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익명때문에 고민게시판 사용하는 점, 고민 게시판 유저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저는 성정체성의 혼란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는 학생입니다. 중학교 때 남자가 좋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냥 그걸로 끝이었거든요. 그래도 눈치라는 건 있었는지 스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비밀로 묻어두고 지내왔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재수를 마치면서 커밍아웃한 친구들이 점점 늘어 지금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대략 스무 명. 언제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얘기했던 덕분인지 커밍아웃으로 잃은 친구는 없습니다. 지금은 24살, 대학교 졸업까진 아직 2년 넘는 시간이 남아있고 군 문제는 나름 해결했습니다.
뭐 잠깐 친구 한 놈 얘기를 하자면, 재수학원 시절에 만났던 친구 중 한 놈은 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과 너무나 닮았더랬죠. 외모 말고, 말투랑 눈빛이요. 저랑 성격도 잘 맞아 금세 친해졌고, 2월부터 어색한 관계를 풀어가다가 4월 즈음에 제가, 하루는 너무 우울해서,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더랬습니다. 재수 시절에 우울증으로 병원에도 다녔는데 4월엔 그저 잠깐 우울한 거려니 하고 그 친구를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주량? 뭐 그런 거 몰라! 하고는 냅다 들이마셨더랬죠. 단 둘이서.
태어나서 처음 마시는 술이, 그 친구가 앞에 있으려니까 시원하게 들이켜지덥디다. 소주가. 아마 태어나서 처음 술 마신 사람 중에 소주를 달게 마신 사람은 저 말고 몇 없지 않지 싶습니다 ㅎㅎ 그렇게 한 잔~ 두 잔~ 들어가던 술이 우울증에 겹쳐, 그 친구 앞에서 서럽게 울었더래요.
야 임마, 너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무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랑 무지 닮았다이. 얼굴은 하나도 안 닮고 갸는 짤뚱하니 키도 하나도 안 똑같다이. 근디 눈빛이 닮았어. 눈빛이. 말투도 닮았다이. 이상하네이.
하면서 술을 들이켰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러다 울음이 터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채로 필름이 끊겨버렸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저는 제 스스로 입단속을 참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더라구요.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고 토요일 오전 수업을 듣고, 점심 시간에 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데 이 친구가 제 눈빛을 피합니다. 야아 어제 내가 진상부렸지 미안하다ㅜㅜ 내가 오늘 밥 살게 뭐묵을래? 하고 물었더니 나 오늘 입맛이 없다. 어제 많이 마셔서 그런가부다. 니 나가서 먹고 와. 하고는 말더래요. 오후 자습시간에 짝꿍이었던 그 친구한테 장난삼아 쪽지 두어 개를 보내봐도 대꾸 하나 없이 묵묵히 공부만 하덥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내가 등신이죠. 그 와중에 짝사랑을 했나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학원에 가기 싫다고 눈을 부비적거리는 와중에도 그 친구가 생각이 나구요, 학원에서 자습을 하다말고 로비로 나가 음료수 두 캔을 뽑아오구요. (물론 하나는 그 친구가 좋아하던 코코팜 코코넛맛이었죠.) 졸고있는 친구를 보면서는 깨워주는 척 어깨에 손도 올려봤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어찌나 떨리던지요. 이 친구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을 들이댔더랬지요. 이 친구는 미동도 없는데.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이주일 반이 지났습니다. 5월 초순. 곧 이 친구 생일입니다. 혼자 진도를 쭉쭉 빼던 저는(이라고 쓰고 등신of등신이라고 읽습니다.) 이 친구 생일을 맞기 전에 고백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 받아주기만 하면 생일에 오붓하게 첫 데이트를 하는 거야(저 지금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타이핑이 힘듭니다 오타나도 양해해주세요.) 하고는 5월 초의 한 주말, 그 친구에게 학원 밖으로 잠깐 나와라, 내 네게 할 말이 있다. 하고는 불러내봤습니다.
너 나 좋아하지?
대뜸 내뱉는 말이.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물으니 너 나한테 고백하려고 불러낸 거 아니냐. 하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이 돌아옵니다. 큰일났구나. 다 망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뭔가.. 붕괴되는 건물들이라든지 폭파되는 행성이라든지.. 뭐 그렇덥디다. 그냥 지금 당장 내 두개골이 터져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만 가득해서는 멀뚱히 서있는데 다시금 그 친구가 한 마디 하덥디다.
사실, 생각 많이 했다. 니 나랑 술마셨던 날 기억나지? 그 다음 날 기억 하나도 안 난다는 말 구라지? 니 그렇게 난동부려놓고는 뭘 기억을 못 해, 기억을. 쪽팔리니까 그래 덮은 거지.
무슨 소리야 내가 정말 기억나는 게 없는데. 내가 뭐했는데? 내가 한 거를 니가 말을 하면 될 게 아인교.
썰이 쏟아지덥디다. 대체 그 하룻밤새 무슨 일을.. 아니 근 세 시간밖에 안 되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헤아릴 수가 없던데요.
고등학교 때 무지하게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하고 조금씩 트러블이 생기더니 완전히 갈라서버렸다. 그런데 네가 그 친구랑 너무 비슷하다. 내가 고등학교 친구는 놓쳤지만 너는 평생 친하게 지내고싶다...로 시작해서 술을 몇 잔 더 마시더니,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더랍디다.
