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해서는 남녀간의 사랑의 실현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퍼진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이 고대로부터 그래왔던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교육자들과 종교가들 (예를들면 요즘 강의하시는 법륜스님)은 흔히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결혼을 하라고 조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도의 오쇼 라즈니쉬가 반드시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는 결혼에 대한 가장 중요한 힌트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는 연애 결혼을 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연애 결혼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의 이유를 간단히 거칠게 말하자면,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관점에 따른 자료들은 매우 많고 방대합니다.
그것은 그 뿐만이 아니라 권위적이고 종교적인 기원마저 가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상식에도 녹아들어있습니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진술은,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뜻은 아닐수도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이기도 합니다. 다른 방식의 용어 정의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남녀간의 사랑이 성별을 초월한 일반적인 인간 관계에서의 사랑과 동일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렇습니다. 만일 동성애를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쉽게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녀간의 사랑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2년이었나 3년이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소진되어 버린다는 연구를 언젠가
기사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이것은 저의 경험과도 일치하며, 많은 사람들의 보고와도 대개 일치합니다.
물론 여기서 용어의 문제를 다소 정리하고 나아가자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열애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열애가 소진된 이후에도 사랑은 남아있지만, 좀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존재하는 사랑과 비슷한
우정 같은 속성의 사랑이 남게 됩니다.
그러면 이 우정 같은 속성의 사랑을 결혼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지 말라고 하는게 라즈니쉬의 결혼관입니다.
이 우정과 같은 속성의 사랑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종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고양이를 기를 때 싹트는 사랑과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특수한 그 자체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사랑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사랑은 종교적인 용어를 쓰자면 신에게, 말하자면 만물을 위해 바쳐지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볼때는 이것이 매우 비인간적인 견해로 느껴질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오히려 적용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경우가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주 원칙적이거나 원론적인 차원에서는 라즈니쉬의 관점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라즈니쉬의 관점에 따르자면, 결혼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들은 재정상태, 명예, 지위, 가족상황 등의 여러 조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것에 관해서 어른들의 뜻을 참고하라는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조언을 겯들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라즈니쉬는 욕망에 기반한 결혼을 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결혼 자체에 어떤 내재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2000년쯤 전에 이미
기독교의 바울에 의해서도 직관되었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신에게 봉사하기에는 가장 이상적이지만, 정욕에 불타고 있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에 따르면 결혼 자체는 전혀 긍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결혼은 정욕에 불타오르는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적인 성격을 띈 일종의 차악책 같은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 따르면 결혼의 일차적인 기능은 정욕을 적극적으로 소진할 수 있는 한명의 파트너를 둠으로써 정욕의 날뜀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불이 났을때 불에 탈 수 있는 나무들을 없애기 위해 맞불작전을 쓰는 원리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다른 성스런 의도에 의해 축성(祝聖, 신에게 물건을 봉헌하여 성스럽게 함)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또한 지금껏 문명 발전에 이바지한 신실한 세대들이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결혼 자체에는 고유한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축성이라는 말을 헌신이라고 바꿔도 똑같습니다)
물론 결혼은 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축성하는 것이 하필 꼭 결혼이어야 합니까?
결혼은 축성하기에 매우 부적합합니다. 가령 성스런 의도로 결혼을 축성하는 일이 성공적이려면
그것은 수많은 요소들을 우연히라도 충족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신분과 경제적 수준, 다음으로는 가치관이 잘 맞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결혼을 영적인 수행의 도구로 삼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곡예를 부리는 것과 흡사합니다.
제가 하는 말의 증거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숱한 성인들과 승려들, 철학자들이 결혼제도를 그다지 우호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만일 결혼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면 그들은 결혼을 권유했을 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결혼에 대한 태도가 회의적이거나 냉담했던 수행자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결혼을 수행이나 인격 수양의 도구로 삼는 것은 실용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 생활이 난이도가 높다는 이유로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수많은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시험을 줄이거나 피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난이도를 높게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가령,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해보이고 싶다면 고아를 하나 입양하면 됩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낫습니다. 왜 꼭 결혼을 해야합니까? 필연적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결혼을 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반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결혼을 축성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합니다.
