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김대중을 가까이서 지켜본 어느 기자의 글이다. 대한민국이 궁금한 분들은 꼭 읽어보세요.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서... 김대중 그를 죽이기를 해도 결코 죽지 않는 이유가...여기에 있다.
굿바이 DJ [03-02-23 오]
김대중 대통령이 이제 퇴임을 맞습니다.
김대통령의 임기 5년 중 3년을 곁에서 지켜본 저는 조금 감회가 특별합니다. 하물며 본인의 감회야 오죽하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은 완전히 상반된 두가지 정의가 가능합니다.
첫번째는 "참 복많은 인생"입니다.
일생 중 30여년간을 민주화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살았습니다. 결국은 평생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마침내 21세기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까지 됐으니 개인으로서 더 이상의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 재직 중에는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으로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월드컵 개최국 대통령으로 4강 신화를 앞마당에서 지켜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거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참 힘들고 불운한 인생"입니다. 생과 사의 문턱까지 갔던 절대절명의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습니다. 납치와 연금,투옥의 나날이 20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고의성 짙은 교통사고로 30여년간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수십년간 뿌리깊은 반대세력의 음해와 공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장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고 차남과 삼남이 나란히 구속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과연 그의 일생은 행복한 일생입니까, 불행한 일생입니까.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 타임지 회견을 위해 관저 앞에 선 김대통령]
저는 그를 떠나 보내면서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몇가지 하고 싶습니다. 3년 동안 이 얘기를 못했던 것은 그가 아직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고 제가 아직 청와대에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얘기를 미루는 것은 저의 기자적 양심에 거리끼는 일인 것 같아 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사실 청와대에 출입하기 전까지 DJ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제가 정당에 출입할 때는 그가 정계를 떠나 있을 때였고 그가 정치에 복귀한 뒤에는 제가 주로 사회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8학번인 저는 후보단일화 논쟁이 치열했던 87년 대선에서 비껴서 있었고 기자가 되기 전까지 호남지역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DJ의 이미지는 "매우 노회하고 독선적인 정치인"이라는 것 이상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지켜본 DJ는 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관이 확고하고 고집이 세지만 자기 고집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고 토론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측근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섬세한 결벽성이 있는가 하면 자기 철학과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관철시키는 추진력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젊은 시절의 그는 지금과는 또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야당투사가 아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여유를 가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가 좀더 유연하고 유머러스하고 쇼맨쉽도 갖춘 대통령까지도 돼주길 바랐지만 이미 80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무리한 기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에 나갔을 때 DJ가 받는 대우는 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그는 넬슨 만델라와 동격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20세기의 영웅'이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그의 방문에 맞춰 DJ 일대기를 특집으로 제작하고 특집면을 만들었습니다. 에이펙이나 아셈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DJ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지난해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때는 주최국인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들을 소개하면서 오직 DJ에게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블레어와 시라크, 주롱지와 고이즈미 같은 쟁쟁한 인물들도 아무 수식어 없이 이름만 소개됐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DJ에 대한 특별대우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습니다.
DJ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이나 투자유치 설명회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일단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정상들간의 외교적 수사(修辭)는 늘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DJ에 대한 것은 수사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라우 독일 대통령)하는 식이었습니다.
