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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세월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선생님들의 이야기
게시물ID : sisa_11200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넘어넘어
추천 : 11
조회수 : 1335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8/11/09 12:45:22
단원고 2학년 3반 담임이었던 김초원 선생님은 4월 16일이 생일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전날 자정, 반 학생 지민이가 5층 선실에 있는 선생님을 급히 불러냈다.

"수진이가 열이 나요!" 깜짝 놀란 김초원 선생님은 수진이가 있는 4층 선실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하하하" 불이 환하게 켜지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아이들은 축가를 부르고 귀고리와 반지를 선생님에게 선물했다. 김초원 선생님에게는 2014년 교사가 되고 나서 학생들에게 처음 받아 보는 깜짝 이벤트였다.

4월 16일 태어난 김 선생님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4층에서 발견됐다. 배가 기울자 아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4층으로 내려갔다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김 선생님은 다른 단원고 희생 교사와 달리, 참사가 발생한 지 3년 3개월 만에 '순직'을 인정받았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전 정권이 순직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창석 선생님은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녀 아이들에게 '또치쌤'이라고 불렸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학생들은 그를 잘 따랐다. 2017년 7월 11일, 그의 장례식에는 단원고 학생뿐 아니라 10여 년 전 상록중학교에서 재직했을 때 제자들도 찾아왔다. 옛 제자는 선생님을 정이 많고 늘 자신을 희생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수영을 잘하고 인명 구조 자격증까지 있었던 또치쌤은 참사 당시 학생들을 구조하다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수습 상태였다. 그의 아내는 참사 직후 진도 팽목항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남겼다.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아이들과 선생님 손 꼭 붙잡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와 줘." 고 선생님의 유해는 2017년 5월 세월호 선체 수색 과정에서 발견됐다. 참사가 일어난 지 3년 1개월 만이었다.

2학년 2반 전수영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2013년, 첫 부임지로 단원고에 배정받은 그는 제자들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다. 자신이 가르치던 1학년 학생들이 진학하자 2학년 담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 선생님은 선실에 물이 차오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주고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배가 침몰하는 순간 전수영 선생님의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구명조끼를 입고 어서 탈출하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애들은 입혔어요. 구조대가 온대. 얼른 끊어"라고 말하고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이번에는 남자친구가 전화했다. 선생님은 "구명조끼 없어.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생존자들은 전수영 선생님이 학생들을 밀어 올리다가 탈진하는 바람에 배를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구조대가 선생님을 발견했을 때에는 다리에 시퍼런 멍이 나 있고 발목이 부러져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수학여행에 동행했던 단원고 교사는 14명이었다. 그중 3명이 구조되고 다른 11명은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강민규 교감선생님은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팽목항 인근 숲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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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과 개신교인들은 희생 교사들을 기억하는 예배를 열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단원고 희생 교사를 기억하는 예배가 11월 4일 416생명안전공원 예정 부지에서 열렸다. 세월호 가족들과 기독교인 40여 명은 별이 된 선생님들의 이름을 불렀다. 청중이 다 같이 선생님을 한 사람씩 호명하면, 사전에 안내지를 받은 참석자가 앞으로 나와 고인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희생 교사들은 20~30대가 다수였다. 아이들처럼 그들 역시 못다 핀 꽃이었다. 이들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물이 차오르는 4층 객실로 기꺼이 달려갔고 구명조끼를 벗어 주었다. 그동안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선생님들 이야기를 듣게 되자 예배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마지막으로 최혜정 선생님의 사연을 소개하러 나온 박득훈 목사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선생님은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탈출하기 쉬웠던 5층 객실에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말하며 망설임없이 4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이날 사회를 맡은 예은 엄마 박은희 전도사는 "그동안 엄마 아빠들이 자식 잃은 아픔 때문에 선생님들을 한 분 한 분 눈여겨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태산같이 큰 분들이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순서에 없었던 노래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희생 교사 12명을 기억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416생명안전공원 설립을 위해 기도했다. 지난달, 안산시는 설립 준비를 위한 25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 명단은 비공개다. 예은 엄마는 "25인 위원회가 아직 회의를 열지 않고 있다. 내년 청사진을 구상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세월호 참사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구성된 2기 특조위는 빠르면 이달 안에 활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조사 대상이 두 분야로 나뉜 만큼 1기 특조위보다 인력이 넉넉하지 못하다. 세월호 가족과 기독교인들은 2기 특조위를 보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세월호 전담 조사·수사팀을 설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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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에 나온 김초원교사 이야기....
시신으로 발견될때도 아이들이 선물한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죠?ㅠㅠ
아버님은 3년 동안 목이 쉬도록 순직 좀 인정해달라고 울부짖고 다니다가 성대가 다 녹아내려 목소리를 잃는바람에 인공성대를 다셨고ㅠㅠ

그리고 미친 해경놈들은 잡아서 조사해야할, 지 먼저 도망간 선원들은 놔두고(이준석선장 해경 간부 집에서 재운건 유명한 얘기...참고로 그분도 시키는 대로 한것뿐인데 엄청나게 언론에 시달려 상처받고 이사까지 갔다함) 학생들 인솔자일 뿐 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인 교감선생님이나 붙들고 '이새끼 저새끼'하며 강압적인 조사를 했다죠? 안그래도 죽다 살아난 충격이 가시지 않은데다 죄책감이 엄청날텐데 결국..ㅠㅠ

그 와중에 단원고 교과 선생님들한테 시신 신원을 확인하게 시키는 미친짓을 저지르고 말이죠!! 다들 아시잖아요, 담임도 아니면 백단위의 학생들을 보느라 솔직히 가물가물한 거..그런데 부모도 보기 힘든 모습들을 보게 강요해?! 게다가 경찰이나 의사도 아닌 사람들이 평생 시신을 볼 일이 몇번이나 있었을까요??
선생님들이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며칠이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에요. (하긴 사고현장에서 애들을 구명보트로 끌어올리면서도 '씨발, 이새끼 존나 무거워.' '그거 놔라, 개×끼야.(불안한 마음에 구명보트의 밧줄을 몸에 감자 한 말)'등 쌍욕을 해댔다는 게 해경들이고, 죽다 살아나 심각하게 불안정한 구조생존자들을 아무런 안정조치나 보호조치도 하지 않고 기자들의 취재 세례에 노출되도록 몇시간을 방치한 인간들한테 뭘 바래.-_-) 참고로 당시 단원고엔 교생실습중인 분도 계셨는데, 아시잖아요...교생은 자기 모교로 가는 거..자기 후배들이고 며칠 전까지 봤던 애들이 그리 됐는데...

진짜 세월호 이야기는 보면 볼수록,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사회의 시스템과 인권보호라는 개념 자체가 상실된 사건이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출처 http://m.newsnjoy.or.kr/news/ampArticleView.html?idxno=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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