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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와 아가씨(하)
게시물ID : readers_326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콜이
추천 : 3
조회수 : 40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11/28 19:59:31

몇 일 전 문장연습(사투, 참견, 도도, 생각, 밤)에 썻던 댓글의 뒷 이야기를 써 보았어요!

검투사와 아가씨(상)
검투사와 아가씨(중)
검투사와 아가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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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가 술에 취해 집사를 경악시키기 몇 시간 전, 이제 막 투기장의 사투가 달아오르려던 무렵.

 검투사는 평소보다 이르게 결투를 결착내버리고는 스스로도 조금 어리둥절 해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투기장의 결투는 축제다. 그런 만큼 여흥도 중요하다. 결투장에는 단 두명의 검투사만 있진 않는다. 투기장에서 준비한 1인용 황소 마차나 족쇄 하나 달랑 묶인 식인 호랑이들이 있고, 그 외에도 도박꾼들이 상대 검투사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돈을 써서 집어넣은 장해물들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에 적당히 당해 구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 검투사에게는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 않으면 자연스레 모두가 그 재미없는 검투사의 패배를 바라게되고, 굉장히 악의적인 장해물들이 하나둘씩 결투장을 채우게 된다.

 1년 넘게 투기장에서 승리해 온 검투사에게는 당연히 여흥을 위한 노하우도 있었다. 그는 여느때처럼 달려오는 황소마차에 방패를 들고 부딪쳐 과격하게 바닥을 굴렀다. 숙달되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뼈라도 부숴지지 않았을까 저절로 걱정이 들게 만드는 멋진 연출이었다.

 그에, 아가씨가 비명을 질렀다.

 검투사는 단 한번도 눈 앞의 칼날에 겁을 먹은 적이 없었다.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다급함도 조급함도 그에게는 없다. 하지만 어째선지 오늘은 등 뒤의 시선에 초조함을 느꼈다. 식인 호랑이의 앞발을 코앞에서 피해내자 특등석의 아가씨가 졸도한 듯 했다. 그의 등을 밀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순전히 등 뒤에서 꽂히는 단 한사람의 시선이.

 '이건 살기의 종류인가..'

 이대로 계속 휘둘리다간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패배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마음의 뒤숭숭함이 오늘 처음 투기장에 데뷔한 상대 검객에게 첫 검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새파란 검날이 검투사의 가슴팍을 길게 그었다.

 하지만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도가 굉장히 극성이었던 덕인지 팔뚝에서 가슴을 거쳐 반대쪽까지 그어낸 검격이 기적적으로 그의 숨을 끊기에는 얕았다. 그리고 그 공격의 빈틈을 노린 검투사의 검이 검객의 목에 깊게 박혔다.

 언제나 생사는 겨우 그정도의 차이로 갈렸다. 오늘은 좀 억지로 운이 좋았다고 검투사는 생각했다.

 그런 것보다 다행이라면, 투기장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검객은 초심자 답게 움직임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관객들은 그의 목을 호쾌하게 쳐버린 것을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해도 지기 전에 끝나버린 투기장 축제의 아쉬움보다, 얼른 거리의 술집으로 흩어져 이 이야기를 떠들길 바라며 들떠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검투사에게 배팅해서, 돈을 잃고 비난거리를 찾는 사람이 딱히 없는 탓도 있었다.

 검투사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가씨의 곁을 지나쳐 투기장의 건물 안으로 향했다. 상처를 직시하길 피하는 것인지 아가씨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지나가는 그를 외면했다.

 투기장의 돌팔이 의사는 언제나와 똑같은 약초 덩어리를 검투사의 가슴에 길게 펴발라주며 말했다.

 "왜 안죽은 거야 이건."

 살아있는게 신기하단 듯이 말한다. 검투사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는 상처가 고통스러운지도 몰랐으니까. 이상하게 언제나 상처는 이 돌팔이 의사가 약초를 바르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어떤 얕은 상처도 어마어마하게 아프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피는 통할까 싶게 힘을 줘서 붕대가 감아지고, 검투사는 검과 방패를 내려두고 후원자가 기다리고 있는 투기장의 안쪽 방으로 향했다.

 그의 최고 후원자, 아가씨가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감은 붕대에 약초와 핏물자국이 번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동행한 집사에게 말했다.

 "바로 이동해요. 저택에 의사를 불러주세요."

 아가씨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인다.

