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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일본 체류기2 한식식당
게시물ID : emigration_1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술취한멍멍이
추천 : 6
조회수 : 63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05 17:26:43

도쿄로 가는 내내 창밖 풍경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일본에 오고 몇달이 지났지만 계속 산속 호텔에 처박혀 있었던지라


일본에 있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던 탓에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도쿄로 가는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왼쪽으로 달리는 차량들과 어딘가는 다르게 생긴 건물들.


약간은 다르게 생긴 일본사람들의 얼굴과


그동안 다수의 한국인측에서 소수의 외국인을 보던것과 달리


내가 다수의 일본인들 사이에 있는 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쿄로 가면 방은 어떡하지? 아르바이트는..? '


지금까지는 호텔에서 남는방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서 지내왔지만 [그래봐야 계단아래의 작은 방]


이제는 완벽한 혼자였기에 걱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통장에 몇달간 일하며 모은 돈이 있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졸업직후 빈털털이 였던것과 달리 이제는 금전적 여유가 있기에 몇달 일을 안해도 일본에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쿄로 가서 조금 쉬다가 아르바이트를 해도 좋았을 터인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나는 바로 알바를 구했다.


그것도 한인식당으로...


일본어가 어느정도 가능함에도, 왠지 겁에 질려있던 나는


동유모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길이 후회가 남는 결정이지만 그때는 모두가 그렇듯 '설마 내가 가는곳이 착취하고 그런곳이겟어?'


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같은 한국인끼리 도와야지! 라고 허울 좋은 소리를 하지만


월급을 줄때 '너 저번에 아이스크림 먹는다고 쉬었잖아?' 라며 30분 제하고


'밥먹는 시간은 빼야지' 라며 1시간을 빼는 식으로 철저하게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돈을 적게 주었다.


처음에는 천사같이 보이던 한인사장이 악마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일의 내용도 많았다. 밥집인데 술도 팔았기 때문에 일식.한식.술을 만드는법까지 모두 외워야 했고


서빙으로 들어와서 주방일까지 해야했다.


8시에 출근해서 막차인 12시 40분 전철로 퇴근했는데 휴일은 주1회 일요일 하루뿐이었다.


그러고 월급은 18만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지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직 확실히 거절하는법을 몰랐던터인지라.. 그만두고 싶음에도 말도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보니


시급으로 환산하면 23~25만엔은 받을 수 있음에도 17만엔 18만엔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알았다고 말하며 알바생을 새로 구할때까지만 해달라고 말하길래 알았다고 했는데


알바생을 안 구하는게 아닌가?


또 두달이나 알바생을 구할때까지 일을 더 해야 했다.


8시에 출근해서 밤 12시 40분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군생활보다 더 혹독했던 생활이었다.


일본인 가게에서는 만석이 되면 손님을 물리기 마련인데 우리 가게의 사장들은 식사중인 일본인 손님들을 일어나게 만들어


자리를 채우곤 했다.


식사하다가 쫓겨나듯 불쾌한 얼굴로 일어나는 일본인 손님들을 보며 나 역시 불쾌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장밑에서 우리는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온갖 무리를 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알바생들이 수습기간인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말 호텔에서 일하던때가 나앗구나..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밥을 더 달라는 일본인 손님이 있었는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안된다고 말하고는


바로 옆의 잘생긴 남자손님에게는 밥을 고봉으로 쌓아서 주는 행태를 보이는 친족 직원들도 문제였다.


어이없어하는 그 일본인 여자손님의 표정이 반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일하는 직원이 모두 사장과 친족인지라 그들이 일을 대충대충 해서 생기는 문제를


내가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하루에 꼭 한번씩은 있었기에


고통도 적지 않았다.


그날도 면접오러온 알바생을 돌려보내는것을 보고 격분하여


"일주일 내로 안구해주시면 그냥 그만두겠다" 라고 말하고


결국은 일주일 후 그만두었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 일한돈은 결국 받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일을 겪고 일주일을 쉬며

'정말 한국인 사장밑에서는 일하면 안되겠다'


라고 뼈저린 후회와 깨달음을 얻었다.


좋은 사장도 있다는 소리를 하지만 호주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한인사장이 운영하는 알바는 절대 가지 않는게 좋다.


가족x

가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그후 나는 동유모에 한동안 가지 않았고 대신 타운워크라고 하는 알바 구인 광고지를 보며 일을 구했다.


구인광고에 전화를 걸어 일본어로 대화하는것은 의외로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였다.


하지만 혼자서 알바를 구하는건 역시 하늘의 별따기.


대부분의 일본인 사장들은 한국인이라고 하면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고는 다시는 연락을 주지 않았다.


계속 전화를 하고 퇴짜를 맞다보니 처음에는 솔직하게 다 말하던 나도


불리한건 숨기고 유리한건 열심히 어필하며 전화를 하게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없어져 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구하게 된게 건물해체회사의 노가다 인부일이였다.


하루 10200엔의 일급을 받을 수 있는 고수입직이였다.


보통일이 시급 850엔이었으니 일급 10200엔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나에겐]


"응 그래- 군대 나왔다고?"


"네."


"응. 그러면 오케- 내일부터 나오게"


"감사합니다!"


수십통의 전화끝에 나는 겨우 알바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자력으로 따낸 첫 알바자리였다.


노가다 일이 힘든걸 알기에 걱정이 많았지만, 다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났다.


혼자서 해냈다는 기분도 들었다.



걱정반 기대반에 그날밤은 잠도 잘 못이루며 내가 가야하는 곳의 역이름을 되뇌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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