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보훈 행사를 기록하는 사진가 이세현입니다.
2019년, 우리 정부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념해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를 발족함은 물론, 다양한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각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을 기념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난해 11월, 저와 제 피앙세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만리대장정 -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노정 순례’를 다녀온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일까지 연재를 이어갈 계획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발대식 및 1차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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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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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독립운동
그리고 일제 강점기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운동이 무엇일까요?
바로 '3·1운동'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대한민국(大韓民國)’
우리의 조국인 이 나라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19년 3월 1일’ 이른바 ‘3·1운동’으로 불리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투쟁으로 시작합니다.
3·1운동은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 등 사회 각계각층 다양한 분야의 국민이
‘독립’이라는 단일화된 목표 아래 나라를 되찾고자 전개한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대규모로 이루어진 3·1운동은 이후 한반도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며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 된 투쟁 활성화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지난해 제99주년 3.1절 경축식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기수단이 내건 각기 다른 형태의 태극기들의 모습입니다. 각 형태에 따라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3·1운동에서 국민 참여를 바탕으로 발현된 민족의식과 정치적 관심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대한민국 촛불혁명’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 3·1운동은 선조들의 혁명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자신들의 일방적인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라는 형태로 바꿀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화통치는 표면적으로는 차별과 억압의 부분적 완화였으나, 사실상 한국 내에서 발생한 혁명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은폐하고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국내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밑바탕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조직화 되어가는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일제의 책략인 셈입니다.
문화통치와 관련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애국심 함양을 위한 루머로 평가받는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1945년 9월 12일, 일본으로 쫓겨가며 마지막 연설에서 했다는 망언]이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진 바 있습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朝鮮)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日本)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安倍信行, 1875~1953)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인터넷에서 생긴 루머엔 이러한 아베 노부유키의 손자가 현재 일본 정권을 장악중인 자민당과 그 수뇌격인 총리 ‘아베 신조’의 조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지만, 그가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는 반성도 사과도 없이 자신들의 국익과 정권 창출을 위한 용도로 한일, 남북 관계를 악용하며 과거 자신의 외조부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망언과 정치공작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분노를 이끌고 있습니다.
현재 자위대 행사에 참석하며 북한과의 전쟁을 독려하고 친일행각을 대놓고 보여주는 토착왜구들이 국회의원으로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과 그들이 협력적 동반자로 생각하는 일본 자민당과 일본 극우세력들을 보면 아직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느껴집니다.
최근 국내에서는 극우 친일파 후손들이 청산되지 않은 과거 잔재 속에서 당금의 대한민국을 좀 먹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한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방영된 EBS 채널의 ‘다큐 시선 – 우리 곁의 친일잔재’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으니 한 번쯤 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3·1운동은 당시 전체적인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끌어갈 이렇다 할만한 중심 조직이 없어 전국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는데, 프랑스 민중 혁명처럼 더 강하게 진행될 여지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민족 지도자를 표방하던 이들이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편승해 비폭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들의 동정을 얻고자 했으며, '독립청원'이라는 소극적인 방식에 의존해 최선의 결론에는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이 국내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될 당시에 주축이 될만한 중심 기관이 존재했다면, 그리고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혁명이 이루어졌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아닌 광복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3·1운동 이후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에 아쉬움과 반성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1운동이 발생한 이후, 강화된 일제 탄압과 추적을 피해 자유롭고 안전한 항일 투쟁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쪽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도착한 곳은 현재 중국 상해에서 외탄(와이탄) 항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모인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 체제에 돌입하고자 했습니다. 3·1운동 이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이곳 상해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이 점점 늘어나며, 이동녕 선생,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등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들이 일본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한 기관을 구성합니다. 바로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프랑스 조계에 모인 민족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이 다음날 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오늘날 우리가 ‘임시의정원 회의’로 부르는 회의에서 구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4월 13일은 당시 4월 23일을 목표로 준비되고 있던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선포 한 날입니다. 따라서 임시의정원의 구성이 완료된 4월 11일이 기존에 알려졌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즉, 정통성을 지닌 최초의 정부가 탄생한 날인 것입니다.
