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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귓가로 서늘한 바람소리가 스쳐지나간다. 나는 지금 한강다리 위에 서 있다. 내 나이 19세. 흔히들 그렇듯 학업의 스트레스와 부모님과의 갈등, 친구들과의 마찰로 나는 이 위에 서 있다.
-꿀꺽.
저 밑에서 꿈틀거리는 심연을 보고 있자니 춥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추우면 뭐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금방이다. 남기고 싶은 말 따윈 없다. 어차피 청소년의 자살은 이제 뉴스거리도 못 되니까 말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묘한 부유감과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려는 찰나,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봐.”
깜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다리 위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강에 곤두박질 칠 뻔 한 몸을 추슬렀다. 금방이라도 뛰어들려던 놈이 왜 그러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깜짝 놀라서 죽는 그런 한심한 일은 피하고 싶었다. 어쨌든 나는 누군지 모르는 방해꾼을 쫓아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
이상하다. 분명 소리가 났는데 주위엔 어둠을 뚫고 질주하는 자동차들 뿐 아무것도 없었다. 환청이나 바람소리를 잘못 들은 것 같다. 어쨌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으니 다시 아까의 작업을 이어가려는 찰나.
“어딜 보는 거냐.”
이번엔 분명이 들렸다. 머리 위다! 황급히 고개를 든 나는 예상 외, 아니 상상도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사람이, 아니, 복장을 봐선 바리스타가.. 이상하지만 정말 카페 바리스타가 입을법한 의상을 입은 남자가 허공에서 다리를 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청하게 한강에 빠지면 판타지로 가는 문이 열리거나, 왕으로 환생하는 그런 걸 기대하고 하는 짓은 아니겠지? 미리 말해두지만 무작정 빠지면 지옥이 널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아까도 한명이 내 말을 무시하고 그냥 뛰어 들었지. 아마 지금 쯤 지옥문에 써져있는 ‘네가 뭘 싫어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란 표어를 보고 좌절하고 있을 걸?”
……. 어떤 존재든 간에 말이 굉장히 많은 존재임에 분명했다.
“당신은 뭐죠..?”
“나? 이거 안 보여?”
남자가 등을 보여주자, 등 뒤에 옷을 뚫고 나온 한 쌍의 날개가, 밤의 색과 꼭 닮은, 밤하늘의 녹아들어간 날개가 희미하게 퍼덕이고 있었다.
“악... 마?”
“하여간, 인간들이란 그저 검은 옷에 검은 날개만 보면 악마라 그러지.”
“그, 그럼 아니에요?”
“아니란 소린 안했다.”
“…….”
확실하다. 얄밉게 입을 놀리는 걸 보니 악마가 분명했다.
“그런데 무슨 악마가 머리가..”
“이게 왜?”
투 블럭으로 컷트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악마가 입을 열었다.
“요즘 최신 트렌드 몰라? 요즘은 악마도 자기관리가 필요한 시대야.”
“그, 그래요?”
“그래, 그런데 너 악마를 보고도 안 놀란다?”
악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워낙 인간다운 생김새를 해서 그런지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평범한 인간은 허공에 떠 있을 순 없지만 말이다.
“뭐, 좋아. 어쨌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이요?”
고개를 끄덕인 악마가 품에서 사과패드를 꺼내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뭐, 뭡니까 이건?”
“계약서. 읽어 봐.”
“네? 다짜고짜 계약서 라뇨?”
“흐음..”
갑자기 악마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앗?!”
놀라서 뒤로 고개를 빼려고 했으나 언제 잡았는지 악마가 도망가지 못하게 뒤통수를 잡고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빤히 바라보는 악마의 보라색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왜, 왜이래요?”
“흐음.”
악마가 뒤로 물러났다.
“자살 하려던 거 아니었어?”
맞긴 한데 대놓고 물어오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뻔히 바라보는 악마의 시선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번 읽어봐.”
악마가 나에게 떠넘기듯 사과패드를 품에 억지로 안겨줬다. 죽으려던 마당에 호기심이 다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사과패드 화면을 켜자 제일 먼저 “새 삶 도우미 계약서”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 삶 도우미 계약서? 이게 무슨 말이죠?”
“간단하게 말해서 너의 수명을 조금 주면 지금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지. 일단 다 읽어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계약내용을 읽었다. 계약자가 현재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대신 ‘갑’은 대가로 수명의 10%.. 수명의 10%면.. 뭐 어차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살하려던 주제에 10%던 20%던 상관은 없겠지. 별 내용은 없었다. 단지..
“이 조항은 뭐죠?”
“‘갑’은 ‘을’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조항?”
내가 어떤 조항을 물어 올 줄 알았는지 악마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래봬도 명색이 악마잖아? 그렇다면 사람들이 악마에게 가지는 기대를 충족 시켜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막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 계약서가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단 한 번만 거짓말을 허용한다는 거지.”
“... 굉장히 계산적이네요.”
“그렇지? 쉽게 보면 연예인이랑 같은 거야. 보이는 이미지 때문이지.”
“뭐, 좋아요. 오히려 상대가 단 한번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마음이 편하군요. 그 단 한번 빼고는 모두 진실일 테니까요.”
내 말을 들은 악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럼 거기 빈칸에 서명하라고.”
“좋아요.”
나만 별다른 이견 없이 서명을 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나는 악마를 바라봤다. 악마를 맴돌고 있는 분위기가 묘하게 변한 것 같았다. 얼굴에 알 듯 말 듯한 애매한 미소를 띤 악마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일단은?”
악마가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보랏빛을 띤 눈이 점차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밤보다 더 깊은 어둠을 간직한 악마의 눈 깊은 곳에서 잠시지만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불길한 예감에 몸을 뒤로 빼려했으나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악마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뒤 늦게 위험을 느낀 본능이 경종을 울렸으나 이미 늦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아있는 밀랍인형처럼, 비로소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는 눈앞에 악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큭, 역시 인간은 어리석다니까. 뭐, 그러니까 덕분에 나 같은 악마들이 먹고 사는 거 아니겠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악마가 주먹을 입에 대고 쿡쿡 웃었다.
“너무 억울해 하진 말라고 계약한대로 거짓말은 한번 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악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과패드 화면에 쓰여 있는 계약서 조항이 전부 바뀌기 시작했다.
“자, 그럼 너의 영혼은 내가 갖도록 하지. 어차피 죽으려고 했잖아? 그럴 거면 나 같이 영혼이 필요한 악마에게 주는 게 서로 윈, 윈 아니겠어? 너는 예정대로 자살을 하고 나는 영혼을 얻고, 괜찮지? 어쨌든 말이 길어졌지만 이만 쉬라고.”
악마가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주위에 모든 게 흐려졌다.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존재 속에서 악마의 마지막말이 들렸다.
“아, 참. 네 몸은 걱정 마. 원하던 대로 강에 던져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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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