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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518이 북한군 개입되었다는 낭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에 큰 아쉬움을 느낍니다.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의 망언들은 가슴속 깊이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의 불씨를 지피기 위한 정치적 발언을 한것으로 보이는데 그에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길 바랍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배경-
1.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군사력을 이용해 집권하였기 때문에 대통령경호실,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세 기관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게 하여 권력을 견고히 하는 방법을 썼다.
2. 1979년 10월 16일~20일까지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공수, 3공수 특전사 두개여단과 해병1사단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진압에 성공했다.
3.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직접 내려가 본 사안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였으나, 경호실장 차지철의 지속적인 냉대와 무시속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다.
4.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이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주색에 빠져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도 떨어져 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피격한다.
5. 견제기관인 세 기관중 대통령경호실장은 피살되었고,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시해범이 되었으며,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은 피살되어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자연스럽게 권력중심으로 이동한다.
6. 대통령 사망후 계엄이 선포되었으며, 계엄은 헌법일부의 효력이 정지되고 군사권이 발동되므로 국가권력이 군으로 이동되었고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맡게된다.
7.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집권야심을 품기 시작했고, 전두환은 79년 12월 12일날 계엄사령관을 10.26 당시 청와대 별관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방조죄를 적용하여 강제연행한다.
8.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 없이 진행된 일이었고, 특전사령부와 육군본부를 쿠데타로 제압하고 노태우 9사단장이 전방을 지키던 9사단까지 수도로 불러들여 군사 무장상태로 최규하를 압박하여 새벽 5시 사후재가를 얻는다.
-5.18비극의 시작-
9. 군을 장악한 전두환은 집권욕심을 애초에 가지고 있었으며, 선례와 규정을 무시하면서 까지 공석인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고 계엄이 해제되면 권력을 상실하므로 어떻게든 계엄을 해제하지 않으려고 궁리를 한다.
10. 계엄을 해제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수선한 정국을 유지해야 했고, 대학생 시위대와 저임금 노동자들 사이에 숨어있는 빨갱이들을 제압해야된다는 명분으로 계엄을 유지해 간다.
11. 1980년 1월부터 특전사들을 대상으로 대모제압훈련인 충정훈련을 몇개월동안 지속시켜왔고, 80년 5월 14일 서울에서의 대규모 학생운동 제압을 명분삼아 계엄을 유지하려 하지만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는 "서울역회군" 선택을 한다.
12. 학생운동 시위진압 실패로 명분을 잃은 신군부는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에 조급함을 느껴, 북괴남침설을 흘린다.
13. 북괴남침설은 중앙정보부 발표이고, 일본내각조사실에서 정보를 받았다고 했지만 추후 일본측은 그런정보를 제공한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은 겸직중인 전두환이었다.
14. 북괴남침설을 전달받은 신현확 국무총리는 1980년 5월 17일 지역비상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한다.
15. 전국계엄으로 확대되자마자 신군부는 계엄을 해제하려던 국회의원 김영삼은 가택연금시키고, 김대중에겐 전남대 복적생 정동년을 만났다는것을 빌미로 내란선동자금을 전달한 간첩누명을 씌워 구속시키고 국회는 해산시켜버린다.
16. 광주에선 처음에는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비상계엄해제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퇴진운동이 벌어졌는데,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전남대에 주둔되어 등교를 막고 진압봉으로 학생과 만류하려던 시민들을 폭행한다.
17. 특전사들은 1월부터 지속된 충정훈련과 5월 14일 서울학생진압을 막으려고 동국대로 이동했다가 다시 광주로 이동하게 되는데, 잠도 못자고 이동만 하는 극심한 환경에 분노심과 적개심을 내적으로 가졌던터라 광주진압을 매우 잔인하게 진행한다.
18.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세지고 집단화되었고, 신군부는 부마항쟁때는 특전사로 제압한 전력이 있어서 광주도 동일하게 제압하기 위해 5월 19일 계엄군을 증파한다.
19. 거센 대치중 계엄군 칼에찔린 첫 자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19일 오후 고등학생 김영찬군이 계엄군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18일 폭행당했던 청각장애인 1명이 19일에 사망했다.
20. 고등학생이 총에 맞은 사건으로 20일에는 중고교 휴교령이 내려졌고, 버스, 화물차, 택시 등의 차량시위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을 항의하고자 MBC 건물에 화재도 발생한다.
21. 5월 21일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고,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시신들이 도심 곳곳에 발생되기 시작하였으며, 계엄군이 진압봉이 아닌 총기를 계속 사용하자 시민들도 스스로 무장하기 위해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낸다.
22.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공방을 벌이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한다.
23. 광주는 약 며칠간 고립상태를 유지하였고, 광주시민들은 시민자치제가 실시되어 전투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하였고, 주먹밥과 빵, 현혈등의 자발적 공동체를 실현했다.
24.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전남도청으로 들어갔으며, 시민군 항쟁지도부는 저들의 잔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죽음을 택하며 전남도청에서 총격 진압당한다.
-87년 6.10 항쟁의 밑거름이 된 광주민주화운동-
25. 87년 6.10 항쟁으로 국민들은 2가지를 얻는다. 우리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의 힘으로 최고권력을 제어할수 있는 헌법재판소의 설치다.
26. 권력을 잡은자가 계엄을 일으켜 헌법을 정지시키고, 계엄해제권한을 가진 국회를 해산시켜버려 독재체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국회의원들에게 불체포특권을 만든다.
27. 87년 6월 항쟁을 국민들이 결심하게 된 큰 동력이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며, 수많은 민주화 과정중에 광주의 희생과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북한군 개입설은 당시 신군부와 중앙정보부의 바램-
28. 북괴남침설로 비상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북한군 개입에 대한 조작을 시도하려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29.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선고까지 내렸지만, 증거라고는 전남대 학생한명이 방문 방명록에 이름쓴것이 전부였으며, 신군부 집권후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미국의 요청으로 석방시켰다.
30. 시민군안에서 계엄군의 첩자로 활동하던 장계범, 정향규는 첩자임이 발각되자 한명이 독침을 맞았다며 거품물고 쓰러지는데, 독침은 북한군들이 주로 사용하던것으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것을 흘리기 위한 조작임이 밝혀졌다.
어리석음으로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지는 맙시다.
출처 | 내 현대사 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