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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스톡홀름 신드롬
게시물ID : readers_146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풀
추천 : 13
조회수 : 435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8/11 21: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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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꿨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해초마냥 목덜미에 착 달라붙어 있다. 눈을 뜨기 전에 숨부터 크게 들이 마셔본다. 어딘가 익숙지 않은 냄새. 사실 누구의 집이든 각기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인데, 여긴 우리 집이 아니다. 어쩐지 눈을 뜨기가 겁이 난다.
 

 
깼니?”
남자 목소리다. 아빠보다는 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깬 거 다 알아. 눈 좀 떠봐.”
셔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입가를 찡그리며 실눈을 떴다.
 
 
손자국으로 군데군데 뿌옇게 흐려진 안경알, 어쩐지 색이 조금은 바랜듯한 금빛 안경테. 구겨진 셔츠와 면바지엔 정체모를 얼룩이 잔뜩 튀어있었다. 남자는 기름진 콧잔등위로 안경코를 밀어 올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나쁜 아저씨.”
지나친 솔직함이 얼굴의 솜털마저 곤두서게 만들었다.
집에 가야돼요. 엄마가 기다려요.”
보내주긴 할거야. 아직은 아니지만.”
좌우로 길게 벌어지는 입술 안쪽으로 슬쩍 드러난 푸른 이빨.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충치 때문일까. 남자에게서 좀 더 떨어지기 위해 상체를 일으켜 엉덩이를 한껏 뒤로 뺐다. 재빨리 둘러보니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다. 아니, 정확히 똑같지만 우리 집과는 대칭이다. 우린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화요일, 목요일은 레슨이 없으니까 30분은 일찍 끝나지. 일찍 끝난 날은 넌 꼭 미용실 건너편 가게에서 피카츄 돈가스를 사먹고.”
남자는 내 레슨요일과 습관까지 알고 있었다. 이제야 돈가스를 먹고부터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떴을 때보다 곱절은 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 돈 없어요.”
내가 초등학생 푼돈이나 뜯을 만큼 궁상맞아 보이니?”
울먹이는 내게 남자는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일종의 실험이지. 나한텐 아주 중요하거든.”
, 무슨 실험이요?”
아빠 서재에 꽂혀있던 731부대 마루타에 관한 책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나를 데리고 대체 무슨 실험을 한다는 걸까? 기도하듯 그러모은 두 손은 땀으로 범벅이 돼 미끌거렸다.
미각은 인간한테 꼭 필요한 감각이지.”
남자는 벌떡 일어서 주방 쪽으로 향했다. 주방이라기 보단 그만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남자가 냉장고 문을 열자 이상야릇한 냄새가 코밑으로 날아들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은박지에 싼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이걸 개발하는데 3년 가까이 걸렸어.”
남자의 눈빛에선 어떤 비장함마저 보였다.
존맛분식. 기억나니?”
존맛분식이요?”
우리 누나가 하던 가게였지. 난 가끔 거기서 허드렛일을 했었고.”
그런데요?”
넌 적어도 일주일에 네 번은 가게에 들렀었어. 누나가 선보인 모든 메뉴를 죄다 섭렵한지 이미 오래였지.”
거기서 파는 건 다 맛있었거든요.”
어떻게든 남자의 호감을 사서 여길 빠져나가야 했다. 칭찬은 호감을 사는 데 특효약이고.
거짓말 마.”
정색을 한 남자의 얼굴은 끔찍하리만큼 차가웠다. 함께 굳어버린 내 얼굴을 보더니 그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런 걸로 속 좁게 복수하려는 게 아냐.”
 
 
남자가 은박지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네가 떡볶이 국물 한 숟갈로 양념의 비율차이를 알아채던 그 날, 범상치 않은 아이란 걸 느꼈지. 비록 누나 분식집은 망했지만 내 숙원을 꼭 이루고 싶었어.”
양념비율? 혹시 국물 맛이 미묘해 혹시 고추장을 바꿨냐고 물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첫 번째 모르모트가 돼줘야겠어.”
남자가 펼쳐놓은 은박지 안에는 육포처럼 길고 납작한 뭔가가 놓여있었다. 색은 마치 큰빗이끼벌레를 통째로 갈아놓은 듯 했다. 역겨운 비주얼이었다.
이게 뭐에요?”
인간의 잠든 원시성을 깨워줄 심오한 껌이지.”
껌이요?”
 
