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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자가 달린 그 순간 - <푸코의 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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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우림in손수
추천 : 1
조회수 : 44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10/16 14: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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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에 내 삶의 진자가 달려 있어."
열여덟에 만나 딱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고 다시 마주한 친구에게 말했다. 순간의 기억으로 삶의 반경이 결정될 수 있다는 걸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다들 그랬으니까. 금방 지나간다, 지금이 좋을 때다 ㅡ 하면서 달콤한 협박을 해댔다. 이후의 온 삶이 젊음에 기대어 시들어갈 테니 즐기라는 말은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진자는 오직 노화를 모르는 시절에만 걸린다. 나는 아닐 거라 바라면서도 내심 그 시간에 있음을 자랑했다. 

순간의 칼날을 디디고 싶었다. 여기저기 여러 번 적었다. 만트라였다. 베일 듯 시리게, 주어진 모든 순간을 느끼고 그것을 간직하고 싶었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기록 강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들을 재생할 다른 생이 없다. 기록은 기록대로 다른 생을 산다. 

지금이 좋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지할 때는 오히려 슬펐다. 서관 앞은 그림자가 없었다. 유독 맛있는 믹스커피를 뽑아내는 자판기 덕에 더 좋았다. 아담한 목련이 꽃을 뚝뚝 떨군 그 자리에서 바나나 껍질로 변한 꽃잎들을 보며 담배 한 모금, 커피 한 모금 번갈아 마셨다. 매번 그리워질 것 같았다. 미리 그리워했다.
우연한 순간들이 있다. 오려낸 것처럼 무대가 세워지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 순간에는 모른다. 일상을 잠식할 만큼 지배적이지는 않다. 다만 일상의 진자가 그곳에 걸릴 뿐이다.

나에게 진자의 이미지는 단순하다. 여기에는 분명한 시작이 있다. 친구와 나눈 몇 마디에 책을 꺼냈다.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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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와 부동점에 대해 소설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나. 름. 의. 해석을 적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어요!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고자 합니다. 귀한 의견 피드백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06년 가을이었다. 복수전공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며 공대 학사지원부에서 일할 때였다. 『장미의 이름』과 『바우돌리노』는 끙끙대면서도 재미있게 봤으면서 『푸코의 진자』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세기말 집집마다 유물로 있던 책이어서 그랬을까? 람세스, 삼국지 그리고 "푸코의 추"... 이 시리즈들은 책장과 동화되어 붙박이처럼 있었다. 펼쳐 읽는 책이 아니라 책장 그 자체 같았다.

전공책에서 벗어나 소설이 읽고 싶어 '아는' 책을 골랐다. 하필이면 초반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에코의 소설을 고른 거 보면 그때는 책을 무슨 퀘스트 깨듯이 읽었던 것 같다. 첫 장 3번 주석에 책의 결말을 포함한 중심사상이 떡하니 소개되어 있었다. 역자의 월권이라며 분노할 정도로 『푸코의 진자』는 내게 이름만 익숙할 뿐 생소한 책이었다.

영화 다빈치코드가 유행하기 전부터 비밀문서나 위경에 대한 '불경스러운' 추리소설들이 꽤 있던 걸로 기억한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미켈란젤로의 복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은 줄거리나 전개 방식, 지적인 오싹함으로 월등했다(!!). 『다빈치 코드』는 오히려 무난했다. 난 그중 하나 꼽으라면 『푸코의 진자』를 든다. 에코는 그냥 하나의 장르 같아서 추리소설로 정의하기도 애매하다. 그리고 에코의 글은 ㅡ 문장이 남는다.

아리송한 철학책만 보다가 읽은 소설책이라서 그런 건지, 건지고 싶은 게 많아서인지 난 이야기를 구조와 개념으로 분해해서 읽었다. 소설책에 줄을 긋고는 혼자 웃었다. 세피로트 나무를 그리고 줄거리를 적으며 필기까지 했다. 그때는 내가 책을 읽을 줄 모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지금은 고맙다. 기억하고픈 문장들이 하늘색으로 툭툭 튀어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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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는 실로 존재했던 결사단을 불러온다. 주인공들이 구성한 성당 기사단은 물론이고 연금술사들과 나치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실재가 되듯 에코의 픽션도 프레임을 넘나든다. (실로 그런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은 미스테리를 얽었다가 그것이 진짜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진자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줄거리를 끌어가는 '푸코의 진자'이다. 천장에 매달린 물리적 실체이자 비밀의 종착점이다. 벨보의 끝이기도 하고. 비밀을 찾으려는 자와 자신을 지키려는 자의 중심이 여기서 역전된다. 다른 하나는 메타포로서의 진자이다.