(지난 제99회 4.13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기념식 행사에서 재현된 임시의정원 회의)
이에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해 이루어진 제99회 4.13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기념행사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끝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한 4월 11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수립일로 바로잡는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임시정부 수립일 행사의 기록 촬영을 맡았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계기였기도 합니다. 이에 저는 문득 ‘내년이 100주년인데, 한 사람의 국민이자 사진가로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간 머물렀던 장소를 따라가는 여정을 떠나보자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1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점인 중국 상해로 향했습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제헌절 경축식 촬영이 예약된 7월 17일 이전에 돌아오기 위해 7월 3일을 출발일로 정했는데, 출발 직전 동행자의 건강 문제로 전 모든 교통편 예약을 취소하고 다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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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다녀와도 후회가 없도록 임시정부 사적지 순례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중국 특성상 교통편이 굉장히 열악해 철도의 경우 꼭 필요한 시점에 매진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데도 운영중인 사업체의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심적 부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출국 당일조차 전날 진행된 한 국제 게임 대회의 결승전 기록 촬영 결과물을
후작업을 끝내고 납품 후 출국해야 했기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도 작업을 계속해 중국행 비행기 탑승 30분 전에야 납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어놓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는 말처럼,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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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탑승한 비행기는
중국 상해 푸동 국제공항으로 가는 춘추항공 16시 55분 출발 항공편으로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2시간 10분 정도의 비행이니, 서울-대구 구간 KTX 탑승 시간 정도입니다.
100년 전, 작은 선박에 의존해 서해로 건너간 선조들의 고행과 대비됨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출입국 관리소에서 입국 심사를 마친 뒤 짐을 찾아 나오며 시계를 보니
시차가 반영된 현지시각 오후 6시 30분으로 겨울이 다가오는 대륙에는 이미 어둠이 자욱히 깔려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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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동 국제공항은 김포 공항이나 인천 국제공항처럼 공항에 지하철역이 연결되어 있는데
2호선(초록색)과 MAGLEV(자기부상철도) 두 종류입니다.
저희는 저렴한 2호선을 선택했지만, 두어 번 환승을 해야 했습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남경동로역까지 이동하며 느낀 점은 중국 대중교통이 꽤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과
지하철 운행 방식(일부 역의 편도 환승 – Guanglan Road Station)이 대표적입니다.
안내 방송이 중국어로만 이루어지는 점도 꽤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숙소에 도착후 체크인을 했는데 관광지라 비싼 가격에 불구하고
직원들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가능한 언어가 없어 체크인 과정이 꽤 번거로웠습니다.
동행자인 여자친구나 저는 중국에 와본적은 있으나 패키지로 움직였으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상과는 다른 현지 환경에 적응하는데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시간이 걸렸습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저희는 첫날인 만큼
상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와 민족 지도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외탄의 황포 강으로 나갔습니다.
상해의 밤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형색색의 불빛이 가득했습니다.
다소 유럽의 느낌이 스며들어 있는 건축물들이 조명을 이용해 거리 전체를 빛으로 채웁니다.
황푸 강변의 산책로로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오르막길이 보입니다.
길을 따라 중국 공안분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아마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느낌입니다.
황포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빌딩들이 아름답습니다.
상해 현대사에서 상징적 장소인 이곳 외탄은 과거에는 중산동로 일대 꽤 넓은 지역을 지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동방명주와 더불어 상해의 대표적 관광지로 부각되며
이제는 강변 산책로만을 외탄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황포 강을 따라 늘어선 고층 빌딩에는 형형색색의 빛이 가득합니다.
강을 따라 늘어진 고층 빌딩들에는 다양한 빛의 움직임이 이어집니다.
서울 광화문이나 63빌딩, 서울역 등에서 가끔 진행되는 미디어 파사드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저 멀리 고층 빌딩들과 함께 붉은 구조물은 인민영웅기념비입니다.
저희가 서있는 이곳 동방명주 맞은편 황푸 강변에서 인민영웅기념비 사이의 외탄공원은
1922년 의열단원인 오성륜 선생과 김익상 선생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장소이기도 합니다.
의거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정신은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저 멀리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가을밤의 운치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향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곳이 백여 년 전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 피로 얼룩진 곳이 맞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저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은 상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관련된 사적지들을 찾아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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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편에는 사진이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사진도 많이 첨부할 예정입니다.
상세한 일정이나 정보를 보길 희망하신다면
하단의 링크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중국 사적지 노정 순례 이야기는
앞으로도 여행기 형태로 연재될 예정이며, 포토에세이북을 출간 준비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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