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한 선배 기자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고는 "머리색 검고 얼굴 노란 황인종 중에서 백인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다. 오직 DJ 뿐이다"고 하더군요. 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이런 대접에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국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30여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입니다. '대통령을 칭찬하는 기사는 낯뜨겁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국내의 뿌리깊은 반(反)DJ 정서를 눈치 보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CEO인 그가 이런 'DJ 브랜드'를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한국에 대한 투자유치와 IMF 극복,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교적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네임밸류에 만족하지 않고 발로 뛰면서 한국 경제와 햇볕정책을 세일즈했습니다. 해외순방 때마다 저는 80에 가까운 DJ가 강행하는 빡빡한 일정에 먼저 넉다운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DJ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유력 언론들이 자신의 국정이념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니 직접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연설문은 밤을 새워가면서 직접 작성했고 지난해 2월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을 때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DJ가 2001년말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치 불개입을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당에 출입하는 선배 기자들의 상당수도 "DJ는 어떤 식으로건 대선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옛날의 DJ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DJ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고 해외에서는 세계적인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남은 욕심이 있다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 것뿐일 겁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그를 여전히 특정 정파, 특정 지역의 수장으로만 간주하고 끊임없이 흠집을 내려고 했습니다. 몇몇 보수언론들의 노골적인 왜곡보도는 같은 기자입장에서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가치관과 이념을 달리하는데서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오직 DJ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나쁜 보도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제 그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갑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다만 경제개혁과 남북협력,그리고 IT BT 문화산업 육성이라는 그의 기본방향이 옳았다는데는 큰 반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실패가 너무나 극적으로 강조돼온 반면 성공에 대한 평가에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하고 그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대통령. 이제 좀 편안히 지내십시오."
ps 주류언론이 지난 40년간 김대중 죽이기를 해왔지만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통일이 되면 통일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외환위기중에도 일본보다 한발앞서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지탈IT 지식정보산업강국, BT 바이오산업강국, 한류문화산업을 일으키고.. 한나라당이 넘겨준 39억달러 남아있던 대한민국 금고를.. 퇴임할때 세계4위 (1200억달러ㅡㅡ>현재는 2000억달러) 외환보유국 만든..
김대중이 과연 죽여질 수 있을까?
ps 아래 어느철부지가 독도와 경제정책 가지고 김대중을 폄하하는데 김대중의 사생활 문제를 말한다면 할말 없다...그러나
적어도 김대중의 독도정책과 경제정책을 폄하하려면 이승만의 독도평화선 즉 이승만라인 정도는 공부해야하며... 한나라당이 1997.12.3 imf와 대한민국 기업들 넘기겠다고...도장찍었던 엉터리 협정서 내용을 모두 공부하고 와서 논하기를 바란다.
단언하지만 독도평화선 즉 이승만 라인을 아는 한국인들 거의 없으며 한나라당이 imf와 맺은 엉터리협정서 내용을 아는 한국인들 거의없다. 대한민국 국민 99.9%가 이승만라인도 imf와 맺은 계약서 내용도 모르는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승만 라인이 무엇이며 한나라당이 1997.12.3 imf와 맺은 엉터리협정서 내용을 알게된다면... 이승만 라인을 포기한 그 일본군장교와 후손인 한나라당 그리고 공범인 수구언론은 대한민국을 영원히 떠나야 할 것이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궁금한 분들이 있다면 꼭 검색해서 알아보시기를~~~***
이 게시물을 끝까지 보신다면 님은 대한민국을 알게 될 것입니다.
ps
imf와 한나라당이 자랑스럽게 맺었던 협정서 내용을 검색의 번거로움을 해소하고자 추가로 올려 놓았습니다@
한나라당이 1997.12.3 도장찍었던 자랑스런 엉터리 imf 협정서 내용입니다.(이거 보고 있으면 정말 욕나옵니다.) 한나라당(신한국당)은 그 당시 유일하게 불공정 협정 반대하는 김대중후보를 비난하고.. 언론을 통해서 그를 몰아 세웠다.
그가 국가신용도 추락시킨다고 말입니다.
과연 한나라당은 그 당시 계약서 내용이.. 어떠한 내용인지 알고 김대중를 비난했을까요? 한나라당 그들이 어떤 계약서에 서명했는지? 보자구요..
한국은 1996년에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는데.. (GNP대비 4.9%), 이것은 GNP대비 비율로만 본다면 약 7%의 기록한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이제부터 IMF 구제금융에 따른 한국의 양허안 중요내용을 보면..