까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는 장난삼아 진지하게 판을 짠다. 
까소봉은 중세 자료에 흩어진 단서들을 모아 성당 기사단에 대한 음모론을 구성한다. 여기에 출판사 관계자인 벨보와 디오탈레비가 참여한다. 벨보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허구에 몰입해서 그것이 실재인 양 빠져든다. "언어의 배후에 있는 의미를 읽으려 하다가" 의미를 만들어 낸다. 무슨 비밀이 있겠거니 구성한 일이 비밀 전승이 되고 마침 그것을 교의로 삼은 밀교 집단에 쫓기게 된다. 꾸며낸 일이 누군가에게는 진리가 된다. 음모론은 결국 실제의 구조물 '푸코의 진자'에 마지막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비밀, 세상을 전복시킬만한 힘을 가진 단 하나의 진리는 무엇인가? 결론은 간단하다. ㅡ 없다. 애초에 비밀도, 열쇠도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로지 조각조각을 짜깁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주인공들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마지막 조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그들의 "앎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나의 비밀은 다른 비밀을 불러오고 비밀은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뉜 실체가 된다. 비밀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엇으로서 진리가 되어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힘을 행사한다. 교의의 신봉자들은 진리의 실마리만 가졌을 뿐 진리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비밀은 그들 바깥에 있어 찾아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까소봉은 비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의 힘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원한다. 

"비밀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더 큰 비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밝혀지는 순간, 모든 비밀은 모두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있다면 오로지 텅 빈 비밀이 있을 뿐이다. 잡으려고 할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런 비밀...... 

... 비의를 전수한다는 것은 끝까지 배움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비의 전수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비밀은, 내용물이 없는 비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은 천장에 매달린 진자마냥 하나의 고정점을 둔다. 숨겨진 진리라는 부동의 점에 따라 사건이 요동하지만 오직 진자의 진폭 안에서만 움직인다. ㅡ 비밀이 밝혀질 것이다. 진리가 있을 것이다. 

벗어난 자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헛된 놀이임을 직감한 리아이다. 허구에서 헤매는 까소봉에게 리아가 던지는 시원한 해석은 그들의 현실이 어디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직언하는 것이었다. "계획"의 출발점이었던 앙골프의 문서를 두고 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ㅡ 그거 거래 명세표예요! 

"호메로스를 읽는다고 해서 트로이아에 불을 지르러 가는 사람은 없어요." 

허구를 진리로 믿는 광신도에게서 벗어나는 길, 파국을 피하는 길은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디오탈레비는 병으로 죽고 까소봉은 우유부단하며 벨보는 이미 '진리'의 구성원이 되어있다.

"첫 번째 두려움은, 그 비밀의 내용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두 번째 두려움은 그 비밀이 공개되면 더 이상 비밀이 없게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었다. 비밀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곧 존재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뜻이었다."

추격자들은 벨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마지막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그를 잡아들인다. 허구를 구성한 벨보는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의미에 고개 숙이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진자처럼 매달려 죽는다. 진자가 운동을 멈추는 순간, 진자가 된 벨보에게 세상이 매달린다.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오류와 그 운행의 질서를 벗어난 벨보는 이로써 하나의 현수점, 부동점이 되어 세상을 매다는 천장 노릇을 하게 된 셈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 진자가 등장한다. 벨보가 죽음으로써 상징한 것이 바로 또 다른 진자이다.
지동설이 가져온 것은 관점의 전복이었다. 이리저리 오가는 원구는 지구의 자전을 증명한다. 진자 앞에서는 내가 선 땅이 변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여야만 했다. 인간이 디디고 있으므로. 거대한 움직임이 있고 나도 모르게 그 운동에 실려간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하늘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선 이 확고한 땅이 움직이는 것이었구나! 
에코는 진자의 이미지를 한 번 더 뒤집는다. 전복을 내포한다지만 그래도 진자가 나타내는 것은 하나의 진리, 하나의 진자, 그 진자가 매달린 하나의 점, 하나의 운동, 즉 절대성이었다. 주인공들과 추격자들이 찾아 내달린 하나의 비밀이었다.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비밀은, 세포로 하여금 저희 본능의 지혜에 따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비밀이다."