 비명은 그렇게 질렀지만, 역시 여흥이 짧았던 것을 아쉬워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아가씨는 굉장히 오랫동안 투기장을 드나들어 온 골수 팬 중 하나였다. 아쉬움이 있을 법도 했다. 검투사는 아가씨의 다음 말로 질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가씨가 말했다.

 "이렇게 전투를 일찍 끝내실 줄은 몰랐어요."

 예상했던 정도의 말. 하지만 힐난은 아니다. 수줍게 기쁜듯한 기색도 묻어났다. 검투사는 의문스러웠다.

 '기쁨? 뭘 위한?'

 그 말을 끝으로 아가씨는 본인의 마차에, 검투사는 하인들의 마차에 함께 타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는 이미 호출된 의사가 먼저 와 있었다. 의사는 검투사의 붕대를 풀어내고 성분불명의 약초를 씻어낸 뒤, 다시 치료하고 진통제까지 처방해서 깨끗한 붕대를 새로 감았다.

 진통제 탓일까. 검투사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나른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처방한 의사의 말에 따라 진통제가 돌기까지 반시간 정도 안정을 취한 뒤 아가씨에게 호출되어졌다.

 커다란 테라스 창문으로 바깥의 정원이 내다보이는 방이었다. 차 한 잔을 앞에 둔 아가씨가 단아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

 방 안으로 불어 들어 온 바람에서 단 꽃향기가 난다.

 검투사는 풍경을 보며 정원과 관련된 일을 권유받게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은 어째서인지 검투사나 용병을 정원사로 들이는 일이 많았다. 연관성은 알 수 없다. 그들에겐 날붙이를 잘 다루는 이들이 정원 일을 하기에도 좋으리라 여겨지는 걸까?

 검투사는 그런 권유가 온다면 군말없이 응하리라 생각했다. 사투가 아닌 무언가 다른 일을 시켜준다면 그것으로 좋다. 투기장에서 사람을 베는 일 말고도 한명분의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 거절할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그것은 웬만해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니까.

 뭐, 사람의 목도 망설임없이 쳐내는 단호함이 정원을 관리하는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정원을 바라보던 아가씨가 검투사에게 시선을 옮겨왔다. 그리고 물었다.

 "정원사는 어때요?"

 그는 단답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네?"

 되물음. 의미를 알 수 없다. 검투사는 자신의 대답이 정확한 의미가 되게끔 덧붙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멈칫거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가씨는 말을 바꿔왔다.

 "그럼 제 호위는 어떤가요?"

 귀족 아가씨의 호위. 그것이 싸우는 일과는 썩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세부적으론 굉장히 지저분해지기도 한다는 것도. 하지만 일의 종류를 따질 생각은 아니었기에, 검투사는 마찬가지로 단답했다.

 "그것도 좋습니다."

 "..."

 아가씨는 잠시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드러날 기색이 없다. 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호의적인지 좋지않은 것인지도 느껴지는게 없었다. 아가씨가 신경써서 숨기고 있지는 않았지만, 검투사는 그런 생각을 헤아리는데 결코 능숙하다고 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아가씨가 조금씩 화가 나는 듯이 얼굴을 붉혀오고 있기에, 검투사는 자신의 행동에 무례가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대로 무례를 지적받아 쫒겨난다해도 좋다. 그래도 질문의 대답으로 자신의 실수를 지적해준다면, 검투사는 그것을 고칠 생각이었다. 아가씨는 대답 대신 뒤의 집사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뭐라구요?! 저..저녁 식사가 벌써 준비 되었다고요?!! 얼른 가야겠네요!!"

 그러곤 일어나서 쌩 나가버리려다가 검투사를 돌아보며 지적했다.

 "식사자리에 투구는 그.. 예의가 아닌데요."

 "아, 그렇군요."

 검투사는 이제야 대화에 있어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이 무례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저 고상한 아가씨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려줄까 고민하다가 서둘러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하며 자연스레 지적해 준 것이다. 라고, 검투사는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검투사는 사과하며 투구를 벗었다. 아가씨는 검투사가 투구를 잘 벗었는지 잠시 곁눈질로 확인하다가 "흠흠." 하고 만족스레 헛기침을 하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떠났다.

