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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변화 -1
게시물ID : religion_14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X-V471
추천 : 10
조회수 : 51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02 20:45:09
이곳 게시판에서 다뤄지는 신들은 현재의 고등종교의 신이라 과거에는 다양한 형태의 신들이 존재했었다는 점이 잘 부각되지 않는 아쉬움에서 씁니다.
 
알프스 드라헨로흐(Drachenloch) 산의 정상 부근 동굴에는 현생 인류 이전에 존재했던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무스테리안(Mousterian) 석기와 곰의 두개골이 돌을 짜서 맞춘 상자 안에 들어있는데, 곰의 커다란 대퇴골이 입에 깊숙이 물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동굴 속에서 행해진 의례의 하나로 그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 창과 같은 것으로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입니다. 즉, 이 흔적은 보다 풍성한 사냥물 수확을 위해 행해진 주술적 의례의 흔적이며 현생인류가 아닌 네안데르탈인 역시 이러한 종교적 사유가 가능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사유는 암각화 같은 것에서도 보입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여러 동물과 고래, 임신한 고래 등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냥의 대상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실제 사냥이 아닌 특정 행위가 사냥에서의 풍족스런 결과, 즉 식량 증식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이런 곳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알프스의 흔적과 같이 실제 사냥 대상의 구성물(가죽, 뼈)을 놓고 소통을 하여 마치 사냥 대상물인 동물들이 사람처럼 대화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대표적인 사례가 아이누족의 이오만테 의식입니다.
이 이오만테 의식을 소개한 사례에서는 우연히 산에서 사로잡은 어린 곰을 마을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곰이 잘 크도록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먹을 걸 주고 같이 놀아주고 합니다. 그러다가 곰이 어느 정도 크면 이것저것 치장을 한 뒤 마을에서 가장 사냥도구를 잘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없이 한 방에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는 매우, 아주 매우 조심스럽게 가죽을 마치 사람의 옷을 벗기듯 벗겨내고 머리를 잘라 풍성한 식탁 한쪽에 놓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런저런 행위를 하지만 이정도로 이 의식의 핵심 사유를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식에서 사람들은 곰에게 다음과 같은 기대를 합니다.
 
 
 
"네가 우연히 우리 마을에 왔지만 우리가 너를 잘 먹이고 보살펴 주었다. 따라서 너는 네 마을로 돌아가 다른 곰들에게 잘 대접받았다는 걸 알려주어 다른 곰들도 오도록 해주어라."
사람들은 곰이란 존재를 사람과 같지만 단지 곰의 가죽을 덮어쓴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곰들(동물들)은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따로 사람들처럼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처럼 살며 밖으로 나올 때 가죽을 걸치고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들을 사냥하고 처리할 때 그들의 뼈나 가죽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다시 그 가죽을 덮어쓰고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동물들이 고기를 제공해주기 위해 가죽을 덮어쓰고 와서 사냥감이 되어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가죽과 같은 것을 다치지 않게 잘 처리해서 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냥의례의 사유는 아이누족만이 아니라 시베리아 지역 등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곳에서는 사냥꾼들이 추적하던 사냥감인 곰을 만나더라도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행세하며 곰이 사냥감이 되어주기 위해 온 것으로 대접합니다. 그래서 겨울잠을 자는 곰을 발견하더라도 기습하지 않고 잠을 깨워 상대하기도 한답니다.
 
이와 같은 사냥의례의 사유는 아마도 농경을 하기 이전의 수렵채취의 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급성장을 이룬 후기구석기에 구체화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구석기 시대의 사유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동시에 자연 역시 인간과 동질적으로 파악하는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자연에 인간의 형상을 부여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연에 인간의 형상을 부여한 것은 식량에 대한 인간의 욕망만을 위한 게 아니라 상호간에 동질적 존재로 봄으로써 존중과 이해의 호혜적인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지속가능한 식량 증식, 즉 사냥감이 끊임없이 오기 위해서는 암컷과 어린 새끼는 사냥하지 않는다와 같은 규칙이 필요합니다. 북미 인디언 가운데에서는 이런 사냥 규칙의 이유를 밝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사냥의례의 사유와 거의 같은 설정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에 자연이 사물화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자연은 피폐화되고 결국 다음 계절에 사냥감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자연을 존중하기 위한 사유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동물의 주(主) 개념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오만테 의식에서 동물들이 자기들끼리의 마을(이 마을에선 가죽을 벗어놓기에 사람과 다를 바 없음)에서 살다가 온다고 하는 것과 달리 모든 동물의 배후에 사람에게 동물을 보내주는 존재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동물의 주라는 개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좌측의 고래 무리 상단(그림으로 보자면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이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동물의 주는 보내준 사냥감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면 다음 계절에는 보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의 주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가 원하는 규칙들(역시 존중과 관련됩니다)을 엄수해야 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본다면, 아마도 이오만테 의식에서 보이는 개별 동물들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동물의 주 개념보다 일찍 나타났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주 개념이 그보다 집약적이고 추상적 사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후기구석기 인간들의 종교주술적 사고가 매우 구체적인 사물에서 보다 추상화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것들은 인격이 부여되긴 했지만 모두 그 외양이 인간이 아닙니다. 마치 서왕모의 오래된 모습은 아름다운 부인이 아니라 키메라와 비슷한 것처럼 이런 오래된 신격들은 사실 그리 추상적이지도 인간적 모습도 아닙니다. 동물의 주가 보다 추상적이라고 했지만 그래봐야 결국 여러 동물 마을을 하나로 뭉쳐놓은 정도일 뿐입니다.
이처럼 여러 고고학적 흔적, 그리고 현재까지 전승되는 의례들을 통합해서 살펴 나온 현생인류가 본격적으로 문화적 요소들을 발전시킨 후기구석기의 신격들 중 사냥 관련 신격(물론 사냥에 관련하는 게 이 하나의 사유만은 아닙니다.)은 지금 우리가 고등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적 형상이거나 고도로 추상화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화된 동물이거나 그것들을 뭉쳐놓은 존재였습니다. 보다 눈을 돌리면 그 형상이 동물이거나 성격이 매우 우스꽝스러운 신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캄챠카 반도의 축치족 창세신화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문화 영웅인 까마귀와 그의 아내는 땅의 작은 부분에서 홀로 살았다. 까마귀의 아내가 그에게 가서 세상이나 창조해라!”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정말 할 수 없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까마귀는 아내의 잠든 모습을 보았다. 그는 또다시 아내를 쳐다봤다. 그녀의 배가 커져갔다. 그녀는 자는 동안에 어떤 노력도 없이 만든 것이다. 그는 겁이나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아내는 쌍둥이를 낳았다. 까마귀의 대답이 흥미롭다. “그곳에서, 당신은 사람을 낳았군! 지금 나는 가서 세상을 만들거야.” 까마귀는 날면서 변을 보았다. 물에 떨어진 배설물의 모든 조각이 빠르게 커져 육지가 됐다. 그러나 신선한 물이 없었기에 창조는 충분하지 않았다. 까마귀는 , 내가 다시 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그것은 호수가 되었고, 오줌 줄기가 떨어진 것은 강이 되었다. 그는 더 멀리 날았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땅을 만들고 지쳐버렸고, 강과 호수들을 위한 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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