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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위키백과
게시물ID : sisa_10949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트낫누오까알
추천 : 4
조회수 : 95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8/19 08:03:20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C%98%81%EA%B8%B8_(%EC%A0%95%EC%B9%98%EC%9D%B8)

송영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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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63년 2월 26일 (55세) (음력)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거주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계양구
본관 여산
학력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경력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대통합민주신당 인천시당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민선 제5대 인천광역시장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배우자 남영신
자녀 1남 1녀
종교 천주교(세례명: 대건 안드레아)[1]
소속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6·17·18·20
정당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인천 계양구 을
웹사이트 송영길 홈페이지

송영길(宋永吉, 음력 1963년 2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변호사, 정치인이다. 제16·17·18·20대 국회의원이며, 민선 5기 인천광역시장을 역임하였다.

생애[편집]

학생·노동운동가 생활[편집]

1984년 송영길은 김영춘, 이정우 등과 함께 연세대학교의 학도호국단을 해체한 후 총학생회장을 학생들이 직선으로 선출하도록 고쳤다. 그는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반군사독재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1985년 구속, 수감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1988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사면 복권됐고, 대학교도 졸업했다.[2]

1984년 12월에 민정당사 점거 농성사건으로 구속된 후 1985년에 석방된 송영길은 인천에 있는 대우자동차 르망공장 건설현장에서 배관용접공 일을 시작했다. 그 외에도 장갑 공장, 가구 공장 등에서 일을 하였고, 1987년에 독일의 인권재단의 도움으로 인천 부평에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열었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노동자들의 인권탄압관련 법률상담, 구제활동과 노동조합 관련 교육, 법적지원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7년부터는 운수노조 노보 상담실장을 하며 택시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1991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택시, 버스, 화물자동차 운전기사 등 운수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들을 전개했다.[3][4]

한편 노동운동을 하던 1987년, 대학생 시절부터 함께한 남영신과 결혼하였다.

인권 변호사 활동[편집]

1990년대 들어 중앙유럽 공산주의권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송영길은 1991년 동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다녀온 송영길은 재야 노동운동보다 제도내 개혁에 뛰어들기로 결심, 1992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택시노련에서는 송영길의 결심에 대한 찬반표결을 결정할 정도로 그의 당시 영향력은 컸다고 전해진다.[5]

1994년, 송영길은 2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1997년에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가 인권변호사로서 지역 운동에 다시 투신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한 것을 비롯, 전국민주택시노련 고문변호사, 인천 계양구 건축분쟁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6][7]

정치활동[편집]

1998년부터는 새정치국민회의 인천시지부 정책실장 겸 고문변호사가 되어 제도권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1999년 6월 3일 국민회의 후보로 199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인천 계양강화갑 국회의원에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안상수 (1946년 5월)(전 인천시장)에 밀려 낙선했다. 1999년 6․3 보궐선거 출마 당시 대우자동차판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부터 사장 전 모씨를 통해 후원금으로 1억원 수수했으나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은 혐의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벌금 1천만원, 추징 1억원을 선고받았다.[8] 송영길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돼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적극 참여했고 2004년 17대 총선 이후에는 당내 재선그룹의 선두주자 역할을 맡았다. 2004년 4월 총선시민연대는 송영길을 공천반대자 명단에 넣고 낙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9] 2008년 18대 총선에서 386 의원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상황에서도 인천 계양을에서 3선에 성공했다. 송영길은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사무총장을 맡아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에 참여했고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1위를 차지, 차세대를 이끌 '386 리더'로 입지를 굳혔으며, 민주당 내 소장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개혁과 미래'를 이끌었다.[10][11]

인천광역시장[편집]

2010년 4월 12일 인천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출마했다며 출마동기를 밝혔다.[12] 수도권 3곳중 서울, 경기지역의 민주당 승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천에서부터 확실한 승리의 바람을 일으켜 서울과 경기의 승리를 이끌고 나아가 정권교체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출마를 선언하면서 중소기업육성 및 구도심과 도심의 균형발전을 통한 일자리 창출, 복지서비스 확충, 교육경쟁력 강화와 친환경무상급식실시 등 대한민국 경제수도 인천을 만들기 위한 인천시장으로서의 포부도 밝혔다.[13]

2010년 6월 2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에 8.3% 앞서 인천시장에 당선되었다.

