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복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눈을 붙히고 있던 나는, 함선이 공간점프를 시도할때 일어나는 워프쇼크(warp shock)늘 느껴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다른 해병들은 그러던지 말던지 각자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다거나 자신의 가우스 라이플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며 다른 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침..
나는 턱 아래로 질질 흐르는 침을 닦으려 손을 올리다 문득 전투복을 입은 채로는 침 흘린것도 닦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손을 거두었다. 수건 뭉친거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의료선의 내부는 드랍쉽과 거의 같다. 탑승구로 들어오면 바로 앞에 의료장비와 전투원들의 장비를 놓을 수 있는 지지대 등의 장비가 있고, 양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파이프 비슷한 긴 방이 각각 하나씩, 뒤로 계속 가면 다시 방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한 명이 누워서 시술받을 수 있는 수술대가 하나 - 물론 무인장비다. 그리고 앞이 조종석. 조종석은 문으로 가려져 있다. 창문은 다섯군데에 있는데, 탑승구에 큰 창문이 하나, 탑승구 들어와서 양 옆에 하나씩, 그리고 수술대가 있는 방 양 옆에 하나씩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술대 쪽으로 향했다. 거즈나 수건같은 걸 찾아서 뭉치면 전투복의 굵은 손으로도 헬맷 내부에 있는 내 얼굴을 닦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앉아있던 다른 해병들은 무심히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각자 자기 할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럭키."
흰 천을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수술대 옆에 있는 수납칸에 올려져 있던 천을 전투복의 손가락으로 집은 뒤 돌돌 말아 턱을 닦으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자고 있느라 어느 함선으로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커다란 격납고 안에 내가 타고 있는 의료선을 비롯해 대충 봐도 열 대는 넘는 의료선들이 대기중인 것으로 봐 상당히 커다란 함선 같았다.
*삑* <무슨 일이시죠?>
조종사가 뒤에서 내 기척을 느꼈는지 문 너머로 무전을 보내왔다. 나는 천을 수술대 위로 집어던지며 얘기햇다.
"암것도 아닙니다. 졸다가 침 흘려서 좀 닦느라고."
*삑* <전투복 입고 있으면 고역이죠. 간지러울 때라던가 아주 죽을 맛이잖아요.>
"말도 마쇼. 그나저나 앞으로 얼마나 남았수?"
*삑* <아마 에이프릴의 내부로 무전이 들어올 거예요. 그때 가서 알겠죠.>
"에이프릴?"
내가 창문에서 눈을 떼며 반문하자 조종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삑* <이 의료선 이름. 애칭이죠.>
별 시덥잖은 짓들을 다 하시는군.
나는 대화가 길어질 것 같자 조종석 입구 쪽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문이 옆으로 열리자 조종석에 앉아있는 여군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전신전투복이 아닌 무전을 위한 헬멧과 기본 방어장비인 구형모델 합금흉갑만을 하고 있었다. 헬멧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삐져나온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 에이프릴이 들어있는 이 함선은 뭐요? 졸고 있어서 못 봤는데.. 전투순양함?"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조종석에서 무슨 버튼을 삑삑 눌러대며 말했다.
"헤라클레스급 신형구축 전투순양함, 제우스 3호. 당신들 실어올리고 30분도 안 되서 올라탔는데, 꽤 피곤하셨나봐요?"
"점프할때 깼지."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조작이 끝났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입 왼쪽에 나 있는 작은 흉터와 약간 처진 눈을 한 평범하게 생긴 동양계 여군이었다.
"그래서, 뭐 필요한 거라도?"
"아니 뭐.. 대화가 길어질 것 같길래. 이름이 뭡니까? 통성명이나 합시다."
"제인이예요. 제인 황."
"내 이름은 좀 긴데.. 알이라고 불러요."
"통성명같은거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네요. 어차피 여기서 내리고 나면 다시 보기 힘들텐데."
제인이 쿡쿡 웃으면서 얘기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전쟁터에서 뭘 바라겠수."
*삑* <여기는 제우스 3호 격납고 통제부. 8번 의료선, 응답하라.>
우리가 하고 있는 얘기를 비집고 들어오듯 조종칸 앞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제인은 황급히 헬멧을 고쳐쓰면서 대답했다.
"여기는 8번 의료선 에이프릴, 무전수신 완료. 무슨 일이죠?"
*삑* <드랍오프(drop off)까지 5분 남았다. 출격시 저그의 격렬한 저항이 있으리라 판단되니 신중을 기하도록. 오버.>
"라져."
제인이 안전벨트를 하며 내게 말했다.
"빨리 돌아가죠? 슬슬 파티 시작인데."
"당신 넉살도 좋구만."
"살아서 다시 보면 한잔 하자구요."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입가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윙크를 하자 나는 손을 흔들면서 문 밖으로 나섰다. 잡아먹히겠구만. 무서운 아줌마야.
해병 한 명이 투덜거리더니 안면보호대를 내리며 전투복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전투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 역시 안면보호대를 내리며 안쪽에서 비춰지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모든 장비 녹신호, 99.5프로 이상. 기압체크, 산소체크 이상무..
나는 이어서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몇 번을 해보는거지만 참, 직접 신경을 연결해 꼭 내 손가락처럼 움직이는 이 쇠막대를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해진다.
*삑* <순양함 격납고 열립니다. 곧 이륙할테니 자리에 앉으세요.>
쿠구구궁
제인의 무전이 끝나자마자 무거운 기계음이 들리며 격납고가 열리는 것이 탑승구 쪽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시야가 확보될 정도로 격납고가 열리기 무섭게, 확실히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체를 한 무언가가 날개를 펄럭이며 확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뮤탈리스크라고 했지 아마.
*삑* <1번 의료선 이륙.>
*삑* <2번 의료선 이륙.>
*삑* <3번 드랍쉽 헤르메스, 이륙.>
*삑* <4번 의료선 화이트윙 이륙합니다!>
*삑* <5번 드랍쉽 이륙.>
*삑* <6번 드랍쉽 이륙함다.>
*삑* <7번 의료선 이륙합니다.>
차례대로 무전이 울려퍼지며 예비가동을 해 둔 의료선과 드랍쉽들이 차례차례 이륙했고, 이어서 웅웅거리는 우리 의료선, 에이프릴의 엔진소리를 뚫고 제인의 무전이 들려왔다.
*삑* <8번 의료선 에이프릴 이륙.>
의료선은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의에 더불어, 치료목적을 가진 보조선이기에 기본적으로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발 보다는 훨씬 빨랐고, 에이프릴은 곧 황금색 햇볕이 비치는 하늘에 수많은 기계덩어리들과 괴물들이 뒤얽혀 싸우는 아수라장 사이로 빨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