허나 축성하기 위해서 결혼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사람들은 이미 결혼을 했으므로 축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부부가 일평생을 서로를 위하며 살더라도, 두 사람의 영혼이 합일하거나 하나를 지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외의 경우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소수의 커플들을 보면 결혼 자체의 고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몇개의 성공적인 사례가 있다고 해서 결혼 자체가 심오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결혼은 어떤 방어책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수천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결혼을 신성시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된 책임은 성직자들의 설교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술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적인 결혼에 대한 관점의 궁극적인 정수에 관한 힌트는 프로이트에게서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변태적인 행동에 관하여 정의할 때, 생식, 즉 자녀 생산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행동은 모두 변태적인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들어서, 키스라는 행동조차 만일 생식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변태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행동조차도 기존에 문화화 되었다면, 행동 당시의 순간적인 의도에 의해서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쨋든 프로이트가 어떤 관점에서 한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최소한 발생학적인 면에서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모두 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극히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참고하였을 때,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오쇼 라즈니쉬와 역시 보수의 아이콘인
기독교의 창시자 격인 사도 바울의 견해를 종합하였을 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결혼은 양육 공동체라는 명분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모든 부부싸움도 이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표면상 명분에 해당하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
개인적인 동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개인은 결혼에 앞서 자신의 욕망의 충실한 이상형에 대한 관점을
절대적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결혼 상대의 선택에서 사랑이라는 요소를 탈락시키는 것입니다.
일견 악마적인 소리로도 들릴 수가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사랑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원형이 아직도 우리에게 강박관념처럼 남아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용어 자체가 언어학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표상을 대변하기 때문에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습니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르게 설명하자면, 사랑의 정량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당신은 가장 사랑한다는 이유로 당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결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인 당신과 고양이는 생식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렇듯이 당신은 마치 고양이와도 같이 당신에게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생식적인 것과는 별도의 매력을 가진 상대는 배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성적인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만, 단지 우리가 바람직한 결혼에 대한 위계를 설정할 때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자는 것이지
반드시 우리 모두가 이런 결혼을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우리는 친구와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고, 사업파트너라는 이유로도 충분히 결혼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단지 결혼할 나이에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바람직성의 현실적인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상적인 결혼에 대한 원형 또한 설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중하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더이상 그것을 나는 이런 상대를 선호하고, 당신은 저런 상대를 선호한다는 개인적인 취향인양 다루기는 분위기가 바뀔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죠.
저는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고 제가 최초로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가장 욕망하는 사람과 결혼하면서 아직도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 죄책감이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문화권 속의 잘못된 원형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역사적인 이유를 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혼 자체는 가장 간소화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남녀의 성욕과 생식활동이라는 원형에 토대를 두고 단순히 그것이 제도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매우 단순하게 생각해봤을 때는 인간의 생식활동을 제도화하기 쉽게 남자들과 여자들 간에
수학적인 일대일 대응을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직관적인 이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서 여러가지 문화적이거나 법률적인 부가사항이 겯들여지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생식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에 불과하므로, 결혼이 성욕의 충족에 불리하다는 견해는 휴머니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것이 냉철하게 이득이 되는 견해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하튼 제가 제시하는 결혼관을 곧바로 하나의 상황에 적용하자면,
예를들어서 섹스리스(sex-less) 부부가 비난받을 일이 되거나, 이혼 소송의 사유가 되거나,
어느 일요일의 목사님의 설교 또는 심리학자의 칼럼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묘사되는 상황 역시,
미래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기적인 섹스라는 것은 생식 활동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섹스가 물론 생활의 활력소이고, 스포츠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사랑의 궁극적인 확인으로까지 여겨진다는 것은
물론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될 뿐입니다.
섹스가 어떤 이들에게는 활성화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은,
개개인의 리비도가 순환되는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신경계가 형성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섹스리스(sex-less)는 사랑의 부재와 관련이 없습니다.
저또한 섹스를 통한 우주적 합일의 체험 같은 것을 안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섹스리스는 사랑의 부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섹스리스 부부들이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는 섹스리스 부부들의 죄책감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지요.
결론적으로,
저는 미래의 결혼이 양육 공동체라는 의의만을 가지는 것으로 정리되어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싶습니다.
먼저 도덕적인 차원에서 검토될 것이고, 학계가 그것을 뒷받침할 것이며, 최종적으로 법률에까지 반영이 될 것입니다.
이상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말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분들이 실제로 현대사회의 남녀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저 자신과 가족들의 경우를 보고 통감한 것입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보시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결혼 상대를 선택하라는
법륜스님과 같은 류의 견해들이 결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륜스님의 다른 가르침들은 저도 좋아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결혼에 관한 조언 만큼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현대 문명은 무수히 많은 자연적 본능의 억제와 억압, 승화 위에서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개인은 그가 속한 문명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 일을 하며, 준법과 납세, 국방 등의 많은 의무들을 집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이 그러한 개개인의 평생동안의 희생에 대한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권리로서 제시하는 유일한 선물은,
결혼이라는 제도 외에는 없습니다.