 이후 하인들을 따라다니며 낯선 옷으로 갈아입혀진 검투사가 뒤늦게 식사자리에 도착했을 때, 아가씨는 굉장히 기분이 들떠있었다. 잔에 채워진 와인이 반 쯤 줄어있는 게 보였다. 기다리다 살짝 취해버린 모양이다. 아가씨가 그를 보며 웃는다. 검투사는 멋쩍은 기분이 들어 물었다.

 "제 모습이 이상합니까?"

 아가씨는 웃음 반 설명 반으로 살짝 횡설수설하면서 길게 대답했다. 그리고 식사 내내 계속 실웃음을 지었다. 즐거운 느낌의 식사자리였다.

 식사자리의 와인은 굉장히 향이 좋았지만, 아쉽게도 파스타는 그가 즐겨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조금 낯설었다. 다만, 그런것 보다 신경쓰이는 점은 아가씨의 웃음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검투사는 생각했다. 의사가 진통제에 무언가 섞은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는 일이 드물었다. 상대가 분노해도 화가 나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상대도 베는데도 망설임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가씨의 웃음에 자신도 웃음이 나왔다. 처음있는 일이다. 즐거움이 번져온다. 느낌이 너무 이상하다.

 식사가 끝나고 아가씨는 티타임을 권했다. 2층 테라스에 올라 해질녘의 정원을 내려다보니 과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통제의 노곤함, 가볍게 오른 취기, 그리고 자꾸만 짓고 있는 웃음. 그런 것들이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정원의 모습을 보니 저것을 관리하게 되었어도 영광이었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검투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에 아가씨가 가볍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제 호위니까 말예요? 그런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장난기가 섞여있다. 아가씨는 취한 모양이다. 웃고, 차를 마시고, 농담을 하고, 가끔은 횡설수설하고 나서 얼굴을 붉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였기에 따라 일어난 검투사는 만일의 경우 곧바로 붙잡을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따라 걸었다.

 난간으로 걸어 간 아가씨는 그곳에 앉더니 묘기를 부렸다. 빙글 돌아 치마로 꽃흉내를 내는 묘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광대에 재능이 없었던 모양인지, 그대로 난간 너머로 떨어지려 했다. 곧바로 달려간 검투사는 그녀를 한쪽팔로 잡았다.

 곧바로 양팔로 잡아 끌어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다른 팔은 검에 그인 상처가 깊었던 탓인지 급박한 움직임에는 따라주지 않았다. 그 탓에 지금처럼 아가씨를 감싸 안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아가씨의 취기어린 시선이 그의 가슴팍을 빤히 바라본다. 가느다란 왼쪽 손이 올라와 새하얀 붕대를 더듬을듯 말듯 움직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는데,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려 왔다.

 "궁금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검투사는 우선 그녀가 차분히 얘기할 수 있게끔 난간에서 끌어당겨 제대로 일으켜세워 주었다. 아가씨가 다시 말했다.

 "나 궁금한게 있어요."

 검투사는 배움이 없다. 아는 것도 아가씨보다 터무니없이 적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과 대답을 피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행복해지면 안 돼요?"

 그에게 아가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대뜸 되돌아왔다.

 행복해지면 안 되느냐니.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검투사는 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인가 싶어 아가씨를 빤히 내려다봤다.

 눈빛은 취기로 젖어 촉촉해서 안달내는 듯 하다. 질문은 의도를 알 수 없다. 그녀는 그저 답을 재촉해 보인다.

 검투사는 하는 수 없이 평소의 그가 해버릇하듯 단답했다.

 "됩니다."

 아가씨의 머릿 속에서 또 무언가 수많은 생각이 휘몰아친다. 검투사는 그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 그녀가 갖는게 어떤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집사와 그녀 사이에 수많은 눈치들이 교환된다. 그런 것만을 전사의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가씨가 재차 확인 하듯 물었다.

 "된다고 한 거에요?"

 검투사는 확답을 주든 고개를 끄덕이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출정하는 선수처럼 손가락을 펴서 집사를 팍 하고 가르켰다. 지금부터 두눈뜨고 잘 지켜보라는 제스쳐였다. 그녀의 양 팔이 검투사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아가씨가 그냥 되는데로 저질러버리고 싶던 일, 집사가 어떻게 보고를 올릴까 겁을 내며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검투사는 귀족의 호위가 보통의 용병일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자주 주워들었다. 꽤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일어난다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입맞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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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으로 끊어놓고 보니까 게시글 하나에 다 올렸어도 괜찮았겠단 생각이 드네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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