재정 : 금융긴축을 통한 외환보유고 제고, 경상수지 적자 축소 투명 : 건전·시장중심적 금융질서 확립을 위한 금융산업 구조조정 목표 :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기조 유지 절차 : IMF스탭과 협의하여 집행 내용 : 단기적으로 고금리 허용
기본방향 : 명확하고 엄격한 퇴출정책, 강력한 시장과 감독정책,경쟁촉진 퇴출정책 : BIS기준에 미달하는 은행은 증자나 M&A를 통해 구조조정 개방 : 98년 중반까지 외국은행 자회사 및 외국증권사 현지법인 설립 허용
채권시장: 98년 2월까지 단기자금시장 및 회사채 시장 개방 확대 기업부문: M&A에 대한 규제 대폭 완화 노동시장: 정리해고 제한 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종목당 26%에서ㅡㅡ>97년말 50%로 외국인 주식매입한도 확대 또 다시 50%에서ㅡㅡ>98년 2월 55%로 추가확대 1인당 7%에서ㅡㅡ> 97년말 50%로 확대한다.
김대중이 임기를 시작도 하기전에 증시를 50%이상 외국인에게 열어 주고는 지금와선 그 책임을 대중이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기까지 하는게 가당키나 한가~~???(우리국민들 99.9%가 반대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김대중이 언제 한나라당 탓하던가?
그는 돌이 날아오면 묵묵히 맞을 뿐이다.
지역주의자들은 정말 반성해야한다...
"IMF 한국경제 극비 보고서(전문)"
조선일보 1997.12.8일자 12면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기 위한 대대적인 안정화 프로그램, 즉 재정·금융상의 긴축정책이 강제되었다.
이에 따라 3% 이하의 GDP 성장률, 5% 이하의 물가상승률이 1998년의 거시경제적 목표수치로 설정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상당기간에 걸쳐 저성장과 고실업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3%의 GDP 성장률 하에서는 실업자 수 110만명에 실업율이 5%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IMF는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를 위해 상당수 금융기관의 폐쇄 및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M&A의 허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은 대외적 외환위기 사태를 대내적 신용공황(credit crisis) 상황으로 전환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5.16 쿠데타 직후의 증권파동 이후 최초로 증권회사(고려증권)가 파산하였고, 재계 12위 재벌인 한라그룹이 부도가 났으며 M&A 대상으로 소문이 난 몇몇 은행에서는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악순환적 연쇄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한나라님들 아주 오래전 이야기처럼 들리는가요? )
한나라님들 저런 바보같은 계약서 도장찍고... 김대중에게 노무현에게 뒤집어 씌우는 기법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한나라당이 물려준 39억달러 남았던 금고...지금은 200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으며 세계 4대 외환보유국에 이르렀다...^^**
한나라당 모국회의원의 발언이 생각난다. 경제가 망해야 한나라당이 잘 된다~라고 말한 것이 진정 당신들의 마음인가요? 세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좋은 하루여~~***
[ 노벨위원회 2000년 노벨 평화상 발표문]
대한민국 국민 99.9%가 모르는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수 많은 선정이유...들
Nobel Peace Prize 2000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has decided to award the Nobel Peace Prize for 2000 to Kim Dae Jung for his work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n South Korea and in East Asia in general, and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with North Korea in particular.
In the course of South Korea's decades of authoritarian rule, despite repeated threats on his life and long periods in exile, Kim Dae Jung gradually emerged as his country's leading spokesman for democracy. His election in 1997 as the republic's president marked South Korea's definitive entry among the world's demoracys. As president, Kim Dae Jung has sought to consolidate democratic government and to promote internal reconciliation within South Korea.
With great moral strength, Kim Dae Jung has stood out in East Asia as a leading defender of universal human rights against attemots to limit the relevence of those rights in Asia. His commitment in favor of democracy in Burma and against repression in East Timor has been considerable.