야 친구야. 나는 네가 내 짝꿍이라서 너무 싫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 친구가 벙쪄서 야 임마. 너 나랑 친해지고싶다던 놈이 무슨 소리냐? 이거 갑자기 섭섭해지려고 하네.
야. 너랑 나랑 서로 옆에 있으니까, 눈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싫다. 대각선으로 한 칸 떨어져 앉았으면 좋았을텐데...하더랍디다. 제가 이런 소리를 했대요. 저 잠깐 정형외과가서 손좀 펴달라고 하고 오겠습니다 으악으아악
뭐 이런 썰이 한두 개가 아니더만요... 그리고 이 친구가 직감한 거였습니다. 아 얘는 나랑 친해지고싶은 게 아니고 나랑 사귀고싶은 거네. 그런데 난 동성애자가 아니다... 게이, 말로만 듣던 게이가 나한테 고백을 하려고 하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이주일 반을 고민을 했답디다.
야임마. 왜 그렇게 멘붕을 하고있냐. 이새끼 진짜 기억 하나도 못 하나보네. 야 임마. 나는 게이가 아니라서 네 고백 못 받아주니까 그거만 알아둬. 고백하지 말라고는 안 할 건데 고백하면 냅다 걷어찰 것이여. 우리 성격도 잘 맞는데 친하게 지내자.
하고는 그 일이 마무리가 되었더랬죠. 그리고 정말. 정말 우리 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끔 제가 자판기에서 코코팜 코코넛맛을 뽑아올 때면 이미 제 책상 위에 제티 초코맛 캔이 놓여있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장난삼아 포스트잇에 쪽지를 보내 날리면 뻐큐(ㅗ)가 가득한 포스트잇이 10초도 채 안 되어 날아오곤 했습니다. 물론 저도 찰진 뻐큐를 날렸지요. 아마 서로 뻐큐쪽지날린 잉크만 합쳐도 새 펜 하나만큼 잉크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름방학이 왔습니다. 그 해 재수 학원의 여름방학은 길었습니다. 4월 벚꽃이 필 무렵 두근거리던 마음은 비단 저의 것만이 아니고, 그 친구와 다른 한 친구, 그리고 그 두 친구가 서로 좋아하던 여자 아이와의 큐피드 화살이 서로 엇나가며 7월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오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사각관계에 게이 하나가 끼어들어간 셈이니 같은 반 친구들은 아직도 '사각관계'라 얘기하곤 합니다. 바보들 ㅎㅎ
이 친구가, 저랑 워낙에 친했던 지라 바보마냥 저한테 연애상담을 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이 친구한테 화낼 일은 없었을 겁니다. 자기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걔가 다른 친구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다른 친구는 또다른 여자애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또다른 여자애가 나한테 관심있는 거 같다며 진지하게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친구에게 저는 '재수생이 공부나 해야지 연애질이야.'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며칠이나 지나보내면서 저는 깨닫게 되었죠. 얼마나 이기적이고 짜증나는 일이었는지. 사실 내가 그 친구에게 지운 짐이 있는데, 왜 나는 훨씬 가벼운 짐조차 대신 들어주기 싫다고 투정을 부린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한 걸까. 친구가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났을까... 하면서 다시금 친구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코코팜에다가 미안하다는 사과가 적힌 쪽지를 절절히 적어 자습시간 그 친구에게 직접 주었습니다.
친구가 학원 외진 계단('수다통로'라 불리곤 하던)으로 저를 불러내더니, 하염없이 울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이 친구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본 탓에 어찌할 줄 몰라 일단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안 그래도 여자관계때문에 다른 친구랑도 관계가 이상해졌다. 서로 꼬인 관계에 있던 여자애 둘이 서로 싸웠고, 그것때문에 나랑 다른 친구랑 사이도 안 좋아졌다. 정말 너무 심적으로 힘들어서 너한테라도 털어놓으려 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털어놓고보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더라. 하고.. 그 친구가 도리어 저한테 사과를 하는 겁니다..
어쩌겠나요.. 뭐 결국은 이런저런 얘기들과 소문들이 무성히 오가며 이 일은 정리가 되었고 (8월이 다 지날 무렵에야..) 결과적으로는 저와 친구가 더욱 돈독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참 말도 많고 일도 많은데요, 어쨌든 이 친구와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친구를 보면 2프로 정도는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맛있는 것 좀 먹고 살 좀 찌우라고 잔소리를 하곤 합니다. 친구가 보답으로 엿을 주면 저도 맛있게 냠냠하지요.
뭐 어쨌든.. 그냥 그렇습니다. 제가 되게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걸 갑자기 자랑하고싶더라고요. 새벽이라 사람이 좀 감성적인가봅니다. 사실 주절주절 썰을 풀 때는 재밌었는데 다 쓰고나니 저 혼자 재밌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혹시 노잼이었다면 아낌없는 비추천 부탁드릴게요. 빨리 보류게로 가야 쪽팔림이 덜하잖아요 ㅎㅎ 음 저는 오글거리는 손발을 피면서 한 숨 자야겠습니다. 오유징어분들 불금인데 구워지지않게 조심하시구요!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