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택’을 짜지 않는다.
이정훈의 시위전술 ‘택’에 따라 시위를 주동했던 시위주동자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비상이 걸렸다. 교도소 감방 문을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발로 차고 있다.
“이정훈 열사의 피의 대가 쟁취하자!”
미국 대사관에서 분신자살한 이정훈의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가리봉 오거리 시위를 주동한 노동자, 대한극장 앞에서 시위주동을 한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학생, 남대문시장 시위를 주동했던 의학과 학생, 청량리 로터리 시위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시위 주동자, 세운상가 시위를 주동한 소아마비 주동자 그리고 신설동 로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이화여대 시위주동 학생들이 교도소에서 옥중투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청량리 시위 주동자는 식사 뿐만 아니라 물조차 거부하며 오열하고 있다.
“정훈아, 내가 석방되면 니가 김형곤 흉내 내주겠다고 약속 했잖아. 그런데 죽기는 왜 죽어”
이정훈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수감 중인 학생들이 감방문을 차대자 이에 일반 잡범들까지 동조한다. 교도관과 교도대원들이 일반 잡범들 뿐만 아니라 조직폭력배까지 감방 문을 부서져라 차대자 섣불리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
이화여대 시위주동자가 감방 안에서 카랑카랑하게 구호를 외친다.
“이정훈 열사의 피의 대가 쟁취하자!”
이에 수감 중인 학생, 잡범 재소자들도 따라 외친다. ‘쟁취하자!’의 격렬한 구호가 교도소 복도를 따라 흘러나온다. 이화여대 시위주동자가 신설동 가두시위에서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다리를 절뚝이며 감방문을 발로 힘껏 걷어찬다.
“이정훈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파쇼정권 타도하고 민중공화국 수립하자!”
그리고는 이화여대 시위주동자가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한다. 서울대학교 입학식 때 이정훈과 신림동 중국집에서 만난 의학과 시위주동자 박창식이 운동가요를 나지막하게 부르기 시작한다.
-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 간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내 맘속에 영혼으로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혼자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합창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통곡이 되었다. 교도대원들 중 몇 명은 상관 눈치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이정훈 학생의 분신자살 소식이 전해진 가리봉 오거리, 이정훈의 8월 15일 노학연대 투쟁 가두시위 때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공장들 건물 밖으로 검은 만장이 걸려있다.
- 노동자의 영원한 벗, 이정훈 열사의 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
이 시간, 명동 YWCA 건물 앞에 신문, 방송 취재차량이 몰려와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조교가 이 건물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있다. 조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고백을 한다.
“저는 그동안 치안본부 대공과의 프락치로 활동하며 후배 김영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뿐만 아니라 분신자살한 이정훈의 행방을 그들에게 보고하면서······. ”
조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인다.
이정훈의 죽음 이후 학생운동세력들은 더 이상 거리 시위 전술, 택을 짜지 않는다.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과 자기희생의 모습을 목격한 시민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서섰다. 그리고 그들이 발붙여 사는 생활터전에서 동료들과 시위전술 ‘택’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1987년 6월 항쟁이다.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발표에 분노한 시민들이 명동 일대에 모였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까지 힘을 합해 시위를 벌였다. 장사를 포기하고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학생들에게 보도블록을 깨서 돌멩이를 전달해주고 있다. 그토록 시위가 벌어지지 않던 강남 지역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도 시민들이 반정부 구호를 학생들과 함께 외치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 참여에 전투경찰, 사복 체포조들은 속수무책으로 거리에서 무장해제당하고 있다.
마침내 민중들의 투쟁에 겁먹은 전두환이 1987년 6월 29일에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고 항복을 한다. 그러나 민중들의 혁명의지가 ‘직선제’라는 개량적 슬로건에 가라 앉는다. 김영철, 이정훈 열사가 그렇게도 바라던 파쇼정권의 완전한 타도 후에 민중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새로운 사회, 민중공화국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 계급은 1987년 7월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 역사의 주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포크레인, 지게차 등을 앞세우고 거리 시위를 벌인다. 마산과 창원에서도 거대한 노동자 시위대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리봉 오거리에서도 노동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파쇼정권의 하수인 전투경찰들과의 싸움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노동해방 쟁취’ 머리띠를 두른 김용수가 스크럼 대열 한 가운데 서 있다. 노동자들이 형성한 시위대열 위로 붉은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김영철, 이정훈 등 수많은 대학생이 죽음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갈망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전두환 이후 대통령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가 차례로 취임했지만, 민중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민중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집회 신청 하러 왔습니다.”
2016년 봄, 아직은 쌀쌀한 겨울 기운이 남아있다. 민원인들이 ‘서울광장 집회신청’을 하기 위해 서울 시청 시설관리과를 방문했다. 집회신청을 접수받고 있는 50대 초반의 여자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신청서를 내준다.
“여기에 집회명 등을 작성해서 주세요.”
민원인이 신청서를 작성해서 그 종이를 공무원에게 내민다. 신청서 내용을 여자 공무원이 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민족민주열사 추모 집회라······.”
점심식사를 마친 여자 공무원이 2층 시청 건물 창가에서 커피를 동료들과 마시고 있다. 시청 앞 광장의 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경찰이 컨테이너 박스를 2층으로 겹겹이 쌓고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 공무원이 한마디 한다.
“저러면 시위대가 택 짜기가 쉽지 않은데······.”
여자 공무원의 말을 들은 후배 남자 공무원이 묻는다.
“택이 뭐에요?”