Through his "sunshine policy", Kim Dae Jung has attempted to overcome more than fifty years of war and hostility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His visit to North Korea gave impetus to a process which has reduced tens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re may now be hope that the cold war will also come to an end in Korea. Kim Dae Jung has worked for South Korea's reconciliation with other neighbouring countries, especially Japan.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wishes to express its recognition of the contributions made by North Korea's and other countries' leaders to advance reconciliation and possible reunifi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Oslo, 13 October 2000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권위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여러 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김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왔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선정이유]
<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김대중 대통령은 수십년 간의 숱한 고초와 시련 속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신념 하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법', '제주4.3특별법' 등을 제정하여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투쟁에서 비롯된 한과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또한,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하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였으며,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해 인권법 제정을 추진 중에 있으며, 과거와 달리 누구나 합법적인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 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참고로 자료를 보면, 1997년 집회, 시위는 모두 8,236회였으나 1999년에는 1만1,750회로 늘었다.
그러나, 불법 폭력시위는 664회에서 129회로 줄었다. 최루탄은 1997년 13만여발에 달했으나 1999년에는 단 한발도 사용하지 않았다.
청소년 보호와 여성 권익향상을 위해 '남녀고용평등법',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 '성폭력방지특례법', '청소년성보호에관한법' 등을 제정하여 남녀평등 실현과 청소년 보호·육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참여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정부의 정책 결정, 집행, 평가에 국민 참여의 길을 확대하고 시민단체의 자발적인 활동과 시민사회의 성장 발전을 지원하고 있으며, '인터넷신문고' 운영을 통해 국민들의 국정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전자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대북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 후‘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으로 전쟁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돼 온 분단과 대립 55년의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긴장 완화, 그리고 통일에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산가족 상봉과 북·미관계 급속 개선 등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나갔으며, 유럽 방문 때 정부 차원의 대규모 지원을 포함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여 북한을 화해 및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 내었다.
[추천과정]
역대 81번째, 아시아인으로서는 일곱번째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기록된 김 대통령이 노벨상에 처음 후보로 추천된 것은 1987년이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앞장서 서독 사민당 의원 73명이 추천한 것이 최초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추천 사유는‘한국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과 3단계 통일방안을 제창해 남북 평화에 기여한 공로’였다.
이후 인권 향상과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매년 추천되어 올해까지 14회에 걸쳐 후보로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동안 몇 차례나 수상 직전까지 갔었다. 대표적인 것은 지난 1992년으로 남아공의 만델라 당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장,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등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재미있는 것은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전 대통령이 올해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매년 빠짐없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됐다.
1987년의 경우처럼 초기에는 주로 그의 민주화 투쟁에 공감한 외국인들이 추천을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한 후 수차례에 걸친 죽음의 고비와 감옥 생활 등을 거치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투쟁에 공감한 결과였다.
외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김대중 대통령과 친분이 각별한 인사나 교수들이 추천에 앞장섰다.
예컨대, 지난 1990년엔 스웨덴 웁살라대 닐 엘반더 교수를 비롯한 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의 학자, 정치인, 문인 등 35명이 김대중 대통령을 추천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추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로마 바티칸 주교단체, 미국 가톨릭 계열 대학, 엠네스티 등 해외 인권단체 등도 자주 추천한 단체들이다.
노벨 평화상 추천 자격은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과 노벨연구소 자문위원, 각국의 현직 각료와 의원, 국제사법재판소 및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 정치학·법학· 철학·역사학 전공학자,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나 단체만이 가능한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들로부터 여러 해에 걸쳐 복수 추천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 동안 노벨 평화상에 추천된 사유는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집중돼 있지만, 해마다 약간씩 추천 사유가 달라졌다.
예컨대, 1999년 추천 사유는 IMF 환란 극복 노력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공로였고, 올해 1월에는 아시아 국가간 관계를 발전시킨 공로로 추천되었다.
ps
김대중에 대한 수 많은 오해와 편견... 지금도 누군가는 돈주고 샀다고 폄하를 한다. 지역주의자들은 정말 손들고 반성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