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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끄적여보는 중국 삼국의 문화.txt
게시물ID : history_147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5
조회수 : 1765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4/03/15 2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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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의 문화는 이 시기인 3~4세기 무렵의 기록이 비교적 부족한 편인지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만 그나마 있는 동시대의 기록이나 그 밖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각국이 대개 어떤 분위기였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위(魏)나라 같은 경우는 예로부터 고대 중국의 문화,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중심지가 되는 중원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소위 말하는 정통 '중원의 문화' 를 고스란히 계승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왕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보시면 되겠네요. 그래서 이 시대의 명칭인 '위(魏)-진(晉) 남북조' 시대도 삼국시대와는 별개로 바로 위나라가 중화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데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요.
 
전대인 한(漢)의 국가이념이자 통치체제 및 사상으로 군림해오던 유교는 후한 말의 혼란과 폐정으로 권위가 실추합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이 혼란을 틈타 소위 말하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열리지요. 이 과정 속에서 중앙정부의 혼란을 틈타 각지의 유력호족들은 세력을 불리고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차차 삼국의 형태가 완성되어갈 무렵에는 특정 호족가문들이 공신반열에 올라 중앙으로 상경하여 입조하니 이것이 권력과 부를 대대로 세습하는 문벌귀족의 시초이지요.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성립된 국가였기에 문벌귀족이란게 먼저 생겨난 나라도 바로 이 위나라였는데요. 아무래도 특정귀족들만이 권력을 점하고 부를 누리다 보니 자연스레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귀족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는 한대(漢代)와는 달리 사치를 금하던 유교가 비교적 힘을 잃자 생긴 풍조라고도 볼 수있겠습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렸듯 특정 고위가문들에 의한 권력 독점에서 비롯된 문화라고 보시는게 옳을 듯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삼국시대를 기록한 동시대 기록이나 이후 삼국을 통일한 진(晉)대의 기록을 보자면 삼국 중에 유독 위나라가 사치와 향락에 관한 기록이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자면 당장 위의 3대 황제 명제(明帝) 조예부터가 사치스러워 이러한 풍조를 조장한 감도 있고, 조조의 모사 곽가의 사치스러움에 관련하여 기록한 글이라던지 무희들에게 야시꾸리한 옷을 입혔다고 까인 조홍이라던지 여자의 용모와 덕행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당근빠따 용모 아님? 하고 대꾸한 순욱의 둘째 아들 순찬에 관한 기록이라든지.. 등등 열거하자면 꽤 많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이후 위나라를 계승한 진(晉)대에도 고스란히 이어지는데요. 이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문벌귀족들의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하다 못해 막장스럽던 때로, 유명한 일화도 몇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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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남북조 시대의 귀족.
 
 
한편 촉(蜀) 같은 경우는 삼국 중에 제일 기록이 없는 나라로 정사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야사에서의 기록조차도 제일 적어 가늠하기가 어려운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남은 기록들을 토대로 보자라면 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문벌귀족 사회였던 위나라와는 달리 문벌귀족의 존재가 극히 미미하다 못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게 양국의 성립과정이나 배경이 달랐기 때문인데요, 특히 촉이 자리한 곳이 촌구석 수준의 지방이었다는 점이 크지 않나 합니다.
 
중원의 명문호족들의 힘을 빌어 세운 나라였기에 이 공신 호족가문들의 정치개입 여지를 제공하는 바람에 문벌귀족 계층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위나라와는 달리 촉은 중원에서처럼 이렇다할 강력한 유력 호족들이 부재했고 다 고만고만한 지방호족들의 연합과 도움을 바탕으로 건국된 케이스이니 당연히 문벌귀족이라는게 자리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뭔가 독특한 배경을 가진 촉에서는 주로 재상 중심의 정치가 자리잡게 됩니다. 다들 아시는 제갈량이 그 중 한명이자 재상정치의 시초이기도 하고요.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진 놀자판이던 위나라와는 달리 촉나라는 이런 놀자 분위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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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제갈량을 시작으로 이후로 줄줄이 재상직을 대행한 비의, 장완, 동윤 등, 이들 모두가 주로 과로로 죽거나 혹은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된 암살로 죽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이들에게는 별로 놀자는 분위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고 우두머리인 재상부터가 줄창 일만 하다 뒷목 잡고 쓰러져 죽었는데 그 아랫것들이 맘놓고 놀수는 없었겠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제갈량이나 장완, 비의가 일 안하냐고 아래사람들을 갈궈댔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하고요.
 
물론 무조건 귀족문화의 존재유무에 따라 촉에는 이렇다할 문화가 없었다라는 식으로 단정짓기는 뭐합니다. (하지만 당장 위나라만 해도 전대의 한 왕조와 구별되는 요인이 바로 문벌귀족의 등장에 따라 생겨난 귀족문화 때문임을 감안하면..) 다만 귀족문화란게 없었다 뿐이지 분명 촉에도 고유의 문화나 특색은 존재했을겁니다. 그나마 유추해보자면 아마 촉나라 역시 전대 한(漢) 왕조를 계승하지 않았나 하는 것인데요.
 
 
단지 촉이 한을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도 전대의 한 왕조의 정치, 경제, 군사제도 등 여러분야에서 한 왕조의 유물을 가져다 쓴 촉나라였기에 한대의 문화 또한 고스란히 계승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만 해볼 따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그저 당시 촉의 풍속이나 언어, 문화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글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죠.  
 
 
마지막으로 오(吳)나라의 경우는 촉이나 위와는 전혀 다른 듯한 느낌을 줍니다. 위나 촉은 그래도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오나라는 중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요. 오나라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유독 괴기스러운 썰들이 많습니다.
 
남방의 어느 이민족으로 낮에는 머리가 붙어있다가 밤에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 혼자 돌아다닌다는 '낙두민' 족 얘기나 귀신이나 요괴 관련 이야기, 심지어는 외계인이 내려왔다는 이야기 등, 삼국시대 야사 및 일화를 모아 기록해둔 <수신기>를 보면 오나라에서의 괴설들이 대다수로, 삼국 중 가장 많은 편입니다. 여담이지만 중국신화에서 등장하는 반고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기록도 바로 이 삼국시대 오나라 시대에 쓰여진 책에서인데요. 이걸 보면 오나라가 유난히 이런 쪽으로 특화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오나라가 위치한 중국 남방 특유의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중원의 북방문화가 소위 말하는 괴력난신(귀신이나 기이한 이야기, 전설 따위를 말합니다)을 취급않던 유교에 얽매여 상대적으로 신화나 전설 등의 분야에서의 이야기가 거의 전무했던 것에 비해 이 당시 남방에서는 비교적 유교의 입김이 그리 강하지 않았고 거기다 남방의 이민족들 특유의 전설이나 설화가 가미되어 오나라에서는 유난히 이런 괴기한 썰들이 난무하는게 아닌가하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부분에서도 그렇고 그 밖의 다른 면에서도 따져보면 오나라는 삼국 중 독고다이스러운 부분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적다보니 잡스러운 글이 되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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