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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가는대로 뻘글을 써보았다. (2)
게시물ID : freeboard_17911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헤브리
추천 : 1
조회수 : 1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8/24 22:17:28
먼저 나는 귀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내용을 진행하겠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귀신을 보기 힘든 걸까?



사실 혼을 보는 영감이라는 것은 자연속에서 나 홀로 있을 때 상념을 하며, 혹은 지속적인 이런 존재감을 느끼면서 세상에 퍼져있는 생질의 시스템을 기억하고 자연의 순환과정을 끊임없이 몸으로 체험할때 우연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피와 피로서 이어진다. 이때의 피는 교육일수도, 가족과의 체험일수도, 어린시절 자연스레 받아들인 주위환경의 체득을 통틀어 혹은 '그러한 부분'에 민감함을 가진 몸이 어느순간 작은 계기를 통해서 우연히 발현하여 내가 이러한 특질을 가진 인간이구나하고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 눈이 뜨인다.



 자. 그렇다면 보편적인 인간, 특히 대부분의 도심속 성인들은 왜 귀신을 보기 힘든 이유는 바로 '영혼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전의식과 의식의 대립과 그 안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쉴수는 없다. 자신은 또다시 생존을 위해서 자연과 관련없는 오로지 인간의 의식적인 부분만 통용되는 인간사회의 심층부에서 활동하니까. 예전에는 인간이 생존하는 방식이 자연과 굉장히 밀접되어 있어서 인간의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각혼의 영역까지도 모호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그 집단의 한 가운데는 무당이나 신앙적 기반이 존재했다. 즉 예전에 농경사회에는 자연을 느끼기가 정말 쉬웠다. 옛날 사람들은 어미개에서 새끼들이 여러마리 태어나는 걸 눈으로 보았고 몇년 지나 그중 한마리를 복날에 잡아서 식탁에 올라오는 것 까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혐오나 선과 악이 자리잡지 않았고 당연시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 기술발전이 농업문화에 머물러있는 원시부족이거나 농경이 주 산업인 촌에 가면 꼭 하나씩 샤먼이나 사당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이러한 자연과 밀접한 생활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발전이 잘되어 기계식 농장을 운영하는 미국 남부에도 교회를 다니는 신앙자가 많은지에 대해서도 설명된다. 그것은 그들이 가난하거나, 미개하거나, 교육수준이 낮거나 하는 문제와 다른 것이다. 자연속에서 시간의 형성을 통해 생성되는 삶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본질인 인간의 전의식, 즉 감정에 관한 인간의 특성이 개개인도 모르는 사이 발전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은 그 과정이 생략되고 사회의 변경에서 잘 처리되어 더이상 생명을 느끼기 힘든 형태로 가공되어 시장에 시판되니까. 또한 그 사이에 선과 악은 없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전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나, 복날에 꼭 개를 잡는게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다.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은 각혼과 전의식의 부분이기에 인간의 사회적 의식으로 파생된 선과 악으로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전의식의 생활권에 속한 사람들은 의식속의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의식속의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은 전의식에 관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둘다 서로 설명을 못하고 이해또한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는 절대적 믿음의 유무에 관련되어있다.



 먼저 의식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적 믿음이란 없고 항상 가변화된다고 말한다. 이는 신앙, 혹은 사회관계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설명되는데 이들은 언제나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발전과 그에 맞춰 살아가는 급박함에 신경을 쓰다보니 전의식이 머무를 틈이 없다. 그리고 이는 문득 드는 공허감과도 관련되어있다. 전의식의 사람들은 그어떤 복잡한 일에도 스스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붙이는 현상에 대한 주석은 인간의 의식수준에 따라 결정되며 만약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기술의 발전과 시대가 지나면 먼 후손들이 조금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기에 믿음에 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언제나 접하여 자신이 언제나 머무를 장소나 영역은 세상에 존재치 않다고 생각하고 이는 인간의 특징임을 스스로 인지한다. 그러니 그들은 애초에 절대적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고로 이들은 보편화된 사회와 기술에 빗대어 자신을 특정짓는 설명을 한다.


 

 전의식의 생활권에 존재하는 이들은 절대적 믿음이란 언제나 존재하고 이에 따라서 인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운명또한 좌지우지 된다고 말한다. 전의식은 언제나 인간의 본질이며 이는 더 나은 존재가 되거나 혹은 더 나은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에 그와 관련된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지내왔던 세월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던 시간에 따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위한 전의식 또한 있어 왔으며 이는 개인의 가정의 풍습,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자연의 단순한 인간의 이해관계에 편승하지 않는 자연의 무작위적 시스템같은 인간으로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은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자신의 행위가 곧 그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설명할 때 절대적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고로 이들은 개개인의 생활과 믿음에 빗대어 자신의 특정짓는 설명을 한다.

 


 그러고 보니 보통 농촌의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도심의 사람들은 진보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국가의 정책을 추진할 때 기업과 사업을 중요시하는 정책집단을 보수적 집단이라고 말하고, 예술과 인권같은 문화를 중요시하는 정치집단은 진보적이라고 말하는데, 뭔가 잘못된것 같다. 인간의 전의식을 중요시하는 집단이 진보적이라고 말하자면 무엇보다 농촌의 사람들이 진보라 칭해야 할 것이고 의식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도심의 사람들은 보수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농촌사람들은 조금더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진보적인 정책을 표방하는 집단을 응원하고 도심은 경제적인 발전을 응원하거나... 하지만 현실은 반대니까. 한국사회의 문제... 라고 말하기에는 내가 가진 사회의 지식이 없고 아니면 인간이 가진 모순이라거나 하면 근거가 부족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뭐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생성된 도심속 자아가 '이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성은 곧 극도의 의식의 영역이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전의식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는 갈수록 축소화되는 예전의 문화와 예술을 자연스레 설명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는데 우리는 자연을 잊었고 또 새롭게 탄생되는 인간들은 자연과의 접근방식을 잊어갔다. 문제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접근방식도 달라졌는데 예술과 문화가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각혼을 어우르는 하나의 집약된 총체로서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고 단지 의식화된, 특히 단순히 현대 도심의 의식만을 대변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의 본질이 각 시대상을 대변하는 하나의 모습을 설명하는 역할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며 그것 또한 나 역시 어느정도는 옳다고도 생각하지만 난 그것에 앞서서 예술도 문화도 결국 인간이 자연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만들어진 본연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현대예술이라고 표방하는 것은 뭐랄까. 세상을 비틀어서 보고자 하는 특이성은 느껴지지만 가슴을 탁 치고 보고 또 보게되는 그런 것은 없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나의 단순한 개인적인 특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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