 
다들 문명사회의 완벽한 일원인듯 한껏 고상한 척들 하지.”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러나 난 경청하는 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내려놓고 깜깜한 방에 홀로 누워있을 때야 말로,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자신의 본모습을 찾게 되는 거야.”
, 그렇죠.”
남자가 껌을 내밀었다.
, 천천히 음미해 봐. 시간은 넉넉하니까. 물론 평은 솔직하게 해야겠지?”
선뜻 입에 넣기엔 너무나도 끔찍한 색깔과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 난 껌을 손에 쥐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것만 먹으면 집에 보내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그래, 눈 딱 감고 그저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면 돼. 그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껌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곧 야릇한 식감이 입안을 휘저었다. 이제 삼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미 내 혀는 본능적으로 껌을 맛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 앙돼! 턱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껌은 기다렸다는 듯 특유의 탄력을 뽐내며 입안 구석구석을 순회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난 결국 가쁜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대체 이건 뭐지? 단번에 맛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씹게 되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시판되는 그 어떤 군것질거리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한하고도 참신한 맛. 더 이상 껌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나는 씹고 또 씹었다.
 
 

저기, 아저씨!”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남자를 불렀다. 주방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던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돌아봤다.
준비 됐어?”
아니, 그게 아니라…….”
머뭇거리는 내게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울긋불긋 물든 앞치마, 왼손에 든 식칼, 충혈된 눈. 마음속의 말을 꺼내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잘 모르겠으니 조금만 더 주세요.”
난 또 뭐라고. 만들어 놓은 건 많으니 걱정 마.”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단지 떠나기 전에 껌을 좀 더 맛보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씹을 수 없을 만큼 턱이 얼얼할 때가 돼서야 평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몇 분 동안 장황하게 늘어놓은 평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마침내 남자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역시 넌 신의 한수였어.”
남자는 조그만 종이박스에 여분의 껌을 담아 건넸다.
이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우리 둘 만의 비밀이야. 난 네 이름도, 주소도, 학교도 알고 있어. 섣불리 떠들고 다녔다간 너뿐 아니라 가족들도 안녕치 못할 거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저씨.”
?”
“무슨 껌인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것만은 안 돼. 곱게 돌려보내 줄 때 가라.”
네에…….”
문을 열고나서니 놀랍게도 남자는 바로 앞집에 살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남자는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고, 그가 준 껌도 금방 바닥이 났다.
 
 

그렇게 십년이 흘렀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그 맛을 애써 혀끝으로 붙잡으며 난 오늘도 마트를 서성인다. 언제나 화려한 포장의 온갖 간식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마음 한 구석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늘 나를 괴롭혀왔다.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왜 날 선택했을까? 그리고 대체 그 껌은 뭘 위한 거였을까?
 
 
고객님, 이번에 새로 나온 상품인데 행사기간이라 원 플러스 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돌아본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큰 통에 담긴 껌. 포장에 그려진 모습은 어딘가 더 고급스러워졌지만 분명 십년 전 그 껌이었다. 나는 황급히 껌을 집어 들었다.
 
 
닥터존맛…….”
처음 보는 상호였다. 하지만 난 닥터존맛이 그 남자임을 운명처럼 알아차렸다. 가격은 제법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았다. 양 손 봉투 가득 껌을 사들고 돌아온 나는 마약중독자처럼 동공 풀린 눈으로 포장을 뜯었다.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껌통은 스펀지와 방부제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큰 통에 들어있는 껌은 달랑 다섯 개.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 껌을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벅차올랐으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껌 한 알을 입에 넣자마자 마치 제 3의 눈이라도 뜬 것 같았다. 심지어 십년 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괴물 같은 맛. 고작 손톱만한 껌 따위에서 이런 맛을 느낄 수 있다니. 마치 일국의 최고 존엄이 업무시간에 이탈해, 일곱 시간 동안 숨어서 아무도 주지 않고 혼자 다 씹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맛. 이건 껌의 혁명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그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날 한껏 도취되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인터넷 검색 창을 띄워놓고 닥터존맛의 정보를 찾고 있었다. 홈페이지엔 놀랍게도 껌 생산에 필수적인 주원료의 확보가 쉽지 않아 한정수량만을 판매한다고 적혀있었다. 그래, 엄선된 원료와 비밀 레시피. 적은 양에 비해 비싼 가격을 설명하기엔 부족함 없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입 속의 껌을 천천히, 정성스럽게 애무했다.
 
 

삼촌, 엄마가 밥 먹으래.”
열린 문틈으로 조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검지는 늘 그렇듯 콧구멍에 들어가 있는 채로.
금방 간다고 그래.”
나도 껌 줘.”
마치 내가 닥터존맛이라도 된 듯 괜히 으쓱해져 거만한 표정으로 껌을 조카 손에 쥐어주었다.
 
 

?”
껌을 받아 입에 넣고 신나게 주방으로 뛰어가던 조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되돌아 왔다.
?”
삼촌! 이 껌, 완전 코딱지 맛 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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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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