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놈 예고편이 나오고, 마블 최초의 '빌런 히어로'가 나온다고 광고를 하기에 저는 굉장히 기대했습니다. 빌런이 주인공이 영화라니! 완벽한 제 취향이었거둔요. 그래서 개봉 당일(오늘) 바로 조조로 표를 끊고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아쉽게도 제 기대와 맞지는 않더군요. 영화가 별로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빌런이 아닌 그냥 '슈퍼히어로' 영화였거든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매력적인 빌런이란 히어로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빌런은 매력적이고,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뒤틀린 사상과 신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다크나이트가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로까지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빌런, 조커 때문입니다. 어벤져스 3편에는 타노스가 있었고, 원펀맨에는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빌런, 가로우가 등장합니다. 반대로 어벤저스 2편의 울트론이나 저스티스 리그의 스테판 울프 같은 경우에는 빌런의 매력이 부족하다고 사람들에게 대차게 까였죠.
저는 악역을 좋아합니다. 해피엔딩보다는 배드엔딩을, 유비보다는 조조를, 반지의 제왕보다는 왕좌의 게임을, 히어로보다는 빌런을 좋아합니다. 네. 특이 취향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베놈의 예고편을 보고 저는 베놈이 '매력적인 빌런으로써의 매력'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영화를 기대했습니다. 드디어 제 취향의 영화가 한 편 나와 주나 했지요. 아쉽게도 아니더군요, 역시 자본주의의 힘이란..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멀지 않은 미래, 핵전쟁으로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탈출했고, 인간이 살 수 있는 생태계를 가진 땅을 찾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는 우연히 풍요로운 생태계를 가진 외계 행성을 발견합니다. 당신과 친구는 그곳에서 토착 생물들을 사냥해 먹으며 몇 달을 보냈습니다. 이곳의 생명체는 인간보다 훨씬 저등했고, 신체적으로도 연약해 주먹으로 툭 치면 픽 하고 죽어 사냥하는 데에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상적인 인류의 미래 서식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외계 행성으로 다른 생존자들을 데려오려 합니다. 그 때 친구가 갑자기 당신의 손목을 붙잡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데려오지 말라는 겁니다. 당신이 무시하고 우주선에 탑승하자 친구는 기어코 점화되던 우주선의 연료 탱크를 폭파시키고 당신이 불타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친구는 홀로 외계 행성에 남아 계속 토착 생물들을 사냥해 먹으며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에서 친구의 동기는 여러 가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이 불러오려 하는 생존자 집단에 철천지원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 미개한 행성에서 자신이 혼자 신처럼 군림하려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이 행성에서 오직 자신만이 새로운 종의 아담이자 이브가 되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대답을 내놓네요. 그냥 이 행성의 토착 생물들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래서 당신도 죽이고,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피난민들도 토착 생물들을 해치게 두느니 그냥 기아에 허덕이다 굶어 죽게 놔두겠답니다. 햄버거 가게와 치킨집을 때려부수는 채식주의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데, 문제는 이 친구는 채식 비슷한 것도 하지 않는 놈이라는 겁니다. 계속 토착 생물들을 사냥해 먹고, 특별히 먹을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냥 파리 떄려잡듯이 무심하게 토착 생물들을 대량 학살합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건 뭐 하는 새끼지?'
영화는 베놈을 끈질기게 '슈퍼히어로'로써 다룹니다. 영화의 태도는 모순적인데, 베놈에게 나쁜 일을 시키면서도 그걸 자꾸 정당화시키고 유머로 묻으려고 합니다. "뭐야 경찰을 먹으면 어떻게 해! 빨리 병원에나 가!', '아, 너도 사람 머리 한 번 먹었었지? 별로 기분좋은 경험은 아니지.', '아, 아줌마? 자릿세 걷던 깡패는 제가 먹어버렸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코쓱)' 뭐 이런 식입니다. 영화에서 이걸 나쁜 일로 다루려 하지를 않아요. 주인공에게 법적, 도덕적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농담따먹기나 하면서 넘어갑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빌런의 악행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없습니다. 타노스가 생명체 절반을 쓸어버리고 '아 좀 죽을 수도 있지. 그래도 반은 살아남았으니 괜찮잖아? 환경오염도 반으로 줄고 ㅋㅋ' 하고 영화가 끝난 게 아니잖아요? 반대로 타노스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한 것인지를,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조명하고 그들을 위해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사라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조하면서 끝났죠. 악행은 빌런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이걸 강조하지는 못할 망정 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 걸까요?
이 영화에는 주인공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사람들의 끔찍한 고통도, 머리가 잘려나간 경찰관의 시체를 보면서 절규하는 유족들의 울부짖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은 익명화되고, 이들의 고통을 조명하고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악행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화는 시간을 단 1초도 배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왜 죽인 걸까요. 베놈에게 빌런의 매력을 부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히어로로써의 매력을 위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진짜 히어로가 되어서 선량한 지구의 인간들과 주인공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멋진 장면이 펼쳐지는데.. 히어로로써는 최고의 감동을 주는 순간이지만 빌런으로써는 글세요..?
베놈은 그럭저럭 괜찮은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CG와 액션은 늘 그렇듯 훌륭하고, 마블 특유의 유머도 중간중간 살아 있고, 주인공의 인간적인 드라마도 몰입이 괜찮고, 여튼 즐겁게 보았습니다. 다만 마케팅은 조금 잘못한 것 같아요. 베놈은 빌런으로써의 매력을 손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뒤틀렸지만 매력적인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설득력 있는 동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외감을 줄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빌런 슈퍼히어로'라는 것은 좋은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마블의 다음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광고했다면 조금 더 즐겁게 보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