바깥에서 그 자체 완결된 것ㅡ그렇게 믿는 것ㅡ으로 존재하는 절대성은 결말에 이르러 수많은 개별자의 진리로 분화한다. 벨보가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모두가 진자가 된다. 역전된 고정점인 진자를 두고 이제는 세상이 움직인다. 이 세상은 누가 보아도 같아야 하는 추상적 천장이 아니다. 진자인 나와 이어진 구체적 세계이다. 진자가 매달린 각각의 천장은 진자 수만큼의 우주이다. 
상대성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진자가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에펠탑까지도. 까소봉은 에펠탑을 보며 "우주의 천장에다 파리를 건다"라는 말을 비웃는다.

"천만에, 파리는 우주를 첨탑에다 걸고 있었다. 이로써 이 또한 진자의 대용물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해체된 진리는 다른 비밀을 찾는다. 그러나 이번은 이전과 다르다. 절정인 "예소드"와 벨보의 죽음 이후 결말에 이르는 짧은 독백인 "말후트"는 해체와 재건의 시나리오이다. 에코의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폐허가 아니다. 그의 상대성은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진리는 다시 세워진다. 진리는 내용이 아닌 존재 방식으로 재정립된다.
줄거리를 이끌어 온 화자, 까소봉을 통해 두 번째 진자의 비밀이 드러난다. 진자가 감춘 진리는 한 '점'이었다. 진자를 움직이게 하지만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 에코 특유의 온갖 암호로 가득 찬 도입부에서 까소봉은 '푸코의 진자' 앞에 선다. 그리고 관광객이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 에코는 이미 처음부터 비밀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구는 돌지. 그러나 저 점은 안 돌아. 묘한 거지."

두 친구의 죽음 목격한 까소봉은 자신의 결말을 예감한다. 발단이었던 앙골프의 문서는 리아의 말처럼 그저 명세표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백일몽이 진실이라 믿었던 벨보의 글에 “마지막 단서"가 있는 게 아닐까?  
야코포 벨보, 그가 스스로 진자가 되어 매달리면서까지 찾던 것, 그러나 깨닫지 못한 진리는 어린 야코포가 불었던 트럼펫의 마지막 숨이었다. 그의 부동점은 그 어떤 바깥의 비밀도 아닌 자기 삶의 순간이었다. 민병대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진 도, 미, 솔, 도의 마지막 도. 야코포는 이 도를 "'태양에 이르도록' 길게 길게 불었다... 소등나팔을 불라고 해도 거절할 거야. 이대로, 영원히, 이대로 있을 거야."

"그가 계속해서 그 가상의 음절을 불고 있었던 것은, 이로써 태양을 그 자리에다 묶어 두고 있는 끈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로써 태양이라는 항성의 운행을 붙잡아, 영원히 정오에다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 모든 것은 야코포의 트럼펫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
그날 야코포 벨보는 <진실>의 순간을 응시했다... 진실은 단순하므로(그 너머에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그래서 그는 시간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
야코포 벨보는, 자기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었으며, 평생 그 한순간의 경험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른 순간을 기다리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킨 것이었다.
...
그는 그것을 획득으로 기억하지 않고 상실로 기억했다. 이것이 비극이었다.
...
벨보는, <기회>를 노리면서 한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 탄생과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계시의 순간이 그러하듯이,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하고 찬란하고 풍부하다."

