밑에 집어넣은 금이는 모르는 척 다시 책꾸러미를 묶어주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이제 집으로 갈게내일 봐 금이야내일은 언문수업 빼먹지 말고.” “알았어잘 가 비애야.” 자기 키보다 더 큰 책꾸러미를 등에 진 채 비애는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비애와의 거리가 적당히 멀어지는 걸 본 금이는 냅다 방 안의 문과 창문들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후파산전을 꺼냈다


흐응후파산전뒤가 깨진 산이라... 뭔가 야릇하기도 한건가..?’ 사실 도색소설은 저잣거리에서만 뜬소문으로 들었지 실제론 본 적이 없었던 금이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채 책의 앞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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