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임.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책에 독을 발라둠.)
그리이스인에게 비극은 인생을 조망하는 드라마였었음. 신이 부과한 운명에 대응하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과 그 숙명을 보여주는 거임.
비극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하며 신에 의해 연장이 된 중세라는 세계관 속에 계속 그 의의를 가지는 거였었음.
그런데 희극은?
호르헤 사서는 '신은 웃지 않았다'는 말로 일축하며 그 존재 의의를 가리려 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쉽게 말해서 비극의 작법에 대한 책이라고 함. 그러기위해 비극의 요소를 추려야 했었고 당시 철학의 방법이었던 일반적인 진리를 통해 연역을 해야 했었음.
같은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론을 작성했다고 가정하면 이 책이 발간되었을 적 현실속에서는 어떤 비극이 발생했을지를 유추할 수 있음.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론을 저술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상황에서 웃기는 지를 정리해서 개념화 시켜놓음.
이 책이 그리스에서 필사로 전파되고 있을 무렵.
희극 배우가 대본가를 고용하고 야외 극장을 임대해서 공연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나오는 이러한 방식으로 웃기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왜 웃기는 지에 대해 설명하는 이가 나타남.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읽은 이들이 나타나 설명을 해버린 공연은 여지없이 망함. 게다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희극적 상황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설명함을 자랑스레 여기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함. 곧이어 일상에서 이들의 설명에 괴로워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충'이라고 부름.
이에 관객들과 희극공연 배우, 그리고 당대 그리이스 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서 항의하고 절판을 위해 재판을 검.
재판 결과 희극론은 금서가 되었으며 희극적 상황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됨.
당시의 재판 결과가 필사본으로 남아있었고 희극론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은 재앙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호르헤 사서가 하고 있었던거임.
최근에 이런 흐름이 포착됨.
왜 웃기는 상황인지에 대한 설명을 함으로써 김을 빼버리는 설명충 개그가 그런 종류임.
이들은 세상의 모든 희극적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희극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프로젝트를 구상함.
여기까지는 그냥 되는대로 지껄인 내용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는 말은 유래가 그다지 깊지 않음.(검색해보면 찰리채플린이 죽었을 때 어느 신문이 내놓은 논평이라고 함)
희극 자체가 인류사에서 인생을 조망하고 반영하는 역할을 한 지가 얼마되지 않은 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