인천시 부채 해결 노력[편집]

인천시의 실질적인 부채가 11조 7,300억 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취임 첫 해를 맞았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인천시 부채는 7조 5천 억원 규모로 알려졌으나, 이후에 회계방식이 영업부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변경되어 2010년 말 기준으로는 장부상으로 9조 4,550억 원이다. 그런데 감사원에 의해 전임 시정부가 숨겨놓은 빛, 분식결산으로 4,024억원, 인천도시공사에서 검단신도시 관련 지방채를 다른 사업에 쓰면서 발생한 부채(돌려막기) 6,442억원, 도시공사 편법 출자 1조 2,284억원 등 총 2조 2,750억 원이 추가로 밝혀져 실질적인 부채는 11조 7,300억 원이 되었다. [14] 재정난의 주요원인이 되었던 아시안게임의 대회규모를 대폭 축소(6358억원 감축)하였으며[15], 공무원 수당을 삭감하는 등 자구책 노력에 나섰다.[16] 재정난 해소를 위해 인천터미널 부지를 9천 억원에 매각하기도 하였다.[17] 각종 개발사업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추진해, 인천도시공사가 시행하는 10조원 규모의 16개 사업을 취소 또는 축소했으며 송도파크호텔, 영종보금자리, 검단산업단지 등의 자산매각을 실시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2013년에는 인천시 부채가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인천시는 구조조정이 시행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인천시의 부채가 21조에 달했을 것으로 밝혔다.[18]

삼성바이오로직스 유치[편집]

2011년 2월 인천에 삼성바이오 합작사를 유치했다. 5대 신수종 사업 중 하나로 바이오신약 개발 목표를 세운 삼성그룹이 인천 송도에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전담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19]. 플랜트 건설에 1조원, 바이오시밀러 개발사업에 1조원 등 모두 2조원을 인천 송도에 투자하기로 했다.[20] 당초 삼성측은 “송도로 갈 가능성은 1% 정도”라고 밝혔으나, 송 시장은 송도가 바이오테크놀로지(BT)의 메카가 될 것이라는 청사진과 기반시설 등을 가지고 삼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결국 유치를 이뤄낸 것으로 알려졌다.[21]

녹색기후기금(GCF) 유치[편집]

2012년 10월 인천에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유치를 확정했다.[22] GCF는 환경 분야 세계은행(WB)으로 불릴 만큼 중량감이 큰 기구로, 국제기구 불모지인 한국이 독일 등 강대국과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승리자가 됐다. 이 때문에 2012년 국제기구 유치전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꺾고 금메달을 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주재원 500명을 기준으로 연간 3천800억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23]

외국인 직접투자유치[편집]

인천시 외국인 직접투자유치(FDI) 확대 성과를 거뒀다. 2012년 인천시는 경기도를 앞질러 외국인 투자유치 실적 전국 2위를 차지했고 2013년 1분기에는 14억6900만달러로 전국 1위를 기록했다.[24] 송영길 인천시장 취임전인 2009년 인천시의 외국인직접투자(FDI) 수치는 신고액 기준 9억2천만불로 전국시도 중 4위 수준이었으나 2012년 인천시 역사상 사상최대 투자유치액을 기록(34억3천만불)한 이후부터는 전국 2위를 기록했다.[25]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편집]

전국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했다. 2013년 5월 인천시는 오는 2015년까지 간접고용 비정규직 근로자 1131명의 정규직 전환을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앞서 4월 1일에는 인천교통공사가 전국 공기업 중 최초로 민간위탁용역 근로자 265명을 기간제 근로자로 전환한 바 있으며, 이들은 2015년 정규직인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26][27]2013년 하반기에는 정규직 전환대상자 1522명 중 919명의 정규직 전환을 완료했다.[28]

중국 칭화대 유학[편집]

2014년 제6회 인천광역시장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유정복 후보에 1.75%차로 낙선한 후, 중국 칭화대로 1년간 유학을 떠났고[29], 1년 후인 2015년 귀국했다.[30] 10월에는 여의도에 '먹고사는문제 연구소'를 개소해 중국 유학기간 동안 구상한 민생 정책 개발과 함께 정치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거·복지·일자리 정책을 비롯해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31]

제20대 국회의원 시기[편집]