“택? 택은 택틱스라는 영어단어로 전술이야. 예전 전두환 시절에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시위 전술 택을 잘 짜던 대학생이 있었어.”
“그러면 선배님도 운동권 출신이에요?”
후배의 질문에 여자공무원이 그냥 씨익 웃어만 준다.
“택을 잘 짰다는 그분 지금 뭐 하세요? 국회의원? 아니면 벤처기업 사장님?”
후배의 궁굼함에 말을 아끼던 여자 공무원이 입을 연다. 목소리가 떨린다.
“그 사람 지금 뭐하냐면·····. 우리들 가슴 속에 소중히 있어.”
이 말을 마치고 여자공무원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걸어간다. 목발을 짚고 쩔뚝거리며 걸어간다. 이 여자 공무원이 1986년 신설동 로터리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화여대 시위 주동자다.
이화여대 시위 주동자였던 여자 공무원이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앉아 지갑에서 뭔가를 꺼낸다. 신설동 가두 시위 전날, 이정훈에게 받았던 자기 얼굴이다. 이 그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얼굴 그림이 번져간다. 여자 공무원의 눈물이 그 그림 위에 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민족민주 열사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김영철 열사, 이정훈 열사 사진이 위패처럼 상 위에 올려져 있다. 방송, 신문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김영철 열사의 어머니가 이정훈의 열사의 부모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이때 국회의원 권민수가 최지혜의 아버지를 모시고 나타난다.
“자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귀한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1986년에 제가 시위를 주도했던 미국 대사관 점거 농성 당시, 이정훈 열사가 미국 대사관 건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 안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권민수 의원이 미국 대사관 점거 농성 시위를 마치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포장한다. 기자들을 향해 사진 좀 찍어 달라는 제스처를 잠시 취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 사람이 바로 최지혜라는 서울대 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이정훈 열사의 점거 농성이 있었던 날 실종됐습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이 실종된 딸을 찾으러 30년을 헤매고 있는 최지혜의 아버님이십니다. 여러분, 박수 부탁합니다”
추모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최지혜 아버지를 향해 박수를 친다. 권민수 의원이 의기양양하게 마치 감춰뒀던 비밀을 발표한다.
“최지혜는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이정훈과 저를 비밀리에 돕다가 사라졌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학생운동을 그만둔 것처럼 하고 미국 대사관에 취직을 했던 겁니다. 자, 이제 민주화 운동 보상법에 따라 저의 학생운동 동기였던 최지혜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함께 제가 꿈꿔왔던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제게 힘을 실어주셔야 합니다.”
권민수 의원의 자기 자랑이 끝나자 신문 기자 한 명이 손을 든다.
“그런 중요한 일을 했던 서울대생 최지혜를 진작 의원님이 밝혀주지 왜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려주는 겁니까?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거야, 그 당시 학생운동이 워낙 보안이라서······.”
말문이 막힌 권민수가 말을 얼버무린다. 그런 권민수의 언행을 보던 최지혜의 아버지가 힘겹게 입을 연다.
“저어, 의원님, 의원님 꿈이 뭔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제 딸아이의 꿈을 함부로 말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보상금도 필요 없습니다. 제 딸 지혜가 돈 때문에 학생운동을 했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최지혜 아버지의 일침에 권민수 의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비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최지혜 아버지에게 이정훈 열사의 아버지와 김영철 열사의 어머니가 다가간다.
“저는 이정훈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은 정훈이와 가장 친했던 김영철 열사 어머니이십니다.”
최지혜 아버지가 마침내 자기 딸과 친했던 사람들의 가족을 만났다. 한동안 말이 없던 최지혜 아버지가 들고 있던 가방을 연다. 그 안에서 1986년 비밀 아지트에서 이정훈이 스케치한 최지혜, 김영철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종이를 꺼낸다.
“여기 이 학생이 김영철 맞죠?”
김영철 열사 어머니가 자기 아들 얼굴을 발견하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최지혜 아버지가 김영철 열사 어머니에게 그림을 전해준다. 이정훈 열사의 아버지가 최지혜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아들 대신 사과한다.
“미안합니다. 제 아들 때문에 영철이도 죽고 지혜도 실종되고······.”
“아닙니다. 제가 그때 내 딸 아이를 왜 이해하지 못하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욕했는지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그리고......”
최지혜 아버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진심의 마음을 토해낸다.
“제 딸 아이를 한번만 꼭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내 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해 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고....내 딸 아이 앞에서 무릎이라도 끓고 싶습니다”
최지혜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정훈 열사의 아버지가 최지혜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아준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단체에서 마지막으로 열사 가족들과 함께 ‘벗이여 해방이 온다’라는 노래를 합창으로 불렀다. 최지혜의 아버지는 이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고 가사도 몰랐지만, 끝까지 함께 했다.
- 그 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 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 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둠을 뒤집어 새 날 새 날을 여는구나. 그 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 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각 당 대통령 후보들의 유세 차량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리를 오가며 확성기로 자신을 뽑아달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 간사가 사무실의 한쪽 벽면 ‘실종자’ 사진 액자가 있는 곳에 최지혜 사진을 새롭게 걸고 있다.
- 최지혜, 서울대생 1986년 미국 대사관 근무 중 실종됨
사진을 걸고 난 간사가 한숨을 쉬며 다른 간사에게 이야기 한다.
“후우~ 비밀스럽게 지하활동을 했던 최지혜를 그의 조직 동료인 김영철, 이정훈 열사가 모두 죽는 바람에 묻혀버린걸 아무도 몰랐던 거잖아요?”
“그렇죠.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는데······. 이런 분들이 또 얼마나 많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