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재우는 일찍 퇴근했다. 희옥이 좋아하는 백합 한 다발과 조그마한 선물 꾸러미 까지. 아파트 문을 조심스럽게 따고 들어서자 아들 빈이가 반갑게 반겼다. "엄마는?" 순간 빈이의 작은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 "엄마 방금 잠들었어, 쉬잇." 재우는 한숨이 나왔다. 희옥이 병마와 싸운지도 어느덧 두달이 다 되어간다. 위암말기... 길어야 한 달이라고 했다.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잠자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누렇게 뜬 얼굴, 깡마른 몸매... 약을 먹었는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지지리도 복도없는 그녀... 성격 까다로운 남편 밑에서 군소리 한마디 없이 고생만 하다 저렇게 가야하나... 그런 와중에도 재우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지원의 생각이 일말의 양심을 찔러댔다. 지원은 재우의 직장 동료였다. 귀염성 있는 얼굴에 생기 발랄한 성격, 소심한 재우는 그녀를 남몰래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지원으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들은 것이다. 그녀도 재우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그렇게 진행 될 수 밖에 없었다. 희옥이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을 땐 그녀를 잃을 슬픔 보다는 지원의 사랑이 이루어 질줄 모른다는 기쁨이 먼저 앞섰다. 희옥의 얼마 남지않은 생이 마감할때 까지 재우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정말 죽을힘을 다해 헌신했다. 방청소를 막 끝낸 재우는 아내의 생일파티 준비를 위해 빈이와 풍선을 불고 있었다. 어수선한 소리에 희옥은 눈을떴다. 밖에서 생일파티 준비를 하나보다. 희옥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남편이 달라진 것이다. 무뚜뚝 하고 거칠기까지 했던 남편이기에 그녀는 정말 죽은듯이 지내야 했다. 그러한 남편이 그녀가 아프자 정말 180도로 달라진 것이다. 남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희옥은 그렇게 믿었다. 고통 때문에 아무리 짜증을 부려도 남편은 오히려 그러한 그녀가 안쓰럽다는 듯 자상하게 달래 주었다. 이런 재우에게 희옥은 감동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가자 폭죽이 터지며 어느새 준비했는지 3단 케익위에 그녀의 이름이 세겨져 있었다. "빈이엄마, 얼른 나아서 우리 세 식구 제주도로 여행 한번 가.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약속할수 있지?" 감동한 희옥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빈이를 위해서 죽는날 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그녀는 결심했다. 요즘 재우는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내가 변한 것이다. 분명 한 달을 넘기지 못할거라는 희옥은 벌써 석달을 넘기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빈이아빠, 저녁준비 다 되었어요." 그녀는 어느새 밥을 한공기를 다 비우고 있었다. 밥을 한 숟가락만 먹어도 화장실로 달려가던 그녀였는데. 그녀는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병원에 가볼까? 재우는 두려웠다. 병원에서 호전되고 있다는 말을 전할까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지원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다. "여보, 좋아진 것 같은데 병원에 한 번 가보지 그래?" 그말에 희옥은 미소만 지었다. "정말 그런것 같아요, 담에 같이 한 번 가요." 아내는 확실히 호전된 것이다. 재기랄 잘해주지 말걸. 방안은 예전처럼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갔고 빈이의 얼굴에서 아내가 아프고 나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가 번졌다. 깡마른 몸에 쑥 들어간 눈은 여전히 병자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재우는 미칠 것만 같았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다. 재우는 거실에 앉아서 담배만 연거푸 피우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어느덧 11번을 울리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재우도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갔다. 희옥은 깊이 잠이 든 듯 했다. 마른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가 선물로 사준 보석상자를 안고 자고 있었다. 재우는 자신도 모르게 보석상자를 들고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보석상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신의 행동에 재우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길고도 약한 힘겨운 숨을 토해가며... 정말 깊이 잠들었나 보다. 침대옆 창문을 바라보던 재우는 순간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를 살해하자! 병원에 가서 호전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에 살해하자. 남들이 보면 그냥 고통에 못이겨 자살한 걸로 알 거고... 재우는 조심스럽게 아내를 안고 베란다로 나갔다. 15층 베란다 밑은 정말 아찔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재우는 힘껏 희옥을 던졌다. 사람들은 모두 재우를 위로했다. 아내를 위해서 저렇게 까지 헌신했는데 마음도 몰라주고 먼저 간 희옥을 원망까지 했다.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내의 부검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후 경찰관 두 명이 재우를 찾아왔다. 떨리는 마음에 문을 연 재우의 눈이 차가운 수갑에 고정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채우고 있었다. "곽재우씨, 당신을 살인혐의로 체포한다." 재우는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목격자가 있었나? 재우는 눈앞이 깜깜했다. 언제 도착했는지 재우는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곧 오형사가 들어왔다. "이제 그만 불지 그래? 아내를 왜 죽였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겁니까? 아내는 자살한 겁니다. 고통에 못이겨 자살한 거라구요." 한심한 듯 재우를 쳐다보던 오형사의 입이 떨어졌다. "자네말이 맞어,현희옥은 자살했어." 재우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그런데 투신자살이 아니라 약물자살이야, 고통에 못 이겨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 거야, 어리석은 인간아. 그냥 두었어도 10분 후면 죽었을 텐데 뭣 하러 그런 짓을 했나?" 재우는 자신의 무지함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와중에도 눈을뜨지 않는 아내를 한 번은 의심해 볼만한데. 더이상 탈출구가 없었다. "그래도 고통은 없었을 걸세, 마지막 까지 곽재우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며 갔으니. 대단한 정신력 이야. 시체가 다된 몸으로 석 달씩이나 버텼으니, 사랑의 힘이란 정말대단하지 않는가, 자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해골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