2016년 3월 1일 자신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출마를 선언했다. '험지 출마'를 고려하였으나, 송영길 의원의 만류에도 최원식 의원이 탈당하자 계양을 지역 출마를 결심했다. 출마선언에서 총선 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 도전할 것을 천명하고, 인천 전체 선거에 무한책임을 지며, 인천 정치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32] 2016년 4월 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 계양을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윤형선 후보를 12%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이로서 2010년 인천시장 출마이후 6년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2016년 7월 24일  "강한야당을 만들어 정권교체에 헌신하겠다"며 당대표 경선 출마선언을 했다. [33] 당초 유력 후보로 분류되었으나, 예비 경선에서 탈락 했다. 범주류 후보로 선두그룹으로 분류되던 송영길 후보의 예비경선 탈락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34] 당내에서는 송 후보의 컷오프 이유로 크게 친노(친노무현) 표 분산과 비주류 대표주자를 자처한 이종걸 의원의 막판 출마로 인한 비노(비노무현) 진영 결집, 역선택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35]

2017년 2월 8일 문재인 대선 경선후보의 경선사령탑인 총괄선대본부장에 임명됐다. 문재인 전 대표가 삼고초려를 통해 송영길 의원을 영입했다고 알려졌으며, 송 의원은 "경선출마 여부도 고민했지만 문 후보를 통해 정권교체의 희망을 이루는데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며 "문 후보를 도와 대한민국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36]

이후 2018년에는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이해찬김진표 후보와 함께 본선에 진출했다.

주요 활동[편집]

역사 바로 잡기 운동[편집]

송영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 사과하지 않고, 왜곡된 역사 교과서 편찬과 독도 망언을 하자 국회차원의 일본교과서왜곡시정대책특위 활동을 통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와 식민지잔재 청산문제에 대해 동료의원들과 함께 결의안을 내고, 정부의 즉각적인 대처를 요구하였다.[37] 그는 특위를 통해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과 군대 위안부 만행, 역사 왜곡 문제를 폭로하는 내용이 담긴 CD를 해외 600여 곳에 발송하여 일본이 한국 및 과거 역사의 아픔을 겪었던 기타 국가에 대한 반성과 전 세계적 동참을 촉구하였다. 그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 이외에 한일의원연맹 합동총회에 참석하여 향후 한일간 새로운 동반자로서 문화를 비롯한 다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제안하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미래지향적인 파트너십을 함께 강조하였다.[출처 필요]

국내·외 인권 활동[편집]

변호사였던 그는 국회에 들어와 첫 상임위로 법제사법위원회로 지원하였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몽골에서 열린 동북아 5개국 인권·의회 회의에 한국의회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알리고 반인도 범죄에 관한 법을 입법청원하였다. 국회 법사위원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법안 마련에 참여하였다. 2009년에 발생한 용산참사 관련 민주당 대책위원장을 맡아 정부와 서울시를 상대로 오랜시간 지연된 장례절차 및 유가족 보상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38][39]

이라크 반전․평화 운동[편집]

송영길은 정부가 한미동맹을 고려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독자적인 의원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이라크 현황에 대한 파악을 시작으로 부시 미행정부의 대이라크 전쟁 반대성명서 및 결의안을 작성하여 국내․외 동참을 호소하였다.[40][41] 그 후 송영길 의원이 단장을 맡은 국회 이라크 현지조사단원을 꾸려 이라크 방문을 결정하였다.[42] 그를 비롯한 조사단원들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없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전하였다.[43]

버마 민주화 운동 지지[편집]

2007년, 그는 80년대 독재정권 시절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노력했던 동료의원들 13명과 함께 버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내용의 결의안 공동 발의하고, 성금을 모아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에 전달했다. 2008년 10월, 민주당을 중심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13년째 연금 상황에 처해있는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해제 촉구와 불의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버마 민주시민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국회의원 35명의 명의로 반기문 UN사무총장과 버마 군사정부에게 민주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 버마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전했다.[44] 인천시장으로 당선된 후인 2011년에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산 수치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민주주의를 향한 헌신과 정복되지 않는 고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2014년 아시안 게임 방문을 요청하기로 했다.[45]

남북 교류 및 협력 추진[편집]

송영길 의원은 남북문제에 관한 의정활동에서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북핵문제 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지속적인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북한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북한 경제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등 북한 내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46]

송영길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이자 북한의 자발적 경제 자생, 그리고 한반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개성공단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국 중소기업의 활로 개척에 구심점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업관계자 및 정부 측과 함께 토론회를 개최하여 북측에 더 많은 기업이 진출하여 북한의 자발적인 개혁, 개방을 유도하면서 함께 상생․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47]