아주 엄밀하고 극단적인 종교적,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따르면,
모든 섹스는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농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적', '생물학적'으로 볼때 그렇습니다.
오히려 '종교'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내에서의 섹스에는 면죄부를 준 경향이 조금 있는데,
그래도 제 생각에 섹스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는 합리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앞서 종교적,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엄격하게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만 기준을 느슨하게 잡으면,
이번에는 모든 섹스는 거의 동등한 정도로 허용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이 말은 결혼은 제도에 의한 관념에 불과하다는 말과도 같은데,
제 말은 결혼을 모욕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부들이 서로에게 섹스를 청구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부부강간에 대한 개념은 여기에서 도출되어야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헷갈리기 때문에 바람직한 경우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대들은 아무 문제 없이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매번 파트너와 눈이 맞아야 합니다.
매번 눈만 맞는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그대들의 섹스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 둘이 동의한 이상 죄를 선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했건 안했건 말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안한 경우라면 제도적으로 봤을 때는 죄가 되겠지요.
단, 생물학적으로 볼때는 여전히 죄입니다. 임신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육체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죠.
종교적으로 죄인지 아닌지는 따질 필요 없습니다. 종교는 문명이 만든 것이므로 문명과 다를게 없습니다.
섹스는 여전히 죄이지만, 죄를 선언할 존재가 없어지므로 죄가 아니게 된다..
제가 한 설명이지만 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섹스가 죄가 아닌 것으로 되는 기제 자체가 그렇게 작동합니다.
단 여전히 생물학적으로는 죄라는 문제가 남는데, 피임은 어떤 식으로는 육체에 무리를 줄 것이 분명합니다.
약을 사용하지 않고 도중에 섹스를 중단하는 방법을 쓰더라도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무리를 줄 것입니다.
이야기가 돌아서 섹스 이야기까지하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문명이 그러한 개개인의 평생동안의 희생에 대한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권리로서 제시하는 유일한 선물로써의 결혼을,
개인이 이 결혼이라는 제도마저 사회에 대한 봉사나 희생의 개념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혼 상대를 에고의 전리품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외에 문명이 그대에게 해줄 선물이란
없습니다. 결혼이 최초의 선물이자 최후의 유일한 선물이니까요.
법륜스님 류의 조언은 대개 종교계에서 흘러왔거나, 현실과의 타협에 동원되기위한 합리화 방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이미 체념한 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저런 가르침이 실제로 불교나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카르마, 업의 개념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원시불교의 계율을 현실상황에 바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결혼에 대한 새로운 이상에서는 낮은 바람직성이라는 위계를 갖는 것일 뿐이죠.
이것에 대해 짧게 글을 쓰는 바람에 그냥 감 같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와 주변의 사례들을 보면서 거의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었지만,
학계와 종교계와 출판계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과학적인 각도에서 접근하는 학자나 출판물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만 학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혼동되는 일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야기는 외도를 합리화하는 주장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외도는 분명한 계약 위반이며 상실을 초래합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결혼에 있어서 불륜하지 않을 의무가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결혼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타인이 아닌 자기자신의 필요에서 나왔다는 것을 직시한다면 상대방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진다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혼은 수행이나 인격 수양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계약관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명심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평화의 가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의미 자체가 그러한 배타성 이외에는 양육 공동체로서의 의미 정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충고를 무시하고 배우자 선택에 있어 안일한 축성이나 헌신 따위를 고려한 개인은 결혼 후에 우울증이 올 수가 있는데,
이것은 현대 문명이 평생에 걸친 온갖 억압의 반대급부로서
개인에게 준 단 하나의 선물이자 기회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는 우울증 같은 것입니다.
단, 여성에 있어서는 조금 정도가 약한데 그것은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조금 긴 이유가 있습니다.
여하튼 제 생각이 만일 책으로 발간될 경우,
전문 심리학으로서나 과학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할 수 있고, 또는 종교적이거나 관습적인 권위에는 가로막힐 수도 있어도,
최소한 문헌학적인 권위는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결론은 많은 책과 사상을 접하고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니체조차도 결혼의 현대적인 의의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끝으로, 저의 글이 꼭 남자는 돈, 여자는 외모라는 씁쓸한 공식을 강화하는 근거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가도 되며, 외모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가도 됩니다. 큰 원칙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다만 현재까지는 저 공식이 자연스럽고 최소한 죄책감을 더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