삶의 진자가 걸린 단 하나의 순간, 이것이 비밀이자 진리이다. 해석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로서의 순간은 삶을 결정짓는다. 
까소봉의 삶이 매달린 한 점은 잘 익은 복숭아를 한 입 가득 베어먹은 순간이었다. 산등성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야 그는 그것이 "<하느님의 왕국>을 이해하고 그것과 일체"가 되었던 순간임을 깨닫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푸코의 진자』에서 갖가지 알레고리와 메타포, 철학적 개념들을 얽어 화려한 태피스트리를 지어낸다. 허구와 실재, 절대성과 상대성, 감추어진 것과 밝혀진 것 등의 뚜렷한 대립항들이 팽팽하게 극을 엮어간다. 그러나 정작 갈등은 사건 너머에서 해소된다. 해결점이라 여겨진 '푸코의 진자'는 실체가 아닌 메타포로서 ㅡ누누이 예고된ㅡ 반전을 이끌어낸다.

진자의 메타포는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진자들의 다양성이라기보다 진자들의 운동 방식과 그것을 결정하는 부동점이다. (바로 그 역주 3번처럼) 
진리는 없었다. 있다 해도 알지 못한 채 끝났다. 진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가지론이 곧 상대론인 것은 아니다. 알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다 진리일 수는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어쨌건 간에 우리는 어딘가에 매달려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코는 진리가 작동하는 형식을 부동점과 진자의 관계에 비추어 그려낸다. 부동점의 내용은 진자마다 다르다. 그러나 진자가 점 하나에 매달려 있으며 그것이 진자의 운동을 결정한다는 형식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추억이라 부르는 결정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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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광장 서점은 책을 사면 포장까지 해주었다. 세계문학 시리즈는 열린책들 디자인이 제일 예쁘다. ^^

'친구와 나눈 한 마디에 책을 꺼냈다.' 그리고 여기까지 쓰게 되었다. 친구에게 내가 그린 진자의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장황해졌다. 적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ㅡ 괜히 시작했어!
감히 에코의 글을 다루겠다고 나섰으니 거참 겁도 없다. 마무리까지 내려온 게 신기할 지경이다. 오랜만에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이렇게 묵직해질 줄이야... 그래도 재미있었다. 스물넷의 가을을 채운 이 책이 나의 방향을 덧칠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늘색 색연필로 박박 줄을 긋다 못해 한 페이지가 전부 색칠이 될 때까지 읽었으니 이 또한 나의 진자가 걸리는 점이 되었을 것이다. 

에코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고 하지만 난 삶의 진자가 걸리는 순간으로 하나만 꼽을 수는 없다. 처음 보면 별처럼 보이는 은하계와 같이 참 많은 순간이 있었다. 우선은 열다섯에, 그리고 이 친구를 만난 열여덟에, 『푸코의 진자』를 읽었던 그 몇 년에 특히나 많이 있다. 지금의 삶은 언제나 확신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미 얼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란 존재는 그 엉성하고 희미하고 아름다운 기억들로 이루어진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명한 것은 어떻게 각색되건 나는 그 순간을 살았고 그것을 나로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한순간을 영원히 바라보는 것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

주홍빛 밤하늘이었던 걸로 보아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은 디지털단지가 된 구로공단의 어떤 건물 옥상이었다. 캔커피 두 개를 사들고 올라가 담배 한 대씩 피우고 돌아가려 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창 퀸을 듣던 우리라서 메들리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 모르는 노래가 나왔다. 친구 혼자 부르기 시작했다. 
Love of my Life 
아슬아슬한 음정으로 중간까지 부르다가 가사를 모른다며 얼버무렸다. 싱겁게 웃고 내려왔다. 비 냄새가 풍겼다. 

이 어설프고 밍밍한 순간이 이토록 오래도록 빛날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기억되는지도 모를 열여덟의 한 조각이다. 그 시간 안에서 미완의 노래가 반복된다. 

기억은 변한다. 날씨도, 장소도, 옷도, 키도, 눈빛도, 목소리도 계속해서 변한다. 제일 먼저 날아가는 향기는 그나마 보존된다. 기억은 반복해 상영되는 안전한 영화관이 아니다. 그래도 어쨌든 거기 있다. 거기서 나의 삶을 부여잡고 있다. 지금도 더해지는 수많은 순간들은 성단이 되어, 점 하나가 되어 삶의 진폭을 결정한다. 내 삶의 진자가 걸린 그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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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log.naver.com/oolimoolim/22137836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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