현 정부의 대북강경책으로 인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송영길 의원과 민주당은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48] 6.15, 10.4공동선언 이행을 정부에 촉구하고, 북한과의 직접대화와 6자회담이 동북아 안보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변국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추진해야 함을 주장하는 등 남북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49]

2010년 인천시장으로 당선된 후 남북화해와 교류, 평화와 통일의 전진기지 역할을 자임해온 송영길시장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서해5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남북평화재단과의 협약을 통해 북한 평양산원의 산모, 영유아들에게 물품을 지원함으로써 천안함 사태이후 단절된 대북지원사업의 물꼬를 텄다.[50]

서민경제 활성화[편집]

송영길은 지난 시절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노동자로, 택시운전수로 서민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의원은 ‘good listener’의 자세로 항상 국민들의 호소와 어려움을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출처 필요] 일부 기업 및 재벌 중심 정책이 아닌, 다수의 서민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민생법안들, 특히 재래시장 상인들의 임대료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법안[51], 대형마트로 인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재래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안[52], 과대한 임대료 인상방지와 세입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안을 발의했다.[53]

범죄 기록[편집]

  • 공문서변조, 절도,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 1985년 4월 16일 선고, 1987년 7월 10일 특별사면[54]
  • 정치자금에관한법률위반: 벌금 100만원 - 2003년 1월 14일 선고[54]

18대 총선 시 공직선거법 위반[편집]

2009년 1월 6일 18대 송영길은 제18대 총선에서 홍보책자에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경력만 적고, 절도와 공문서변조 전과를 뺀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대해 송영길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시절 현상수배가 되었을 때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 친구한테서 형의 주민등록증을 받아 내 사진을 붙이고 다니다가 안기부에 체포된 뒤 ‘내가 친구 형 주민등록증을 가져온 것’이라고 진술해 절도죄 등이 된 것”이라며 “선거 전에 경찰서에서 전과조회를 해보니 집회시위법 위반 혐의만 나왔고, 선관위에서도 조회결과만 신고하면 된다고 유권해석했던 사안”이라고 말했다.[55]

이후 1심에서 송영길은 벌금 50만원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재판부는 송영길이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악의로 누락한 것이 아니라 경찰 공무원의 착오로 관련 기록이 잘못 교부된 점과 16ㆍ17대 총선에서 해당 전과에 대해 이미 공개 및 해명이 이뤄진 점 등을 참작해 벌금 50만원의 형을 선고유예했다.[56]

20대 총선 시 공직선거법 위반[편집]

20대 총선에서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벌금 90만원에 처해졌다. 송 의원은 20대 총선 예비후보 신분이던 2016년 3월 3일 선거사무소 자원봉사자 등과 함께 인천도시철도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 개찰구 앞 등지에서 자신의 명함 605장을 유권자들에게 나눠준 혐의로 기소됐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명함배포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지하철 역사 내부와 중앙선관위 규칙으로 정한 병원, 종교시설, 극장 등지에서의 명함 배포 및 지지 호소는 할 수 없다.[57]

논란[편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편집]

노무현 대통령이 ‘논두렁 시계’ 의혹을 받고 있을 때 민주당 최고위원이던 송영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떤 연유로 돈을 받았는지, 대가성 여부가 명백히 가려야 한다. 검찰은 편파적으로 수사해선 안되며 성역없는 수사가 필요하다.”라며 노무현 때리기에 앞장 섰다.[58]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 (집단행동 등)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는 발언이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송영길은 “누가 대통령을 하기 싫은데 하라고 했는가? 자기가 나서서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눈물 흘리며 국민들에게 호소해서 뽑힌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대통령 시대를 끝내겠다며, 국민이 대통령인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국민이 대통령인 시대? 그 국민이 10%대 지지를 보내고 있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조롱하기도 했다.[59]

송영길이 참여정부 초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를 앞세워 열린우리당 창당도 주도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열린우리당이 덩달아 가혹한 비판을 받자 열린우리당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의 사당(私黨)이 아니다”라며 반노(反盧) 선봉에 섰던 행태는 ‘양지만을 지향하며 기회주의적 처신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60]

새천년 NHK 룸살롱 술파티[편집]

광주 민주화 운동 전야였던 2000년 5월 17일,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송영길은 정범구우상호김민석 등과 광주광역시 내 주점 새천년NHK 가라오케의 술자리에 참석했다. 이 날 같은 자리에 있었던 임수경은 "송영길은 여종업원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볼렀고, 시인 박노해는 여종업원을 껴안고 블루스 춤을 추고 있었고, 김민석은 양쪽에 여종업원을 앉혀두고 수작을 하고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파문이 커지자 임수경은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었다는 점에 분노를 표했다.[61] 정치칼럼니스트였던 유시민은 "5·18은 남의 아버지 제삿날이기에 조심했어야 했다. … 그들은 더이상 대학생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다."라며 비판했다.

