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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는 골목 한쪽 전봇대 뒤에 숨어 빌라 쪽을 바라보았다. 2층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더 올라가는 모습이 계단 창으로 보이지 않았다. 2층에 살고 있나?
흠... 여기까지 온 것은 좋지만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가 문제였다.
빌라 앞에서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 있는 게 맞나?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하연이를 지켜볼까. 어차피 한지석의 목표는 하연이였다. 그래도 이전처럼 계속 옆들 지키는 건 사건을 유예할 뿐이다. 멀리서 감시하는 형태여야 하나. 하연이한테 걸리면 어쩌지.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나. 아니 한지석을 지켜보기로 했으면 끝까지 지켜보아야 하나. 어느 쪽이 정답...
“실례합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것은 경찰 두 명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스토킹한다고 신고를 받고 나왔는데...”
스토킹?
경찰은 내 교복 차림을 보더니 눈에 이채를 띄웠다. 그리고 이내 말투가 바뀌었다.
“신원 확인 좀 해도 될까? 학생증 좀 보여줄래?”
아. 젠장. 한지석이 눈치챈 것이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들켜버렸나. 나는 일단 침착하게 경찰의 요구대로 학생증을 꺼내 내밀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색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의문인 점이 있었다. 내가 쫓아온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경찰을 통해 나를 제재한 이유다.
만약 미행을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대응할 방법은 많았다. 우연을 가장에 직접 부딪힐 수도 있었고 나를 따돌리거나 계획을 미룰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고 이런 방법을 택한 건 나를 따돌리고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 말이다.
“A고 전남석. 그래. 여기 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었지?”
나는 경찰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먼저 경찰이 스토킹으로 신고받고 나왔다고 말했고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짓을 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뭐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지석이 가방을 메고 빌라의 입구를 통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마 말을 꺼내진 못하고 그쪽을 주시했다. 그러자 경찰이 나를 다그쳤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니깐?”
“그게...”
뭐라고 하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경찰을 떨쳐내고 한지석의 뒤를 쫓을 수 있지? 아니. 아니다. 이미 한지석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경찰을 떨쳐내고 바로 쫓아가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이미 들켜버린 계획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무언가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으니 잡힐 이유는 없었다. 스토킹도 그저 추측일 뿐이다. 수상한 짓만 안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달리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경찰의 태도가 점점 날이 선다.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대처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우리 학생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하연이네 반 체육선생... 그러니까... 그래. 오주혁이었다.
“누구시죠?”
경찰은 갑자기 끼어든 오주혁을 보며 약간 당황스러운 듯 말했다. 나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그가 여기서 나타날지도 몰랐고 나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만 있을 뿐이었으니까.
“얘네 학교 선생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신고가 들어와서요.”
“신고요?”
“여기 얘가 누굴 스토킹을 하고있다고...”
누구 맘대로 기정사실화를... 물론 맞긴 한데. 유죄 추정은...
“남석이 얘가요? 확실해요? 현행범이에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아니 명찰이 있으니까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것보단 갑자기 친한 척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니. 그건...”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애를 붙잡고 있어요?”
옆에 가만히 있던 경찰이 보다못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니 얘가 여기서 가만히 숨어서 저길 지켜보고 있었다니까요?”
그러나 오주혁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한걸음 맞서 나와 마주 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니 그의 큰 덩치가 유독 더 커 보인다. 위압감이 들었다. 불쾌한 느낌.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등이 아리는 느낌이다.
“그게 스토킹하려고 한 게 맞아요? 확실해요?”
“그건...”
“제가 볼일이 있어서 이리로 불렀는데 문제 있어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걸 신고한 사람이 착각한 거 아닙니까?”
오주혁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하자 경찰이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기 싸움에 밀렸다는 생각에 경찰은 얼굴을 붉히고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괜히 자기 학생 감싸 돌지 말고 애들 관리나 제대로 해요.”
그러고는 경찰차에 올라탔다.
공무집행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더 물고 늘어질 줄 알았더니 그냥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사실 날 구속할 거리도 별로 없고 괜히 힘만 뺀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해결되어버렸다. 이미 한지석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오주혁은 경찰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휴. 그래도 간단하게 끝났구만. 음. 그러니까. 남석이 맞지? 무슨 일이 있길래 경찰이 잡고 있는 거냐.”
그는 내 명찰을 슥 보며 말했다. 미묘하게 친한척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전에 알고 있었나?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꺼림칙했다. 한지석도 쫓아야 했다. 아니면 하연이를 지키던가.
그래. 여기까지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주혁에게 둘러대고 혼자서 한지석을 쫓는 것과 그리고 나머지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정도. 어느 쪽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후자는 꺼림직했다. 두려웠다.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알지만 리와인더의 직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직감은 항상 옳지만은 않았다. 전에 하연이랑 싸운 것도 리와인더 때문이었고. 일단은...
“아 감사합니다... 저를 알고 계세요?”
“저번에 교통사고 그거 너잖아?”
“아. 네...”
아. 하긴. 학교 앞에서 있었던 일이니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실려 갔으니 작은 사건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스토킹? 그건 무슨 소리고?”
“그게...”
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망설이자 오주혁이 덧붙였다.
“남석아. 내가 널 잘 모르지만 저번에 그 사고 일을 알기에 널 믿고 도와준 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대로 말하면 도와줄 수도 있고. 아니면 ...”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말끝을 흐린 부분은 은연히 협박을 깔고 있었다. 법적인 제재는 안 할 거라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 그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가 장난인지 착각인지 신고한 것 같아요.”
“친구? 누구지?”
“한지석이라고... 여기 사는데...”
나는 빌라를 가리켰다.
“그럼 그 한지석을 불렀으면 되잖아? 왜 그러고 있었던 거야?”
“아마 걔가 신고한 거 같아서... 장난으로 신고하고 곤란한 걸 보고 끼어들려 한 것 같은데... 선생님이 와서 그런지 아까 저기로 튀었... 도망간 거 같은데...”
“......”
오주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완전히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나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주혁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 애들은 어쩌구, 괜히 끼어들어다는 둥 중얼거리는 게 들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이상 추궁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주혁은 좀 투덜대더니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며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