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영화를 볼 때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음악을 들을 때도 우린 꼭 이유를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족속인 것이다. 왜 주인공은 18페이지 4번째 줄과 같은 행동을 하여야 했는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행위에 한가지씩 의미를 부여하고, 그 틀에 박힌 해석에서 만족하며 안주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짓이다. 같은 맥락에서 왜 내가 새벽 2시만 되면 옷을 걸치고 기숙사를 빠져나가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2시에 나가건 3시에 나가건 그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일 뿐이다. 언제나 호기심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어떤일이 일어나기 전의 경우와 일어난 후의 경우를 비교해 보았을 때, 그것은 종종 새로운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 중요한 동기가 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기 전과 목격한 후의 그녀에 대한 내 태도가 그러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어."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 정말이야." 단지 눈 앞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부족했다. 설령 그녀의 말이 진실이었다 하더라도 나에겐 그 말을 받아들일 용의가 전혀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를 그냥 보내주기엔 보내주지 말아야 할 이유의 비중이 너무 컸다. 때때로 이유는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금방 끝날거야. 고통은 순식간에 지나가서 어쩌면 거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으흐흑..." 통속적이긴 하지만 사실 모든 두려움은 대부분 절망과 눈물로 귀결된다. 난 이미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그 이유로 죽여야 할 사람을 살려두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는다. 그녀가 내 애인이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더라도 시시콜콜 이유를 따지다가는 평생가봐야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난 내 손때가 묻은 작은 손도끼를 치켜들었다. "돈만 아니었다면 너같은 새끼... 거들떠도 안봤을거야." "뭐?" 마침 그녀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녀의 입에선 생각지 못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려달라고 벌벌떨던 그녀는 이제 이 숙명적인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무덤덤한, 어쩌면 냉랭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독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독설이었지만 진실이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 결코 열리지 않는 자물쇠로 채워둔 판도라의 상자에 담긴 추악함을 들춰내는 집요함이 있었다. "넌 최악의 섹스파트너였어. 네 작은 물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지독한 냄새는 생각만해도 역겨울 지경이었지. 날 죽이고 싶으면 죽여. 난 결코 너 따위가 눈치챌 수 없는 기묘한 방법으로 다잉메세지를 남겨서 널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거든. 그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대로 죽여버리기엔 그녀가 너무 말이 많았다. "크큭큭, 대단하군. 정말이야. 죽음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선물을 주지. 너라면 분명히 맘에 들어할거야."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알고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고문도구가 아닌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꿀맛이라고 생각했던 것 처럼 관점에 따라선 나무젓가락이 총이나 칼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나무젓가락을 고문도구로 사용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엿같은 상황이다. 그녀가 조금만 더 조용했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끝날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다잉메세지는 나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어. 알려줘서 고마워." "천만해. 난 얼마든지 더 말할 수 있어. 흐으윽...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하지마 제발 부탁이야. 아아악." 손톱깎이로 그녀의 허벅지 살을 아주 살짝 도려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선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쉴새없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업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음을 각오한채 늘어놓았던 독설이 고작 한번의 손톱깎이질에 무너지고 있었다. 난 한국문화에 아주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똑같은 곳을 한번 더 찝었다. '서걱'하며 살이 잘리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하아아악... 그만해 제발 시키는 건 뭐든 할게..." 이거 정말 재밌다. 겨우 두번만에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단다. 한번 더 하면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무척 궁금했지만 손톱깎이는 나중에라도 계속 써야 했으므로 난 다른 것을 꺼내들었다. 숟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난 가스렌지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점화 버튼을 눌렀다. 수십개의 가스구멍을 따라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고 이내 숟가락은 불길에 휩쌓여 달궈지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달궈지는 동안 난 실뭉치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겁에질린 눈동자로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난 고문을 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별거아냐. 그냥 누가 그러는데 몸에 30분 정도 피가 안통하면 그 부분이 썩는다더라고. 정말인지 궁금해서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하, 하지마 제발... 정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고문아파 나..." 겁에 질린 나머지 그녀는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국어를 사랑하는 나로썬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정도가 전부였기에 난 그 부분에 관해선 너무 깊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 개자식. 당장 이 실을 풀어. 으아아악." 쉴새없이 나불대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야 겠다고 생각한건 그로부터 약 20분 후였다. 실로 묶인 그녀의 가슴이 시커멓게 죽어가자 패닉상태에 빠진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난 충분히 달궈진 수저를 조심스레 집게로 잡아 재빨리 그녀의 입속에 처 넣었다. '치이익'하며 살타는 소리가 리얼하게 들리는 동시에 그녀의 발광도 한층 격해졌지만 내가 잽싸게 청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휘감아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숟가락을 뱉어내진 못했다. "지친다 지쳐." 무려 6시간에 걸친 고문을 끝낸 난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조금은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 빈곤한 상상력을 아쉬워 하며 난 이쯤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의 성과도 거둘수가 있었기 때문에 난 흡족했다. 꽤 이뻤던 그녀의 얼굴이 진물이 뚝뚝 흐르는 한센병 환자처럼 변했고, 하얀 피부를 빈틈없이 수놓고 있는 손톱깎이 자국도 마음에 들었다. 자포자기 한 듯 어떤 미동도 없이 숨만 몰아쉬는 그녀를 보자 난 모종의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녀의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기 위해 난 샤워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거실로 나온 내가 거실의 풍경이 샤워를 하기전과 조금 달라져 있음을 깨닫기 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 개가으 새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내가 본 것은 시야를 온통 가리고 있던 프라이팬이었다. 곧 '터엉' 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상황이 역전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그녀가 손톱깎이를 쥐고 천천히 다가왔다. [끝] 출처 : 붉은 무당 벽돌집 작가 : Rikuh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