베트남 성매매 논란[편집]

인천시 연수구 지역신문인 연수신문[62] 은 지난 2010년 6월 2일 1면 톱기사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평민당 백석두 시장후보 '송영길 후보' 검찰에 고발" 제목과 "백후보, '송후보 2004년 베트남에서 17세 소녀 성 접대 받아' 주장"이라고 보도했다. 연수신문은 6.2 지방선거 당시 백석두 평화민주당 인천시장 후보의 고발 내용을 인용하여 "송영길 후보가 2004년 8월 19일쯤 베트남 호치민시에 있는 어떤 룸싸롱에서 SKT 등 대기업으로부터 향응을 받고 당시 17세에 불과한 미성년의 소녀와 인근 호텔에 투숙해 성 접대까지 받았다. 그 후에도 2007년까지 수차례 성 접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베트남 당국자들에게 SKT 등 대기업의 투자 로비를 해준 대가로 수십만 달러의 뇌물까지 챙겼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은 백석두를 허위사실공표죄로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2010년 11월 백석두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11년 5월 13일 인천지법은 백석두에게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63] 2011년 8월 30일 서울고등법원도 같은 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백씨의 혐의 중 미성년자 성매매를 공표한 부분은 그 진위가 불분명해 무죄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한편 '송영길이 베트남 공안당국에 성매매 혐의로 단속돼 대사관 등이 이를 무마했다', '송영길이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베트남 방문에 따른 모든 경비를 지원받고 뇌물을 받았다'는 백석두의 주장은 허위로 판결됐다.[64]

2심 판결 이후인 2011년 11월 1일 연수신문은 "위 내용에 관하여 어떠한 증거가 나온 사실이나 그 어떤 부분도 사실로 확인된 바 없는 것으로 밝혀져 본사는 향후 다시는 이러한 정정보도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것임을 시민들에게 약속한다"라고 정정보도했다.[65]

2013년 4월 11일 대법원은 백석두가 제기한 ‘성접대 의혹’이 허위사실이라고 판결내렸다. 법원은 "증인 진술과 검사 제출 증거들을 종합하여 보면, 합리적인 의심 없이 이 사건 성매매사실이 허위라고 인정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성매매 사실의 존재는 그 신빙성이 충분히 탄핵되었다고 할 것이고, 백씨는 구체성 있는 소명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원심은 의혹을 제기한 백씨가 제출한 소명자료가 성매매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자료인지 살펴보지 아니한 채 무죄로 판단한 위법이 있다"고 덧붙였다.[66]

6.2 지방선거 당시 송영길 측은 이를 보도한 언론사의 기사를 선거기간 동안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다음 아고라 등에 복사해서 올렸다는 이유로 네티즌 11명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해[67] 일부 네티즌으로 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허위의 사실을 검증 절차 없이 올린 글을 사이버상 다수에게 무차별 유포함으로써 선거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기에 공직선거법 제250조 제2항, 형법 제 30조를 적용하여 적법한 절차에 의해 검찰이 사건을 처리하였고, 선거 당시 특정한 의도로 위 내용을 발표한 백석두 등 관련 피고인들은 유죄의 판결을 받았다.

연평도 포격 폭탄주 발언 논란[편집]

인천 길병원에서 연평도 포격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있는 송영길

송영길은 폐허가 된 연평도의 한 민간인 가게 앞에서 북한의 포격으로 그을음을 뒤집어 쓴 소주병을 들며 '어! 이거 진짜 폭탄주네'라고 발언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68]

연평도 학생 기부금 사용 논란[편집]

2010년 12월 2일 조선일보는 송영길이 "연평도 학생 107명에게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등을 사주면서 기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연평도 학생들에게 옷가지를 사준 것처럼 기부금을 사용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69]

2011년 10월 29일 송영길은 "민간인 기부자가 연평도 학생들이 구매한 신발 등의 대금을 지급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서, 송 시장은 연평도 포격으로 인한 긴급한 재난 상황에서 자치단체장으로서 연평도 학생들을 지원 격려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연평도 학생들에게 옷가지를 사 주었을 뿐, 기부자가 기부금을 낸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사용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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