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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K노인과의 대화
게시물ID : readers_147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ewllc
추천 : 4
조회수 : 25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8/12 21: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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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북(book) = 드럼 = 세탁기 = 빨래 = 인생

그렇습니다. 책은 결국 인생과 귀결됩니다. 우리 함께 인생을 위해 책게에서 책을 읽어요~


제작의도 : 추천을 많이 받은 글들이 다들 코믹에 초점이 맞춰진거 같아 진지하게 써봤습니다.

               네. 진지하게 그냥 생각나는거 눈에 보이는 것 들을 대충 짜맞춰 현대소설처럼 써봤어요.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썼으니 의식의 흐름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K노인과의 대화>

 새벽부터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읽고 쓰며 피곤한 하루를 시작한 탓인지, 토익 학원의 비싼 수강료를 차라리 치킨이나 실컷 시켜 먹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으로 학원 정문을 빠져나왔다.

'아침밥에 계란이 없어서 그랬어' 라는 변명으로 수업 때 졸았던 것을 위안하며, 시외의 'P' 시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깟 취직이 뭐라고, 먹고 사는게 뭐라고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력서에 한 두 줄 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지난주부터 'P'시에 있는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한달간의 봉사가 고작 이력서 한 줄 이라는 생각에, '광주성(볕을 쬐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생체의 반응성)' 이라는 한국어로도 잘 모른는 단어를 photoperiodism이라는 영어 단어로 암기해야만 하는 그 비합리적인 효율성에도, 많은 내 또래 친구들이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피곤하고 지친 내 일상을 움직이게 했다. 어쩌면, 위의 정도의 효율만으로 세상은 어찌어찌 돌아간다는 것임을 깨닳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번주부터 시작한 지긋지긋할것 같았던 봉사활동은 나름대로 보람차고 의미있는 일이였다. 몸은 힘들지만 비합리적 효율보다 더 큰 남을 돕는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봉사활동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드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오늘도 역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씻기고 점심식사를 도운 뒤 느즈막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천천히 혼자서 식사를 끝낸 K노인이 "힘들지"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른손 엄지부터 중지까지 손가락 세 개를 월남전에서 잃어버리고, 치매를 앓고있는 K노인은 월남전에 참여한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 항상 전시의 긴급한 상황과 자신의 활약상을 떠들며 봉사학생들을 그 긴 이야기로 지치게 만들곤 했다.


 또 이 지겨운 전쟁 얘기를 들어야 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이자리를 벗어나야겠다 판단하고, 급히 소시지를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K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 전쟁 얘기가 아니였다.

"어제 밤 하늘을 나는 대왕 오징어를 봤어"

전쟁 얘기보다 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M16 소총의 조준경이나 수류탄의 파편에서 대왕오징어로 각 주제간의 괴리감에 호기심이 생겨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어제 밤에 잠이 너무 안와서... 밖을 보는데 붕어 눈까리가 날 쳐다보고있는거여.. 가까이 갈라니까, 그 큰 눈을 두번 꿈뻑이고는 천천히 헤엄쳐가버리더라구.. 근데 붕어인 줄 알았던 그놈이 길이가 빌딩만한 대왕오징어에 붕어 눈까리를 붙이고 있던거더라고.."

...그냥 노인이 전쟁시절 총을 얼마나 멋지게 다뤘는지를 듣고 싶었다. 대왕오징어라니... 베트남에서 보았던 베트콩들의 삿갓이 오징어의 머리모양과 비슷한 것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며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제 자기전에 약 잡수셨어요?" 괜히 저녁타임 복지사의 직무태만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며 노인에게 물었다.

"응 먹었지, 그런데 말이야..."

약을 먹었다면 제약회사의 불량품 제조율, 그것도 아니라면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치매의 한 증상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왕오징어 이름표를 달고 있더라고.. 두번째 다리에 달려있었는데 이름이 James였어.. 말을 걸어볼려 그라니께. 월남띠 우리 부대 통신하던 양키놈 이름이 James였는디 그놈 이름이랑 똑같더라고"  뜻밖에 나온 James라는 이름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영어라고는 헬로우랑 쬬꼬렛이랑 코리아밖에 없는디 이상하게 그놈이랑 대화를 할 수 있겠더라고. 근데 헤엄쳐가는놈 뒤통수에 대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목소리가 안나오더란 말이지"

"ㅡㅡ삐,ㅡㅡ삐" 노인들의 낮잠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할아버지, 이제 주무셔야 할 시간이에요. 일단 저랑 같이 침대로 가요"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다간 나까지 치매에 걸릴 것 같다고 느끼던 찰나에 일과를 알리는 벨이 울렸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노인을 침대로 옮겼다.

'대왕오징어라니.. 차라리 인도 코끼기를 봤다고 했으면 가능성이 없진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하며 할아버지를 눕혔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하나 물고는  K노인의 어제와 오늘의 증상변화에 대해 생각했고, 치매라는 병의 증상악화가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 생각했고, 대왕오징어에 대해 생각했다.

노인들의 낮잠시간 동안 식당에서 또 그놈의 빌어먹을 비효율성을 위해 토익 책을 펴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대왕오징어 때문인지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낮잠시간이 끝나고 잠에서 깬 K노인은 내 얼굴을 보고도 대왕오징어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오늘 하루의 보람찬 일과를 되새김질하고는, 이사회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뿌듯해 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K노인과 오징어가 나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K노인은 달을 향해 헤엄쳐 가는 오징어의 다리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꿈에서 본 오징어는 대왕오징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노량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징어와 다를게 없었다. 더군다나 붕어눈도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잔 덕분에 원래 내려야 할 정류장보다 세 정류장이나 지나쳐 내리고는, 이 세상에는 나만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잠이 덜 깬 탓인지, 오징어는 금세 뇌리에서 사라졌다.

이튿날, 토익학원을 마치고 양로원에 갔을때, K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복지사에게 왜 K노인이 보이지 않냐고 물어보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제 가족 분들이 면회 오셨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면서 쓰러지셨어..병원으로 급히 갔는데 아직도 의식이 없으시다네.. 걱정이야.."

노인의 발작을 상상하며, 끓는 물에 산 채로 데쳐지는 오징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노인의 가족과의 면회, 급작스런 발작, 대왕오징어와의 상관관계를 아무리 상각해 보아도 내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무엇이 노인을 발작에 이르게 했을가.. 대왕오징어 James인가 아니면 그의 자식들과 손주들인가.

집에 가는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노인은 붕어의 눈을 달고 있는 대왕오징어의 머리위에 선채로 M16소총을 들고 무언가를 겨누고 있었다. 노인이 말한것 처럼 대왕오징어는 빌딩만큼 컸는데, 노인이 작아보이지 않았다. 노인과 함께 James는 금성 방향으로 유유히 다리를 저어가고 있었다.

-끝-


"우리는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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